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반전(3)
압도적인 힘으로 눌러 놓으면 반성할 여지라도 있을 줄 알았다. 웬걸, 무진의 예견대로 반성은커녕 되레 할아버지를 능욕하며 현실을 외면해 버렸다. 자기중심적인 사고관에 갇힌 독선적인 사람의 전형이었다.
-크크크크크크크크!
망할.
배꼽을 잡고 비웃을 무진을 상상하니 더는 참기가 힘들었다. 지수는 지호 오빠의 삐뚤어진 마음을 고쳐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원래는 안 그런 줄 알았는데, 미래를 알고 나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죽엇!”
“안 죽어.”
무진이 자주 쓰는 화법으로 변죽을 올린 후, 후발제인의 묘리를 발동했다. 그것도 가문의 가장 기본이 되는 투로로.
지수는 오는 족족 받아치며 지호의 전신을 두들겼다.
퍼억, 뻐억, 푸악!
지수의 권각이 불을 뿜을 때마다 지호의 얼굴이 피로 물들었다. 전력을 강화하는 [만인대적] 아이템과 호크 아이 스킬을 개방했었다. 처음 암습이 통하지 않아서 역으로 당했다고 착각한 것이다.
“……이건 말도 안 돼!”
“약하다, 약해. 너무 약해♫”
무진이 자주 하는 말이다.
대단한 의미를 담지는 않아도 무인의 속을 뒤집어 놓는 데는 이보다 더한 쌍욕도 드물다. 무인에게 있어 강함은 인생의 목표이자 추구하는 이상이었다.
그 앞에서 약하다고 노래를 부르는데 냉정할 무인은 세상천지에 없었다. 하물며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으면서 노랫말처럼 들리면 환장하다 못해 뚜껑이 열려 버린다.
“세월이 아깝다. 아닌가? 그냥 자질의 차이겠지. 하긴, 내가 좀 뛰어나♫”
정말 주옥같은 가사였다.
빠드드득, 크아아아아!
죽여 버릴 테다!
지호의 눈이 회까닥 돌아갔다.
효과가 정말 대단했다. 지수는 감탄하는 동시에 혀를 내둘렀다. 거짓을 말하면 그나마 위안이라도 되지, 비겁하게 팩트로 공격하니 분노를 주체하지 못할 수밖에.
지수가 아는 최강의 팩트 폭력배가 바로 무진이었다. 지금은 많이 순화한 것이다.
‘왜 노래를 잘하고 지랄이야!’
범생이라 노래방도 한 번 가지 않았다면서 무진은 노래를 잘해도 너무 잘했다. 다재다능하다고 하면 뭔가 하나쯤은 빠지는 게 있어야지. 무진은 인간미가 없다 못해 인조인간미만 남은 개새끼였다.
‘12옥타브는 너무한 거 아니냐고!’
그날 노래방에서 쫓겨났었다. 고음일성(高吟一聲)에 노래방의 기계가 버티지 못하고 폭발했다. 헌터조차 버티지 못하고 머리가 박살 날 고주파였다. 하는 수 없이 수리비까지 내주고 노래방에서 나와야 했었다.
퍽, 푸악!
처음부터 끝까지 일방적인 폭력으로. 지호의 반격은 어느 하나도 통하지 않았다. 전력을 쥐어짠 변칙, 변수, 암수도 부질없는 짓이 되었다.
“……이건 거짓말이야!”
“약하다, 약해.”
“개년이, 죽여 버릴 테…… 컥!”
“지호 오빠, 욕할 시간에 무공이나 수련해. 지연이나 지철 오빠보다 많이 못났어.”
“……죽일 테다! 너 따위가 감히!”
예비부부는 닮는다고 했던가. 유유상종, 끼리끼리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그 나물에 그 밥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의도하지 않은 듯한 표정까지, 지수는 점점 무진을 닮아 갔다.
부창부수의 진수였다.
와!
간신히 살아남은 3명의 백무대원 용산우, 배송철, 전태식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의 배신보다 저 앞에서 부대주를 개처럼 두들겨 패는 지수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우리 아가씨가 대박! 대단하신 분이었구나!”
“언제부터 우리 아가씨야!”
“이제부터 우리 아가씨지, 앞으론 말 까지 마라.”
한편으로 어떻게 한 건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보스를 공략한 후 동료가 기습적으로 암습을 가할 때까지 전혀 눈치를 못 챘었다. 그 찰나의 타이밍을 귀신처럼 알아채고, 부대주를 바닥에 처박은 후 자신들을 구해 주었다.
그들에게 있어 지수는 백마 탄 공주님이셨다.
앞으로 꾸준하게 모셔야 하는데, 숫자상 3보다는 7이 나을 것 같기는 했다. 안됐지만, 7명은 배신의 대가를 세게 받아야 한다. 다른 이도 아니고 동료의 등에 칼을 꽂는 행위는 봐줄 수가 없는 대목이었다.
“이런 거 보면 그 자식은 땡잡았네.”
“우리가 안목이 없었던 거지.”
“그래도 부럽다. 권왕 어르신의 제자에다가 지수 아가씨의 부마라니.”
“부마는 좀.”
지수 아가씨는 지금도 완성된 헌터였다. 저 정도면 능히 백작급 이상도 가능했다. 부대주도 제법 천재라고 알려졌지만, 진짜 천재 앞에서는 초라할 따름이었다. 그간 자기 잘난 맛에 살았던 머저리였다.
“난 또 부대주 새끼가 진짜 천잰 줄 알았지.”
“야, 너무 그러지 마라. 오냐오냐 크다 보니 지가 짜간 줄 몰랐던 거지.”
“씨발, 어서 빨리 죽여 버렸으면 좋겠다.”
대화는 심심풀이 땅콩처럼 가벼우나, 그들의 눈빛은 북풍한설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배신의 충격이 워낙 크다 보니, 솔직히 믿어지지 않았다. 현실로 받아들일수록 충격은 감당하지 못할 분노로 돌아왔다.
뼈까지 잘근잘근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았다.
커어억!
쿠다다다당!
가볍게 내지르던 타격이 마지막에 다다르자 결정타가 되었다. 지호는 볼품없이 바닥을 굴렀다.
쿨럭!
일어서려고 해도 무릎이 말을 듣지 않았다. 덜덜 떨리는 육신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무엇을 해도 통하지 않기에 분노와 절망이 교차했다.
“내가 저딴 계집년보다 못하다고!”
“오빠, 아무리 그래도 말은 가려서 해야지. 사랑스러운 여동생한테 계집년이라고 하면 쓰겠어. 이런 거 보면 가정교육이 정말로 중요해.”
“……이 미친년이 뭐라는 거야? 너 따위한테 내가 질 리 없어. 이건 모두 권왕 때문이야!”
“할아버지한테 그러면 안 돼.”
할아버지가 니 친구니!
지수의 차분한 대꾸가 이어질수록 지호는 울화가 치밀었다. 남은 전력이 한 톨도 없지만,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저년을 해치울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었다.
그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닿았을까, 울림이 전해졌다.
-계약, 성립, 힘, 준다.
바닥을 보였던 지호의 상태창이 일순 원래보다 배 이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영혼력이 전환되면서 성좌력에 흡수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환된 성좌력이 영혼력을 대신하자, 성좌의 진의가 드러난다.
지호는 회복된 신체와 강화되는 전력에 희열을 느꼈다. 마치 한계가 없는 빅뱅의 무상무극처럼 힘이 마구 샘솟고 있었다. 이제는 저 계집을 끝장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여 주마…… 커억!”
“성좌력을 쓰게 됐네.”
지수로선 겪어 본 현상이었다.
영혼력의 수치를 성좌력으로 전환하게 되면 모든 능력치가 상향되는데, 광폭화와 비슷했다. 이를 성좌화라 부르는 연유는 선택한 성좌에 상당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아니다. 성좌의 성향에 따라서 갈리며, 상성이 맞는 각성자가 존재했다.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일종의 혜택으로. 그중 성좌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자들을 사도라고 칭했다.
현시대에 사도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세계를 대표하는 자들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시간이 빨라진 건가?’
성좌의 변덕일 수도 있겠지만, 시간대가 지수가 아는 미래와는 조금 달랐다.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이 연쇄 작용을 일으켜서 새로운 시간대가 탄생했을 수도 있었다.
떨떠름하나, 염려하진 않았다. 나중에 무진에게 자문해 답을 찾아내면 된다.
‘제길, 또 의지하네!’
이러면 안 되는데, 짜증 나게도 국밥처럼 든든하다. 그래서일까, 주변에서 노리는 년들이 너무 많았다.
‘사귀든지 말든지.’
누가 됐든 우리가 함께한 지난 세월의 아름다운 추억을 망가뜨리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강력 범죄였다. 이제는 강력 범죄자에게 사형을 내릴 때가 되었다.
상념은 이쯤 했다. 지금은 성좌화를 처리할 때다. 사실 능력치가 대폭 상향되었어도, 지수는 전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2배로 강해진다 한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후레자식이 강해져 봤자, 호래아들이듯.
꽈악!
퍼억, 퍽, 퍼퍼퍼퍼퍼퍽!
지수는 오빠의 목을 성실하게 움켜쥐고, 기경을 주입해 육신을 기둥처럼 빳빳하게 만들었다. 샌드백을 완성한 지수는 지호의 인중, 명치, 단전, 심장을 두들겼다.
“……이 개년!”
“응, 오빠.”
뭐든지 처음엔 시간이 걸린다. 성좌화도 완전하게 안착할 시간이 필요했다. 불행히도 지수는 그 타이밍을 알고 있었다.
모르고 있었다면 낭비가 있었겠지만, 절약 정신이 제법 투철했다. 어차피 뒈지게 처맞을 운명, 시간을 축약해 주었다.
“……크어어억 ……이 치사 ……커억!”
“아마추어처럼 왜 그래. 방금 발언, 굉장히 식상했어.”
3명의 백무대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전투에서 치사하다는 말은 자기가 병신이라고 떠벌리는 짓과 다름이 없었다. 당하고 나서 그딴 말을 떠들어 봤자, 현실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백무대의 부대주란 새끼가 저딴 말을 하다니, 가문의 무인으로서 실격이었다.
“우리 아가씨가 누굴 닮으셨는지 몰라도 시원시원하시네.”
“누굴 닮았겠어? 당연히 권왕 어르신이지!”
“전대 가주님과 비슷하긴 한데, 어딘지 모르게 좀 달라!”
권왕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여하튼 그런 사소한 문제는 대충 넘어갔다. 누굴 닮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수 아가씨는 우리들의 백마 탄 공주님이었다.
어딘가에서 청송 사과를 먹고 잠들어 있는 왕자 새끼는 눈에 띄면 뒤지는 거다.
“백마보단 흑마 탄 ……컥!”
“말조심해라!”
“난 그냥 순수하게 ……컥!”
“제발 개소리 좀 당당하게 하지 마라!”
단어 그대로의 뜻이거늘, 대원은 그저 억울했다.
여하튼 백무대원은 지수의 기술에 눈을 떼지 못했다. 전혀 이질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많이 패 보거나, 당해 보지 않고서는 보기 힘든 능숙함이었다.
아니면 타고났거나.
커억, 털썩!
전력을 회복한 후 느꼈던 희열은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났다. 완전히 무장해제가 되어 버린 지호는 억울했다.
그 힘을 제대로만 썼다면 당하지 않았을 텐데.
“네년이 무인이라면…… 어?”
촬싹!
“이게 무슨…… 컥!”
촬싹!
완전히 제압한 후, 지수는 지호의 뺨을 좌우로 연속해 후려쳤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으니, 해 보는 데까지는 해 보기로 했다. 그래도 통하지 않는다면 무진의 말대로 대의를 따를 수밖에.
쫘아악, 쫘아아악!
강도를 높이며 싸대기를 후려치자, 지호의 뺨과 입술이 찢어지며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너 이런 짓을 하고 ……크악!”
자존심이 상했다. 어린 사촌한테 뺨을 맞으면서도 저항조차 못 하는 현실에 분노가 솟구쳤다. 여기서 벗어나기만 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오늘의 굴욕을 반드시 갚아 주리라 다짐했다.
“그만하지 않으…… 커억!”
지수를 본 지호는 움찔했다.
감정이 실렸다면 모를까,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면서도 강도를 높인다. 뺨이 부르트다 못해 찢어지며 섬뜩한 광경을 자아냈다.
지수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잘못했지?”
“……웃기지 마!”
“안 되겠네.”
“너 따위에게 항복…… 설마?”
“맞아.”
“잠깐, 난 장차 본가를 이을 후계자야. 안 돼! 제발, 내가 잘못했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 아버지가 시킨 거야! 알았어, 후계자 포기할게, 나를 종복으로 삼아도 좋아!”
분노와 살의를 드러낸 좀 전과는 다른 태세 전환이었다. 어떻게든 자신을 보존하겠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이번 위기만 벗어나려는 와신상담의 복심이었다.
“정말?”
“당연하지…… 카아아아악!”
지수는 주저하지 않고 단전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혹여 살아날 불씨를 꺼 버리기 위해서 내력을 집어넣어 전사경을 발동했다. 단전을 조각조각 끊어뜨려 기맥을 복잡하게 망가뜨렸다.
크아아아아악!
지호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단전이 부서지자 본심을 숨기지 않고 저주를 퍼부었다.
“……죽여 버릴 테다! 너도, 네 아비도! 다 죽일 거야!”
“무서워서 어쩐다?”
무진은 끝까지 저항하면 죽이라고 했다. 지수는 차마 죽일 순 없어서 기절시킨 후 사지근맥을 잘랐다.
서걱, 서걱!
곧바로 치료 포션을 사용해 근맥이 부정확하게 붙도록 했다. 이러면 근맥을 치료해도 원래 상태로 돌아가기도 어렵고, 기맥의 흐름마저 손상되어 무공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실제 생활에서도 거동에 불편함이 있었다.
이제는 엘릭서로도 안 된다. 육체를 완전히 새롭게 탄생시키는 환골탈태를 이루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유지호는 무인이 아닌, 일반인보다 못한 상태가 되었다. 아마 깨어나면 충격을 받아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렇기에 당분간은 철저히 감시해야 했다.
“뒤를 부탁해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수 아가씨!”
미래에서 배척했던 차가운 모습을 상기하면 통쾌한 감정도 있겠지만, 맘이 편치 않았다. 지수는 약해지려는 본심(本心)을 대의를 위해서 가라앉혔다.
-넌 마음이 너무 약해.
-여리고 아름답긴 해도, 약하진 않아.
-받은 대로 돌려주는 건 옳지 않아. 그 이상으로 돌려줘야지.
-그래서 다 죽이자는 거야?
-세상을 구하고 싶다면 그런 각오가 필요하지. 가족이라고 해서 차별해선 안 되지.
-그러는 너는?
-난 회귀자가 아니잖아.
자기는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고,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뒤집어씌웠다. 정말 얄미운 녀석인데, 틀린 말은 하지 않았다.
‘회귀자가 만능인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