88. 이것도 패륜인가?(4)
허!
믿기 힘든 무진의 성취였다.
권왕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에 휩싸였다. 수십 년을 수련한 무공에 대한 회의와 좌절을 맛보았다.
-당연한 결과야.
-이 정도도 못 해서야 쓰나.
-날 만족 좀 시켜 봐라.
권왕은 무심코 내뱉었던 지난 시절의 말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지만, 그들이 느꼈던 감정이 어떠한지를 이제야 체감했다.
그저 부족하고 모자란 자들의 시기와 질투라 여겼거늘. 이제는 자신이 그들과 다르지 않은 처지가 되었다.
“나는 권왕이다!”
그들이나 창황처럼 좌절하거나 굴복하진 않았다. 무진을 시샘하기보다는 강함을 추구하는 동반자로서 대했다.
올바른 선택이었다.
평정심을 잃지 않고, 보고 배우려는 권왕의 뚝심이 빛을 발하게 되었다.
퍼퍼퍼펑!
무진의 신화천권에 맞서 권왕도 밀리지 않고 동수를 이루었다. 수세적이었던 기세를 돌려세우는 기연을 얻었다.
“봤느냐, 제자 놈아!”
“대단한데요. 그 보답으로 이번에는 4.0 버전입니다.”
“……뭐?”
“아까 말했잖아요, 7.0까지 있다고.”
“……농담이지?”
빌어먹을, 아니구나!
지금까지 이보다 완벽한 신화천권은 없으리란 권왕의 자신감이 한순간에 고꾸라졌다. 또다시 좌절을 맛보게 해 주는 무진의 버전업 신화천권이었다.
“나는 권왕…… 쿠웩!”
포기하지 않는 뚝심은 정말로 대단했다. 그러나 나이를 초월한 노익장도 한계는 분명히 있었다. 3.0 버전을 따라잡은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 이상은 오늘 안에 이루긴 불가능하다. 이는 초등학생보고 양자역학에 대한 논문을 쓰라는 이치와 같았다.
퍼억, 뻐억, 쩌엉!
여전히 한 끗 차이긴 했다. 다만, 무진과 권왕에게 한 끗 차이는 아예 다른 수준이었다.
좁은 간격에서 잔상을 일으키는 이형환위가 펼쳐졌다. 무진과 권왕 모두 상식을 벗어난 속도였다. 실로 경이적인 보법이지만, 잔상의 꼬라지는 일방적이었다.
턱이 들리고, 옆구리가 꺾이고, 헛바람을 마시고.
무진은 사정을 두지 않았다. 권왕을 사부가 아닌 무인으로만 대했다. 그것이 권왕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부는 진정한 무인입니다.”
냉바닥에서 잔 것도 아닌데, 입이 돌아가서 대답할 처지는 아니었다. 핏물을 분수처럼 내뱉으며 영화와 같은 장면을 완성했다.
퍼억, 퍼퍼퍼퍼퍼퍼퍼퍼퍽!
허공만 내지르던 권왕의 수비는 이제 무방비가 되었다. 일격 일격의 파괴력이 뼈를 관통하여 영혼을 괴롭혔다.
이게 영혼에 새기는 주먹인가?
비명이 터져 나오려고 하는데,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사일런트.”
1층에서 층간 소음을 방지한 무진은 권왕을 마음껏 두들겼다.
그런 말도 있지 않나.
맞아 보지 못한 자는, 맞는 자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무인으로서 한 꺼풀 벗어던지려면 일방적인 구타도 당해 봄 직했다. 권왕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새겨 주었다.
무진은 끝까지 방심하지 않고 좌우 페이팅까지 걸어 가며 주먹을 쉬지 않았다.
“잡힌 채 맞아 보신 적 없으시죠?”
“……?”
별로 알고 싶지 않아…… 커억!
무진에게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언제 사부님의 목을 잡아 보겠냐고.
목을 잡고 배에 주먹을 꽂았다.
푸엇!
한 백 발쯤 맞고 나니 입에서 핏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내장이 조금 상한 듯하다. 워낙 튼튼한 몸이라 걱정하진 않았다.
꽈아앙!
바닥에 찍어 보고, 공중에 던져 보고, 스노우볼처럼 굴려 보고. 무진은 권왕의 발전을 위해서 다양한 체험을 선사했다. 오늘의 새로운 경험을 통해 권왕은 일취월장할 것이다.
“사부, 정말 대단하세요.”
“……커어어어어!”
“제가 이렇게까지 주먹을 쓴 상대는 사부가 처음입니다.”
“……커어어어어!”
이놈아, 나 죽는다!
자꾸 치켜세우는 바람에 살려 달란 말도 못 하게 했다.
혹시, 일부러.
사실이면 굉장히 무서운 놈을 제자로 받아들인 게 되었다. 솔직히 이제는 꿍꿍이가 있어 봤자,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있다 한들 어떻고, 없다 한들 어떻단 말인가? 정몽주의 일편단심이 어째 훌륭한 선택 같지 않아 보였다.
그냥 그런 줄 알아야 했다.
***
최신형 스마트 워치로 시간을 확인했다. 지수는 아빠의 집무실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갔다.
타닥, 타다다다닥!
아빠는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문서를 작성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숙부의 배신으로 아빠도 상심이 컸다. 설상가상으로 배신자조차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가주로서 챙겨야 했다.
“남은 일은 내일 하고, 이제 퇴근해요.”
“가내의 일에 퇴근이 어디 있어. 조금만 하면 된다.”
따지고 보면 집무실과 집이 한 공간에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중국산 바이러스로 재택근무가 유행하기 이전부터 권왕가는 실천해 왔다.
“할아버지 보러 가요.”
“네 할아버지는 건강하니 걱정하지 말거라. 그 인간은 죽고 싶어도 죽지 않는 불사신이니까.”
“불사신도 수명 외엔 만능이 아니잖아요. 지금쯤 연무장에서 무진이하고 싸우고 있을걸요.”
“예상했던 일이 아니냐.”
“저도 결과가 궁금해서요.”
유경중은 일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나왔기 때문이다. 무진이가 아버지를 도왔다곤 해도, 기습이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었다. 그런데도 지수는 승패를 거론하고 있었다.
“녀석이 걱정되는 건 아니고?”
“걔는 오늘 피똥 좀 싸 봐야 해요. 그래야 하늘 위에 하늘이 있는 줄 알죠. 전엔 안 그랬는데 요즘엔 얼마나 건방져졌는지 몰라요.”
“보기 좋지는 않다만, 그래도 될 만한 실력이 아니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어요.”
열일곱 살이 고개 숙일 나이는 아닐 텐데.
사실이면 병원 가 봐야지.
자주 가는 병원을 소개…… 크흠!
나는 아직 굳건하다.
장난기가 다분한 딸의 태도에 유경중은 하던 일을 정리했다.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얼마나 대단하기에 창황과 동생을 쓰러뜨렸는지 말이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삶에서 업무가 주가 되었어. 오랜만에 같이 식사나 하자꾸나.”
“그러려면 할아버지가 이겨야 하는데.”
“걱정도 팔자구나. 누누이 말하지만, 네 할아버지이자 내 아버지는 인간이 아니다.”
“걔도 인간 같지 않기는 마찬가지예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더욱 궁금하구나. 어디 얼마나 대단한지 가 보면 알게 되겠지.”
아빠는 할아버지의 패배를 거론하지 않았지만, 지수는 조금 많이 걱정되었다. 그간의 무진은 언제나 말도 안 되는 짓을 당연하게 저질러 왔었다. 할아버지라면 다르겠지만, 혹시나 했다. 자칫 무진의 기고만장이 하늘을 찌르다 못해 우주로 날아가 버릴 수 있었다.
‘그 꼴을 대체 어떻게 보라고!’
최소한 고전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미래든, 현재든 무진이가 고전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미래에서도 회사원 주제에 자신조차 고전했던 상대를 일격에 소멸시켜 버렸었다.
‘지금도 그렇고.’
현재나 미래나 변하지 않는 무진의 초지일관이 지수를 답답하게 했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고 싶었다.
지수는 기대를 품고, 아빠와 함께 할아버지의 연무장을 찾았다. 예상보다 조용했지만, 연무장의 결계를 감안했다.
생체인식과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드륵!
연무장의 이중으로 된 문이 순차대로 닫히고 열렸다. 펼쳐진 내부의 광경에 두 사람은 망부석처럼 얼어붙었다.
아~!
침묵이 강요되었다. 말로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다. 본 그대로 발표하는 순간 공식적인 거짓말쟁이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파앙!
뻐억!
퍼퍽!
대결이라고 할 수도 없다. 누군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었다. 발에 차이고, 죽빵을 맞고, 바닥에 찍히고. 하나하나가 아프다 못해 죽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구타였다.
그것도 일방적인.
꺼르르르륵!
거품을 물고, 흰자위가 보이고, 산발이 되었다. 사람 몰골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그런데도 일상에 지친 도축 업자처럼 작업을 반복했다.
표정만 보면 하기 싫어하는 것 같은데, 굉장히 잘한다.
꽈악!
권왕의 목을 틀어쥔 무진은 가주와 지수를 돌아보며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왔어.”
“그래, 왔어……가 아니고.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얼떨결에 대답한 지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근래에 들어 경로사상이 땅에 떨어지긴 했어도, 이 사태를 반드시 해명해야 했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예의 없는 행동은 참아 줄 수 없다.
“뭐 하긴, 사부와 대련 중이야.”
“세상천지에 그딴 식의 대련이 어디 있어?”
“사부가 먼저 제안했어.”
“아니 그래도 그렇지, 지금 어딜 잡는 거야?”
“마땅히 잡을 만한 곳이 없잖아.”
의식이 거의 사라진 권왕이 발작할 괘씸한 발언이었다. 목 말고도 잡을 때가 많았다. 오늘은 시스템 에어컨이 서늘한 데다가 하도 많이 맞아서 움츠러들었을 뿐이다.
“아빠도 가만있지 말고 뭐라도 해 봐요.”
“……시원하구나.”
“어?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아, 그렇지.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서. 녹화라도 해야 하나?”
안절부절못하는 딸과 달리 유경중으로선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행한 만행들이 떠올랐다.
절벽에서 밀고, 바다에 빠뜨리고, 앞이 안 보이도록 두들겨 패기도 하고.
그런 아버지 밑에서 무공 수련하랴, 석사 학위를 받으랴. 과거가 떠올라 눈물이 앞을 가린다.
한 번이라도 대련에서 이겨 보고 싶었으나,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괴물처럼 강해졌었다. 근래에 들어 심권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을 땐 기겁했었다.
얼마나 행패를 부리려고.
아버지가 창황에게 죽을 뻔하기는 했으나, 그건 실력으로 졌다고 하긴 어려웠다. 마치 장수왕을 아버지로 둔 기분이라고나 할까? 살날을 따져 보면 자신보다 오래 살 팔자였다.
그런 아버지가 새파랗게 어린 녀석에게 두들겨 맞고 있었다. 이건 영상으로 찍어서 대대손손 보존해야 할 소장각이었다.
“아빠, 지금 그런 말 할 때야?”
“괜찮아. 한강 다리 안 무너졌어.”
“할아버지가 죽게 생겼다고. 어서 말려야지. 야, 인마! 대체 언제까지 할 거야?”
할아버지가 동네북이나 간디도 아니고, 아무리 단단한 육체를 지닌 금강지체라고 해도 이제는 헐렁헐렁했다.
“어허, 아녀자가 사내의 일에 끼어드는 거 아니다.”
“엄마한테 이를 거야!”
“커음, 그건 아주 많이 곤란하군.”
5분 미만의 영상이 안타까웠다. 다행히 1분당 30원꼴로 계산해도 유튜브 폭발각이었다. 소장보다는 만천하에 공개하고 싶은 욕구가 더 강했지만, 권왕가의 가주로서 소임을 다했다.
그런 유경중의 아쉬움을 무진이 날려 주었다.
“아버님, 제 보디캠은 1시간짜립니다.”
“얼만가?”
“그거야 영상의 질에 따라 다르지요.”
“호오, 대단하군.”
여태 무진을 오해하고 있었구나.
유경중은 반성했다. 이처럼 바른 녀석을 어째서 그리 호도했을까나? 그간의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다면 오늘로서 다 풀었다.
장인과 사위는 언제나 옳은 관계였다.
‘이것도 패륜 아닌가?’
배신과는 다르지만, 사부님의 이불킥은 예정된 시나리오였다. 영상을 가지고 두고두고 써먹을 요량인 듯했다.
꺼르르르!
다행히 무진과 유경중의 작당을 권왕은 듣지 못했다. 지수의 요구대로 이쯤에서 멈추자 긴장이 풀리셨는지 기절하셨다.
대결이 끝난 이상, 무진은 제자로서 예의를 갖추었다.
“힐.”
솨아아아아!
금강의 휘광이 아우라처럼 퍼졌다. 고귀한 신성처럼 휘광이 닿기가 무섭게 권왕의 육신이 원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무지막지한 마력으로 1계식의 치료 마법임에도 기적을 일으켰다. 성자라 칭하며 사이비 교주를 해도 먹고살 만한 이능이었다.
“요나. 샤워.”
-요나.
상처를 치료한 후 물의 정령으로 사부의 육신을 깨끗하게 세탁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산뜻하게.
“화염풍.”
마지막 드라이까지 완벽하다.
무진은 사부의 단전에 손을 대서 꼬였던 기맥을 풀어 주고, 내력을 순환시켰다.
마법, 정령, 무공으로 이어지는 치료, 세탁이었다. 엉망진창이 되었던 권왕은 뽀송뽀송해지고 말았다.
하!
과정을 지켜본 유경중은 말문이 막혔다.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실로 놀라운 연계였다.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 버린 무진의 신위에 연신 경탄했다.
“아버님, 제 보디캠은 16k 초고화질을 지원합니다.”
“호오, 준비성까지.”
인간의 눈이 감지하는 영역을 벗어나는 화질이라니, 아버지의 숨구멍까지 볼 수 있었다.
유경중에게는 돈이 얼마가 들든 반드시 구매해야 했다. 하나, 가주로서의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그때 이 모든 걸 한꺼번에 얻을 방법이 떠올랐다.
“무진 군.”
“예, 아버님.”
“식은 언제 올릴까? 우린 오늘이라도 상관이 없네.”
“……?”
일단 예물로 영상부터 내놓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