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반전(2)
권왕에겐 창황이 갑자기 발광하는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더욱이 혼자서 허우적거리는 것도 우스운데, 검을 빼 달란다. 방금까지 서로 죽고 죽이려고 한 주제에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건가?
부들부들!
발광하던 창황은 통풍을 세게 맞은 듯 심하게 떨었다. 어떻게든 검의 악령으로부터 영혼을 사수하려고 하지만, 시간은 발칸의 편이었다. 생기마저 빨려 들어가면서 이중고에 시달렸다.
슈슈슈슝, 퍼퍼퍼퍼펑!
창황이 점점 재기 불능이 되어 가는 와중에도 무진은 강환을 쏟아 냈다. 몰래 창황의 뒤를 점거한 후 기습적으로 검을 던질 때부터 안중에도 없었다.
후아아아앙!
휘몰아치는 후폭풍이 일대를 휩쓸고 지나간 후에야 무진은 공격을 멈추고 내려섰다.
“이놈…… 컥!”
“부질없는 짓을.”
흙먼지 속에서 기회를 노렸던 유경운이 사각에서 달려들었지만, 무진의 손 속이 빨랐다. 유경운의 주먹을 비틀어 버린 후, 목을 잡고 바닥에 찍었다.
꽈아아앙!
쿨럭!
강환포격에 유경운은 만신창이나 다름이 없었다. 포화 속에서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웠다. 초속재생, 금강불괴, 치료 스킬, 선천진기를 융합하지 않았다면 살 조각도 남지 않았다.
“패륜의 대가를 치러야겠지.”
“닥쳐랏, 네놈이 무엇이라고!”
격렬한 분노가 기적을 일으켰을까? 유경운은 혈인이 된 채로 무진을 향해 쇄도했다.
팟, 우드득!
광기에 젖은 채 사생결단으로 달려들면 주춤할 만도 하나, 안타깝게도 무진은 일반 생도와 다르다.
무진은 유경운의 팔을 쳐 낸 후 역으로 꺾어 버렸다. 오른팔의 관절이 부서지면서 덜렁거렸다. 뼈와 인대가 끊어지는 고통에도 유경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름이 돋을 만큼 무시무시한 살의와 투기였다.
“너 따위에게 내가 질 것 같으냐!”
“주둥이만 살았군. 네가 잘해서 산 게 아냐. 내가 살려 준 거지.”
“건방진 놈이, 죽어랏!”
“걱정하지 않아도 돼, 곧 네 자식이 있는 곳으로 보내 줄 테니까.”
“……뭣이라?”
“왜 이래, 아마추어처럼. 당연한 거잖아. 설마 내가 너 같은 병신의 계책을 몰랐을 것 같아?”
무진은 무심히 유경운의 속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했다. 너로 인해 자식들까지 죽는 거라고. 같잖은 욕망을 위해 패륜을 선택한 대가로 피눈물을 흘리게 해 줄 요량이었다.
퍼억, 푸악!
유경운은 현실을 부정하며 전력을 쏟아 냈다. 하나,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무진에겐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았고, 도리어 일격 일격마다 요격을 당했다. 치욕스럽게도 후발제인의 일방적인 샌드백이 되었다.
“……이럴 수가!”
유경운은 경악했다.
권왕가의 모든 무공을 동원했음에도 닿지 않았다. 하물며 이놈은 권왕가의 기본공만 사용하고 있었다. 같은 무공을 펼쳤음에도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믿고 싶지 않았다. 가문의 무공을 익힌 세월만 비교해도 수십 년의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나 차이가 난다? 이건 말도 안 돼!”
“그딴 실력으로 권왕가의 주인이 되겠다고? 주제 파악이 안 되나 보네.”
“……나를 모욕하지 마라!”
“우리 지수보다 약한 주제에 모욕은 무슨.”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유경운은 점점 항거 불능이 되고 있었다. 선천진기마저 바닥을 쳐 더는 저항해 봤자 무의미했다. 끝이 보일수록 광기의 도금이 벗겨지며, 눈앞의 가혹한 현실이 드러났다.
이길 수 없는 벽, 아버지에 이어 그 제자마저 닿지 않았다. 형보다 강한데도 알아주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했거늘, 우물 안의 개구리가 따로 없었다.
“……이러려고 그런 건 아니었는 ……커억!”
“처맞고 난 후에나 하는 반성은 진정한 반성이 아냐. 그냥 살려 달라는 개소리일 뿐이지.”
무진은 반성한다고 멈추지 않았다. 이미 저질러 놓고 후회하면 봐줘야 하나. 남녀노소는 중요한 잣대가 아니었다. 사부님에게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준 대가는 죽음으로도 갚지 못한다.
우드드득!
발목을 분지르고, 바동거리는 유경운을 짓밟았다. 상시 발동되는 초속재생이 도리어 고통을 가중시켰다.
치료, 재생은 헌터나 무인이라면 반드시 착용해야 하는 필수템이었다. 성능이 좋을수록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명색이 권왕가의 얼굴마담인 외총관이 저가의 아이템을 쓰겠나. 성능이 지나치게 좋아서 괴로울 따름이다.
“……지호는 잘못 ……커억!”
“자기 아들만 소중하지? 내 사부님도 소중하거든.”
“……아버지를 죽일 생각은 없었 ……크아아악!”
“생각만 했어야지.”
와그작, 와그작 뼈마디를 산산이 부수어 회복 불능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점점 비명이 신음으로 바뀌다 소리도 나지 않게 되었다.
퍼퍼퍼퍼퍽!
무진은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터뜨릴 심산으로 밟고, 또 밟으면서 자근자근 씹어 주었다. 세상에서 자기만 불쌍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것조차 역겨웠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란 뜻인가? 그런 말이 왜 나왔는지는 몰라도 이보다 더 역겨운 문장이 있을까? 사람이 미운 거지, 죄가 밉겠나. 현실의 모든 범죄는 사람이 저지르는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도 정도가 있지.
“그만하거라.”
“사부는 분하지도 않습니까?”
다 죽어 가던 권왕이 힘겹게 걸어와서 제자를 만류했다. 더는 제자에게 짐을 떠넘겨선 안 되었다.
“나는 됐다.”
“제가 안 됐습니다.”
“이놈아, 내가 안 됐다고!”
“불공평한데요, 이러면 외총관과 같이 온 무인들도 죽이면 안 됐는데. 사부님도 어쩔 수 없군요. 그들의 목숨값보다 아들 목숨이 중요한 거죠?”
“아니, 그런 뜻은 아니지만…… 쿨럭!”
할 말이 궁색해진 권왕이었다.
악인이라도 살인은 신중해야 한다고 타이르려다가 우습게 되었다. 이럴 땐 피부터 토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사제 관계의 동정심 유발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이해합니다. 어차피 남의 목숨 따위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내 자식이 남들 목숨 천 명, 만 명보다 소중하지요. 사람은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극단적으로 말할…… 어이쿠, 죽겠구나!”
극단적인 예시였으나, 권왕은 재차 말문이 막혔다.
제자는 이미 자식의 수하들을 죽였다.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하란 말인가? 그동안 실력을 감췄냐고 따져 묻기도 궁색해졌다. 같은 무게추로 두기에는 아들이 벌인 짓을 용서하기도 어려웠다.
커억!
무진은 유경운의 목을 발로 짓누르면서 사부와 대화를 나누었다. 억울하다며 헛소리를 지껄일 때마다 피거품을 냈다. 버러지 같은 것들은 애초에 대우를 해 주면 안 되었다. 벌레처럼 짓밟아 줘야 자기 주제를 아는 법이다.
“호로새끼는 인류를 위해서라도 사라지는 편이 이롭습니다. 그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자식 키워 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다고. 물론, 저는 군사부일체를 중시하는 효잡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꼭 그렇게 발로 뭉개면서 말해야 되겠느냐?”
맞을 짓을 하기는 했지만, 권왕에겐 아들이었다. 나이도 무진보다 한참 더 많았다. 자기 아버지보다 많은데도 서슴없이 짓밟았다.
“그럼 뭉개지 말고 부술까요? 하긴, 지금까지 살려 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죠.”
“그만, 제발 그만하거라.”
“설마 용서하시는 건 아니시죠? 차별은 나쁜 건데.”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권왕과 유경운을 동시에 멕였다. 부자(父子)가 판단을 잘못하는 바람에 이런 사태를 불러왔다는 원색적인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제자는 그런 줄도 모르고 살인자가 됐습니다.”
“……미안하구나!”
“벌써 6마리나 죽였는데, 이거 참 난감하게 됐네요. 1마리 덜 죽인다고 살인자란 꼬리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네가 굳이 업보를 안고 갈 필요는 없느니라. 부디 이 사부에게 맡기거라. 부탁이다.”
사부의 간절한 눈빛에 무진도 흔들려 주기로 했다. 유경운의 죄를 상기하면 죽여도 시원찮긴 해도, 실리를 따지면 사부님의 부탁을 들어주는 편이 이득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득이 없다면 첫 기습으로 대가리를 부수었을 것이다.
“호로새끼는 사부님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지수를 죽이려던 놈입니다.”
“알았다. 한데, 말은 좀.”
“저는 사람 새끼 아닌 것들은 존중하지 않습니다.”
유경운의 생사는 사부님에게 넘겼지만, 설령 나중에 다시 보게 돼도 존대하거나 존중하진 않는다.
개새끼는 개같이 대해 줘야 올바른 세상이었다. 자기가 갠 줄 모르고 사람인 척하면 된장을 발라 주는 수밖에.
쩝!
권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정해 봤자,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용서하기에는 죄가 너무 크다.
제자는 자신을 위해서 살인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들을 살리겠다고 나섰으니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네가 준 아이템이 도움이 됐다. 고맙구나.”
“뭘요, 사제 간에 고맙다는 말은 하는 거 아닙니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제인 누나에게 부탁해서 [정화의 불꽃]을 사부님에게 드렸다. 아대 형태로 되어 있는 [정화의 불꽃]은 독이나 저주를 막아 주는 성질이 있었다. 어지간한 독이었으면 통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곤란하긴 했지.’
독과 저주는 효과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도후 형에게 강화는 하지 말라고 해 놓은 것이다.
사부님은 호쾌한 편이긴 해도, 지나치게 완고한 성격이었다. 조금은 사태를 유연하게 바라보는 냉철한 사고가 필요했다. 그러려면 세상의 쓴맛을 경험해 봐야 한다.
‘저도 미안하진 않아요.’
이 모든 사태는 사부님의 탓이니까. 자신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간청했는데도 사부님은 기어이 자기 발등을 찍었다. 선택엔 책임이 따르고, 예외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진은 창황에게 걸어갔다.
창황은 검을 빼 든 채 서 있었다. 혈안(血眼)이 되어 몸부림을 치며 발악했던 좀 전의 모습과는 달리 침착하다.
“어떠냐?”
“괜찮은 육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무인의 육체를 괜찮은 정도로 치부하는 걸 보면, 원래의 역량이 그 이상이라는 뜻이 되었다.
“기억은?”
“거의 다 흡수했지만, 일부 지워진 기억이 있습니다.”
자동 삭제 기능이 탑재된 금제의 일종인 듯했다. 작금의 사태까지 예상은 하지 않았을 텐데, 상당히 꼼꼼한 대처였다. 뿌리는커녕 줄기조차 타고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중계자와 무인들까지 처리한 것이다. 외견상 유경운이 명령을 내리는 것 같지만, 실제는 그놈들이 부추겼을 수 있었다. 아닐 가능성도 있으나, 굳이 낮은 확률에 베팅하진 않았다.
“검으로 되겠어?”
“아시지 않습니까.”
창황의 육체를 얻은 발칸은 창대만 남은 여의신창에 헬소드를 갖다 대었다. 헬소드는 여의신창을 잡아먹으며 형태를 바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헬소드는 여의신창의 원래 모습으로 화해 예리한 창날을 번뜩였다.
“창술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한 달 안에 모조리 습득하겠습니다.”
“평상시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의심을 살 수 있어.”
“워낙 자기중심적인 놈이라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창황가의 무인들이 던전의 반대쪽 섹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발칸을 보내 의심하지 못하도록 단속해야 했다.
사전에 계획한 대로 심권의 경지에 이른 사부님을 내세워 둘러댄다면 의심은 해도 내막을 알아내긴 어려울 것이다.
반대로 암중 세력이 적극적으로 나온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았다.
‘어쨌든 자연스러웠지.’
***
허억, 허억!
숨을 헐떡일 때마다 핏물이 흘러내렸다. 바닥에 손을 댄 채 상대를 올려다본 사내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이가 부서지도록 악물었다.
“……어떻게 너 따위가?”
유지호는 작금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던전에서 보여 준 역량이 생도 수준을 벗어나긴 했어도 한계가 있었다. 설령 아카데미를 최상위로 졸업했다 한들, 함정을 벗어날 순 없었다.
한데, 이게 대체 무어란 말인가?
던전 보스를 처리한 직후를 정확히 노렸다. 노련한 헌터라도 긴장의 끈이 풀리는 타이밍이거늘.
더욱이 10명의 대원 중 7명을 회유했기에 3명만 처리하면 되는 일이었다. 어렵지 않게 끝날 줄 알았지만, 현실은 계획과는 정반대였다.
백무대원 7명이 쓰러지고, 유지호는 변변한 공격은커녕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치명타를 입었다.
스윽!
지수는 분노로 일그러진 유지호를 내려다보며 이유를 말해 주었다. 사실 멀리 보거나, 어렵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상황만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오빠가 약한 거야.”
“닥쳐, 할아버지의 총애를 받지 않고서야! 너만 아니면 그 모든 건 나의 것이었어! 그랬다면 내가 아니라 네가 무릎을 꿇고 있었겠지!”
지수의 강함을 유지호는 인정 못 했다. 분명 할아버지가 지수를 위해서 내력 전수나 sss급 아이템을 내어 줬을 것이다.
그런 편법이 아니고서야 이제 막 생도가 된 계집이 자신을 능가할 리가 없다. 그러고선 가증스럽게 자신을 내려 보다니 분노가 타올랐다.
“죽여 버릴 테다!”
“하아아, 오빠는 좀 많이 맞아야겠다.”
지수도 짜증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단순히 지호 오빠의 배신 때문이 아니다. 이 모든 사태를 예견한 무진의 말대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진행되고 있어서다.
-반성. 푸하하하하하하하하!
-남은 진지하게 말하는데, 왜 웃고 지랄이야!
-골드미스가 되고서도 순진하네.
-이게 누나한테, 말이면 단 줄 알아.
-내기할까?
-좋아, 내가 이기면 어쩔래? 굴종이라도 할래?
-그거 좋네. 굴종하라, 골드미스여.
배신할 확률은 내기의 조건에 들어가지 않았다. 지호 오빠를 일대일로 이기고 난 이후의 반응이 내기의 성립 조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