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이것도 패륜인가?(1)
던전 웨이브가 끝나고 권왕가는 사태 수습에 동분서주해야 했다. 초창기와 달리 안정화되던 던전 공략 중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공식적인 던전 공략에서 사상자가 발생한 이상, 구체적인 사유를 발표해야 한다.
권왕가는 용암 던전이 2차 각성을 하면서 대응이 늦었다고 했다. 던전의 등급이 올라갈 때 발생한 마나 파동과 상향된 마정석이 증거였다.
사람이 죽은 안타까운 사고였지만, 사상자가 일반인이 아닌 무인이라 여론은 조용한 편이었다.
하나, 애도하는 여론과 달리 권왕가의 분위기는 초상집이었다. 공식적으론 던전을 공략하다 발생한 안타까운 사고였지만, 실제로는 배신과 패륜이었다. 외부에 알려져 봤자 빌미를 제공할 뿐이기에 입단속을 해 놓았다.
“죽이시지 왜 살린 겁니까?”
“이 녀석, 그래도 네 동생이다!”
“동생은 무슨, 그 파렴치한 새끼가 조카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맘에 없는 소린 하지도 말거라.”
“제 맘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살려 두면 두고두고 화근이 될 겁니다. 설마 개과천선이라도 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형제였다. 권왕으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선택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혈육 이전에 가주로서 말하고 있었다.
가문을 위했다면 유경운을 죽이고, 던전 내 사망으로 처리하는 편이 수월했다. 그랬다면 동정론을 키워서 가문의 명성을 높일 수 있었다.
유경운이 살아 있는 이상, 어떤 식으로든 문제의 여지가 남았다. 폐관 수련을 이유로 가둬 둘 순 있어도, 자고로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내가 책임을 진다고 하지 않더냐!”
“책임을 진다는 분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돌아옵니까? 무진이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창피한 일입니다!”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테니, 그만 좀 하거라.”
“아버지가 그 새끼를 싸고도니 이런 사달이 일어난 겁니다. 이럴 거면 녀석에게 주지 왜 저한테 줘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듭니까?”
“너도 알다시피 나나 운이는 가문을 다스리기엔 부족해. 말아먹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빌미를 제공한 권왕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었다. 그래도 하는 말마다 아비의 가슴을 난도질하는 첫째가 얄밉기는 했다. 자식에게 칼 꽂힌 아비한테 꼭 그런 식으로 말을 해야 하는지, 원. 누굴 닮아서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제자 녀석도 마찬가지네.
아들의 배신에 상처를 입은 스승을 보듬어 주지는 못할망정, 죽이는 편이 효율적이란다. 자식을 낳아 봤어야 그 심정을 알지, 부모의 마음을 이렇게나 모른다.
“그 녀석만이 아니라 제수씨를 포함해서 조카들까지 단속해야 하는데, 아주 바쁘시겠습니다.”
“그걸 내게 다 떠넘기겠다는 거냐?”
“책임을 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혹시, 말로만 때우고 저보고 알아서 하라는 건 아니겠지요?”
“끄응, 매정한 녀석! 알았으니 그만해라.”
“이번 일은 그 녀석 혼자 단독으로 움직였다고 보기엔 석연찮은 구석이 너무 많습니다. 창황이 직접 나섰다면 다른 가문이나 길드도 안심할 수 없는 일이고요.”
말은 그렇게 해도, 유경중은 아버지의 무사 귀환에 그저 감사했었다. 하지만 숨겨진 내막을 알수록 화가 났고, 단순한 사태가 아니기에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문 내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좋은 줄 알았던 형제 사이조차도 현실을 외면한 나태한 편의주의에 불과했다. 가문의 주인이라면 가족이라도 냉철하게 판단했어야 한다.
아버지에게 화를 냈지만, 유경중은 방만했던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만약 무진이 없었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칠대가문이나 대형 길드에서 개입했다고 보는 것이냐?”
“아니면 창황가를 움직일 제3의 세력일 수도 있고요. 현재로선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야 합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는지, 눈먼 장님이 따로 없습니다.”
사태의 핵심은 동생의 패륜이 아니라, 아버지를 제거하여 권왕가를 좌지우지하려는 세력의 존재였다.
암중의 세력은 창황가를 움직일 힘을 가지고 있었다. 사건을 가볍게 여기기엔 의도와 목적이 심상치 않았다.
“세상에 믿을 놈들이 없구나.”
“가족도 못 믿는 판국에 어쩌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제가 지수를 아주 잘 키웠기에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번지지 않은 겁니다. 벌써, 그만한 경지에 오를 줄이야. 역시 내 딸입니다.”
“말은 제대로 해야지. 지수는 내가 키웠어!”
“아버지는 결국 할아버지일 뿐입니다.”
“그딴 말이 대체 어딨어?”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지요.”
이 지경이 되고서도 지수의 활약상에 부자는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팔불출은 유전인가? 아주 뿌듯해 죽으려고 한다.
“아비란 녀석이 그간 딸의 성취도 몰랐으면서!”
“그러는 아버지는 제자의 무위도 모르고, 동생의 배신도 몰랐지요.”
“크윽! 비겁하게 이럴 거냐?”
“사실을 말하는데 비겁할 게 뭐가 있습니까? 그나저나 기습이었다곤 해도, 창황과 운이를 동시에 제압하다니 듣고서도 믿기 어렵습니다. 혹, 아버지보다 강한 거 아닙니까?”
“이놈이, 나 아직 안 죽었다.”
창황과 동생이 아버지와 사투를 벌인 직후라는 점이 걸리지만, 무진의 무위는 최소한 절대경에 도달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열일곱 살에 절대경이라니, 누가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사실대로 말해도 거짓말쟁이라고 욕이나 먹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최대한 무진이에 관해서는 숨기는 편이 좋습니다. 만일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전적으로 아버지 때문입니다.”
“그게 어째서 나 때문이야?”
“무진이는 가문의 숨겨진 병기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건 아버지, 저, 죄인뿐이지요. 제가 말할 리는 없고, 아버지가 떠벌릴 리 없으니 나머지는 죄인을 단속하지 못한 책임자에게 있겠지요. 아닙니까?”
“……그렇구나.”
인과가 너무나 분명해서 권왕은 말문이 막혔다. 아니라고 해 봤자, 아들을 살린 책임이 있었다. 아비로서 아들을 단속 못 했으니, 하소연한들 누가 들어 주기라도 하겠는가.
“그나마 아버지는 친구가 없어서 다행입니다. 술자리가 많았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이놈이, 나 친구 많아!”
“그럼 데려와 보세요. 이제는 초면에서 벗어날 때도 됐잖아요.”
“네가 불편할까 봐 데려오지 않는 거야.”
“저 같아도 아버지랑은 친구 안 합니다.”
아들의 팩트 폭력에 권왕은 주화입마가 올 뻔했다. 반박을 해야 하는데, 전화번호부가 지나치게 깔끔하다.
“내 아들 주제에 아비한테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지금 배신자들의 퇴직금, 위험수당, 산재 처리까지 해야 하는데 같이 하실래요?”
“아차, 할 일이 있었는데 깜빡했구나.”
“하긴 아버지는 항상 공사가 다망하시지요.”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는 권왕이란 타이틀을 빼고, 공무에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
푸억!
놀라서 밥풀이 튀어나왔다. 더럽게 사방으로 퍼져야 했지만, 허공에서 멈췄다. 무진은 허공섭물을 발휘해 밥알을 하나하나 잡아챈 후 아버지의 입속으로 곱게 다시 넣어 주었다.
쏘옥!
밥알은 돌아오는 거라나.
“허억, 이놈아!”
“농민들이 힘겹게 수확한 쌀입니다. 하루에 한 끼도 못 먹는 사람들도 있고요.”
“이거 수입산인데.”
“어쩐지 밥맛이 좋네요.”
미국산이 가격 대비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그저 농민을 위해서 반은 우리나라 쌀을 샀다. 식량의 완전한 자급자족은 어려워도, 견딜 수 있는 체력은 있어야 했다.
찝찝하지만, 산하는 되돌아온 밥알을 꼭꼭 씹어 삼켰다.
“그러니까 네 말은 권왕 어르신의 둘째가 패륜을 저질렀고, 창황이 합공을 했다는 거잖아.”
“정확해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창황의 배엔 칼을 꽂았고, 패륜아는 단전을 부수고, 사지근맥을 잘랐죠. 안타깝게도 사부님이 간곡히 부탁하는 바람에 살릴 수밖에 없었어요. 대신 금제를 좀 했어요.”
밥 먹으면서 하기에는 내용이 지나치게 살벌했다. 그걸 일상처럼 떠드니, 내 아들이지만 별종이었다.
따지고 보면 창황을 쓰러뜨리고, 권왕가의 둘째를 제압했다. 열일곱 살에 그런 일이 가능한 아들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
하나, 마냥 뿌듯하기만 하진 않았다.
성인이 되지 않은 아들이 벌써 손에 피를 묻혔다. 평범하게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해 회사에 취업했다면 하지 않았을 일이다.
“후회되지 않니?”
“사실 이쪽이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하아, 순수하게 기뻐할 수만은 없어서 답답하구나.”
“아버지가 연관된 일이 아니면 공명정대하게 처리할게요.”
“그 말은 내가 연관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것이냐?”
“당연하죠.”
한 치도 망설임 없는 아들의 단호함에 산하는 모호한 감정에 휩싸였다. 든든하기는 한데, 이질감이 있었다.
“그래, 선택을 했다면 망설이진 마라.”
“아버지라면 그리 말해 주실 줄 알았어요.”
“그래도 매사에 신중해야 해. 힘이 있으면 그만한 책임도 있는 법이야.”
“그런 말은 금기어예요. 다시는 하지 마세요.”
“현실이 영화는 아니잖니.”
무진은 무조건 책임을 지겠다고 하지 않았다. 가진 힘에 비례해 책임을 진다면 세상은 유토피아가 되어야 했다. 오히려 현실은 힘이 있는 자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바빴다.
무진은 고지식한 정의를 실천할 생각 따윈 애초에 없었다. 선악은 항상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며, 아버지가 연관되면 객관성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쟤는 또 왜 그러는 거냐?”
“용암 던전에서 구한 마정석을 주면서 화 속성 심법을 연구할 겸 새겨 넣었더니 털갈이를 하더라고요.”
“그렇게 막 줘도 되나?”
“강해지려면 시련은 필수죠.”
“그건 동물 학대 같은데.”
“마물은 동물 학대에 들어가지 않아요. 법전에도 나와 있어요.”
마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자는 사람도 있지만, 현실적으론 불가능했다. 동물과 달리 마물은 언제든 광폭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각성자가 아니면 마물을 관리할 수 없었다.
“게다가 크림이가 원한 거예요.”
“거참, 별걸 다 원하는구나. 강해진다고 처지가 달라지는 것도 아닐 텐데.”
나날이 강해지고 있는 요나와 달리 정체기에 빠진 크림이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강해지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물과 불의 음양합일을 이룬다면 괜찮겠네요.”
“정령과 마물은 종이 다를 텐데.”
“크림이가 벽을 넘어 영수가 된다면 또 모르죠.”
“그건 금단이자, 변종이잖아.”
크림이의 내부 구조를 살펴봤더니 일반 심법을 쓰기에는 운기 행로가 아예 달랐다. 해서 크림이에게 맞는 운기 행로를 따로 만들었다.
‘정령도, 마물도 발전할 여지가 있다는 거겠지.’
무진은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어떤 일이든 발전의 여지가 있다면 연구해 볼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한 가능성을 파고들다 보면 우연한 성과를 심심치 않게 얻을 수 있었다.
설거지 후 털갈이가 끝났을 크림이를 살폈다. 마나 파동이 예상보다 강했지만, 아버지를 위한 ‘훈련의 방’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크림이는 탈피를 마치고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러면 뿔고양이가 아니라 화염뿔고양이가 되는 건가?
이름이야 어떤 식으로 붙이든, 결과적으론 크림이었다. 다만, 각성의 효과인지 눈빛이 꽤 불손했다.
“각성 탓으로 떠넘기면 곤란해.”
-크아아앙!
크림이가 화염을 발출하며 달려들자, 무진은 가볍게 싸대기를 후려 주었다. 아직 백염에 이르지 못한 화염이라 대단치는 않았다. 최소 5천 도는 되어야 불 좀 뿌린다고 할 수 있었다.
쫘악, 쫙악!
-크오오옹!
서너 번 두드리다 보니 원래의 순종적인 눈빛으로 돌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차마 안 돌아올 수 없게 하는 위력이긴 했다.
우우우우웅!
크림이의 화염이 줄었다, 늘었다를 반복하더니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서열전이 필요하겠지?”
-요나.
크림이의 도전적인 눈빛에 요나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갔다. 사춘기에 막 넘어가는 시기의 요나라 감정 조절이 능숙하진 않았다.
-요나~~~!
-크오오오옹!
무진은 방문을 닫고 요나의 살풀이를 방관해 주었다. 사춘기를 넘어서려면 종종 넘쳐 나는 정령력을 풀어 줄 필요도 있었다.
불과 물의 대비를 고려할 때 서로 간에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기를 바랐다.
‘설마 혼종이 나오진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