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이것도 패륜인가?(2)
지수가 찾아왔다.
평소와 다른 표정을 보니 정신적으로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다. 던전을 공략한 이후로 상념이 많아진 모양이다. 미래의 냉랭했던 관계를 고려하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텐데도, 충격을 받은 듯했다.
마음을 좀 진정시킬 겸.
아버지가 진 회장에게 받은 중국산 고급 용정차를 타서 다과와 함께 내어 주었다. 예전에는 황금보다 비싸다고 했는데, 지금도 만만치 않은 고가였다.
비싼 만큼 향이 정말 끝내주기는 했다. 이 은은하고 고아한 향에 혀가 길들어지면 다른 차는 못 마신다던데.
호르륵!
차를 마신 지수는 무진을 보며.
“콜라 없어?”
“……기다려 봐.”
“얼음 동동.”
“막걸리냐?”
햄버거와 콜라에 길들여진 지수를 너무 올려쳤던 무진의 오판이었다. 냉장고에 있는 콜라를 대형 컵에 따라 얼음을 넣어 주었다.
꿀꺽, 꿀꺽!
500mL는 될 텐데, 지수는 원샷을 때리고 트림조차 하지 않았다.
매 순간이 시트콤이네.
용정차든 콜라든, 안정을 찾았으면 됐다. 무진의 다소 냉정한 어투는 순전히 기분 탓이었다.
“이쯤에서 끝나 다행이잖아. 만약 사부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했어 봐. 고민으로 끝나지 않았을걸.”
“너는 꼭 말을 해도 정나미 떨어지게 하냐.”
“사부님이 돌아가신 미래를 떠올려 봐. 이제는 그 모든 일이 우연이 아닌 네가 말한 대로 이루어지고 있어. 그러니 죄책감 느끼지 않아도 돼. 그때 손을 쓰지 않았다면 불행한 미래는 바뀌지 않았을 거야.”
“나도 그렇게까지 안타깝진 않아. 하지만 성좌화는 다른 문제야.”
들어 보지 못한 개념이긴 해도, 단어 그대로라면 성좌의 능력을 가지고 온다고 보면 될 것 같았다.
지수의 설명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다만, 능력만이 아니라 성좌의 성향까지도 전수되었다.
“께름칙한데.”
“성향이 바뀌는 예가 간혹 있기는 해도, 아예 다른 사람이 된다고 볼 순 없어.”
“그 정도면 꽤 심각한 거 아닌가?”
“대부분 성좌는 자기 성향에 따라서 사람을 선택해. 그러니 변화가 있을 리 만무하지.”
“원래 그런 연놈들이다?”
“성좌화로 아예 달라진 각성자 대부분이 사실은 본성을 감추고 있었을 가능성이 커.”
유지호의 성좌가 어떤 부류인지 대충 감이 잡히긴 했다. 본인이 말하지 않는 이상 알아내긴 어렵지만, 예상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혹, 성좌가 폐인을 원래대로 고쳐 주기도 해?”
“사도가 된다면 그럴 수도 있어.”
“유경운과 유지호가 사도가 될 확률은?”
“경우의 수를 따져 봐도 매우 희박해. 시련을 통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성좌는 패자를 신뢰하지 않아.”
“탐욕이나 복수의 화신이 성좌라면, 그들만큼 좋은 재료도 드물잖아. 역시 죽이는 편이 나았어.”
평상시에도 유비무환은 중요했다. 개과천선을 한다면 모를까,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바람을 잡은 근거는 있으나, 원래 그런 놈들이었다.
“신경 쓰인다고 다 죽이면 주변에 사람이 남아나겠어?”
“매사에 신경을 쓰고 살면 병나. 그럴 바엔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편이 이로워.”
무진은 사요공, 흑무흡정술, 암시, 주술을 총합하여 금제를 진화하긴 했다. 나름 만능인 줄 알았는데, 전적으로 의존하는 건 위험하단 판단이 섰다.
인과가 드러나 있다면 모를까, 성좌의 선택은 불특정이었다. 만약의 위험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차후 엄청난 화근을 불러올 수 있었다.
무진이 가장 공감하는 속담이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것이다. 당하고 난 후엔 아무리 노력해도 원래대로 돌아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광폭화도 성좌의 능력이야?”
“그건 속성이고, 나는 밝음의 성좌인 광신(光神)이거든.”
“미칠 광(狂)이 아니고?”
“내가 어딜 봐서 광인이야? 아주 조금 컨트롤이 안 됐을 뿐이거든.”
“조금이란 뜻이 그런 식으로 사용되는 건 어폐가 있지 않을까?”
“예로부터 숙녀의 변덕은 사랑이라고 했어.”
사랑에 대한 고찰을 다시 해 봤던 무진은 여전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 철학적인 사고를 하기에는 지수의 지능지수가 의심스러웠다. 이전보다 뇌의 역량이 향상되기는 했어도, 지하에서 겨우 바닥으로 올라선 수준이었다.
‘성좌가 거짓말했을 수도 있고.’
성좌화란 말을 듣는 순간부터 불신은 더욱 커졌다. 속단은 금물일 수 있으나, 남의 힘에 의존하는 것부터가 맘에 들진 않는다.
무진은 온전히 본인의 능력으로 이루어야 만족하는 성향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생도에 불과하니 주변을 충분히 이용해야 했다. 완벽하지도 않은 주제에 오만은 곤란하다.
“할아버지 앞에서 잘도 실력을 드러냈네. 원래 그럴 생각이었어?”
“그렇지.”
“이럴 거면 처음부터 말을 했어야지.”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고 했어. 그리고 이젠 확실해졌잖아. 그놈들이 사부님을 노린 이상, 사부님은 온전히 우리 편이 된 거지.”
“네 속내를 할아버지가 알면 많이 서운해하셨을 거야.”
무진은 지수의 말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사람의 기억이란 불완전하고,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저장하는 습성이 있었다. 불신할 필요도 없겠지만, 조건 없는 신뢰는 낭패의 지름길이었다.
무진은 항상 그 시간대, 정세의 변화를 지수의 기억과 조합했다. 변곡점이 우연히 발생할 수도 있으나, 대부분은 사유가 있었다. 미래를 최대한 불특정이 아닌 순차대로 흘러가도록 해야 했다. 그래야 특정하기도 수월하고, 대처하기도 용이하다.
“1차로 걸러 냈으니, 좀 더 활용해 보자고.”
“네가 웬일인가 했어, 그럼 그렇지.”
살렸으면 그만한 가치를 해야 마땅했다. 가치가 없다면 살릴 이유도 없는 법이다.
***
그리드6, 조던.
그는 실패한 연유를 확인하기 위해서 십영 중 넷을 동원했었다. 십영은 각자 맡은 역할이 있어서 동원할 수 있는 최대였다.
이번 작전은 실패할 수도 없고, 실패해서도 안 되었다. 한데, 권왕은 살아 있으며 연결 고리는 은폐되어 연락할 수조차 없는 형편이다.
오랫동안 기획, 작업한 권왕가의 장악이 한순간에 어그러져 버렸다. 그야말로 완벽한 실패였다.
조던으로선 사태를 크게 키우기도 어려운 처지였다. 조만간 상부에 알려질 테고 책임을 면하기 어려웠다. 어떻게든 피해를 최소화하고, 실수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심권을 썼다고?”
“그렇습니다.”
조던의 안색이 검게 죽어 갔다.
이건 좋지 않았다. 창황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권왕의 무력 수위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는 뜻인데.
한국의 무인 중 완전한 절대경에 오른 무인은 다섯을 넘지 않았으며. 그들은 초입의 수준에 불과했다. 심권을 사용했다면 최소한이 절대경의 중경을 넘어선, 어쩌면 상경에 도달했을 수도 있었다.
대외적으로 권왕이 창황보다 우위에 있지만, 실제로는 비등한 경지였다. 저주, 독, 스킬에 당한 권왕이라면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나, 드러난 권왕의 무위는 창황이 둘이라고 해도 힘든 격차였다. 그만큼 하경과 중경은 극복하기 힘든 간격이었다.
게다가 권왕은 유경운의 배신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저주와 독에 대한 대비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컸다.
사태를 복기할수록 조던은 초조해졌다.
실패의 원인에서 자신의 판단 실수가 큰 몫을 했다. 그래서일까? 더욱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인은 전력의 3할을 숨긴다고 했으나, 권왕은 애초에 그런 부류가 아니다. 떠벌리기 좋아하는 오만무도한 성향의 권왕이 사실은 고도의 전략가였다는 건가?
권왕이 내막을 짐작하고 있는 이상, 손녀를 인질로 잡기도 어려웠을 테고. 관측기마저 사라진 걸 보면 이쪽에 대한 낌새를 알아챘을 수도 있었다.
‘창황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서 다행이군.’
심권을 사용하는데도 창황이 달려들었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돌아갈 뻔했다. 그나마 사리 분별이 되어서 최악은 면한 것이다.
‘다행인데, 이 찜찜함은 뭘까?’
창황은 권왕에 대한 열등감이 강했다. 그런 그가 그리 간단히 물러서다니, 지나치게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자존심 때문에 대계를 그르칠 수 있는 자라 께름칙한 구석이 있었다.
하나, 다른 것도 아니고 심권이었다. 창황의 무형창으론 상대가 되지 않았다. 천극창을 대성하여 초월했다면 모를까, 불가능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창황을 의심하게 된 연유는 일전의 사태들 때문이다. 말도 안 되지만, 창황가의 천극창이 사용되었다. 일반적인 창술도 아니고, 천극창의 오의를 아무나 펼치진 못한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천극창이 사용되었었다.
‘우선은 이 사태부터 수습해야 해.’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계획이 악수였다. 이런 가운데 창황마저 변심했다면 커다란 패착이 될 수 있었다. 최대한 조용히 수습한 후, 다음을 위한 돌다리로 삼아야 했다.
***
무진은 실내 연무장의 레그 익스텐션 머신에 앉아 있었다. 사부님을 기다리는 동안 중량을 치지 않고 4t에 맞춰 무릎에 텐션을 주었다.
초당 10회의 속도로.
처처처처척!
무릎과 고관절 향상에 이만한 운동도 드물었다. 무게가 살짝 아쉬우나, 속도와 횟수로 만족했다.
매번 올 때마다 사부님의 머신과 덤벨은 탐이 났다. 다른 곳에서 이 속도로 하면 쇠가 불덩이가 돼서 녹아 버리곤 했다.
‘던전에서 나오는 광석과 뼈를 수집해 놓아야겠어.’
일반적인 철로는 운동이 되지 않았다. 던전의 광석과 s급 이상 마물의 뼈로 제작해야 했다.
제작은 기술자와 야장의 영역이기에 무진으로선 보존, 강화 마법을 9계식까지 익힐 필요성이 있었다.
‘드래곤이라도 나왔으면 좋겠다.’
드래곤 본과 스케일로 만든 머신과 덤벨이라, 꿈의 조합이었다. 다급하면 무기로도 사용 가능한 다용도 헬스 기구였다.
드래곤 덤벨.
드래곤 머신.
드래곤 철봉.
이름도 참 멋지지 않은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머신에 빠진 사이, 사부님이 연무장으로 들어오셨다.
흐음.
권왕은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며, 제자를 유심히 관찰했다.
요리 보고, 저리 보고.
흐미, 흐미!
샅샅이 살펴봐도 전과 다른 모습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것이 권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제야 자신에 부합하는 제자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주어도 아깝지 않을 녀석이거늘.
‘나조차 속였다는 건가?’
자신은 한국을 대표하는 10명의 각성자로서 딱 보면 견적이 나오는 정확한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한데,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속성, 스킬, 아이템으로 숨겼다고 하기엔 창황과 둘째를 너무나 손쉽게 제압해 버렸다.
비록 전력의 손실이 있었다곤 해도, 제자의 성취는 정상적이지가 않았다. 저 나이에 절대경에 근접했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인 과정을 벗어나 있었다. 화경만 해도 후작급의 전력으로 치부하거늘, 제자는 공작급에 이르렀다.
가르친 지 고작 3개월, 그것도 무공이 아닌 마도였다.
‘내 제자라고 할 수나 있나?’
안다고 자부했는데,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 관계를 스승과 제자라 부를 수 있겠는가. 무릇 사부와 제자는 비밀이 없어야 했다.
사제 관계에 불신이 생긴 이상, 제자는 사부를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했다.
이놈은 연무장에 오더니 머신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러면 누가 봐도 내 제자잖아.
어떤 상황, 난관에 부딪혀도 하루에 해야 할 할당량을 채우겠다는 머슬의 의지, 그것이야말로 권왕의 진정한 정수였다.
‘초당 반복이 확실하군.’
리드미컬한 데다가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고 있었다. 역동적으로 변하는 근육의 흐름이 훤히 보였다.
후우!
200회씩 100세트를 끝낸 무진은 머신에서 일어나 예의를 차렸다. 밥 먹을 때는 건드려도, 운동할 때는 건드리면 안 된다는 사부님의 가르침을 따랐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십니까?”
“그런다고 뚫릴 몸이더냐?”
잔뜩 펌핑이 되어 성을 내는 육체는 강철보다 단단했다. 근육이야말로 강철의 의지였다.
“본다 한들 알아낼 순 없습니다. 제가 작정하고 숨겼거든요.”
“이젠 안 숨기는구나.”
제자의 뻔뻔함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다. 전에도 보통 녀석은 아니었거늘. 건방져 보이는 태도조차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권왕은 왜 그런지 잘 알고 있었다.
현대화되었다고 해도 세상은 약육강식이다. 법에 근거하여 죄를 지으면 처벌을 한다지만, 초인은 법을 초월하는 존재였다. 말도 안 되는 억지조차도 초인에겐 당연한 권리가 되었다. 그러다 최소한의 선마저 넘기면 빌런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