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함정(2)
못 들은 척 창황이 무시하고 가려고 하자.
“구해 달라니까요! 못 들었나? 씨발, 치매 아냐!”
“……컥!”
다들 헛기침이 나왔다.
대체 누구한테 저딴 망발을 하는 건가?
차라리 상대를 몰랐다면 이해라도 하지, 창황인 걸 아는데도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더욱이 자신들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상태였다. 구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는 걸 모르나.
스윽!
창황 정철산은 권왕을 향해 걸어가다가 멈춰 선 채 무진을 돌아보았다. 일평생을 살아오면서 들어 보지 못했던 막말을 스무 살도 안 된 핏덩어리한테서 들었으니 호기심이 들 만도 했다.
“재밌는 꼬맹이로구나. 특별히 따로 보도록 하지.”
핏덩어리가 자기 주제를 모르고 나대는 모양새지만, 당장 훈계하진 않았다. 그는 목적의 선후를 철저히 따졌다.
저벅, 저벅!
창황은 권왕과 대치하는 유경운의 지척으로 걸어가서 섰다. 그는 마주하는 권왕을 보며 비릿한 조소를 보냈다.
“꼴이 말이 아니군.”
“내 아들을 꼬드긴 게 너냐?”
“그렇다면?”
“예전처럼 곱게 끝나진 않겠지.”
“곧 죽어도 자존심 하나는 천하제일이군.”
권왕가와 창황가가 데면데면한 연유는 권왕과 창황의 과거에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그들은 무예를 겨루어 왔고, 창황은 단 한 번도 권왕을 이기지 못했다. 총 다섯 번의 겨룸이 있었으며, 10년 전에 마지막 대결을 벌였다.
5전 전패.
창황으로선 밝히고 싶지 않은 과거로, 권왕에게 입은 눈가의 상처를 볼 때마다 패배의 쓴맛을 되새겨야 했었다.
세간에는 권왕보다 못한 창황이 어째서 황(皇) 자를 쓰냐는 비아냥거림이 나돌았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잘도 꼬리를 흔들더니, 오래도 참았구나.”
“오늘을 위해서라고 볼 수 있지.”
“내가 온전한 상태도 아닌데, 이긴다고 위안이 되겠어?”
“어설픈 도발 따윈 안 통해.”
창황의 미소에 잔인한 살의가 담겼다. 죽여도 곱게 죽이지 않으려는 것이다. 살기를 알아챈 유경운이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어쩌려는 겁니까?”
“어쩌긴, 죽여야지.”
“그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거야 자네 사정이고.”
“이건 가문의 일입니다!”
“그래서 막으려고?”
아버지를 제압해서 가문에서 손을 떼도록 하려던 유경운에겐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더욱이 막아선다고 해도 계획대로 이어 나가긴 불가능하다. 가문의 무인을 데려오지 않는 것만 봐도 창창황의 의도는 분명했다. 방해한다면 약조고 뭐고, 절대 가만있을 위인이 아니다.
‘빌어먹을!!’
최대한 빨리 아버지를 제압한 후 사태를 수습했어야 했다. 창황이 개입한 이상, 막아서기엔 늦었다.
그렇다 하나 자신은 권왕가의 가주가 될 몸이었다. 대놓고 조롱하는 창황의 비릿한 조소는 참기 힘들었다.
“이 어리석은 놈아, 이딴 대접을 받으려고 아비의 등에 칼을 꽂은 것이냐?”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아버지의 질책에 유경운의 어투가 신경질적으로 높아졌지만, 선을 넘은 지 오래였다. 이제 와 발을 빼 봤자, 패륜아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창황이 오늘 일을 떠벌리지 않는단 보장도 없고.
씨익!
창황은 여기까지 와서 망설이는 유경운을 비웃었다.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선택했다면 뒤를 돌아봐선 안 되었다. 서푼의 정에 흔들리는 걸 보면 중용할 만한 그릇은 아니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이딴 놈이 권왕가의 주인이 된다면 차후 본가의 먹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속내와 달리 창황의 입에선 칭찬이 흘러나왔다.
“눈물겨운 효심이군.”
“덩치가 아깝다, 이 새끼야!”
“곧 네 제자도 뒤를 따를 테니 외롭진 않을 거다.”
“대체 어디까지 썩은 거냐?”
권왕으로선 예상하지 못한 사태의 연속이었다. 창황과 사이가 좋다곤 할 수 없으나, 10년 전 대결 이후로 다 푼 줄 알았다.
그때 분명 무릎을 꿇린 상태로 화해의 악수를 했거늘.
괜찮다고 했잖아!
사내로 태어난 이상 싸우다 정이 들고 그러는 거지, 몇 번 처맞았다고 이렇게까지 하다니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물며 눈가에 훈장보다 값진 상처를 새겨 주었다. 밋밋한 얼굴에 자연적인 문신이 생기자, 꿈틀거릴 때마다 꽤 인상적이었다.
꿈틀!
작금의 현실을 도저히 이해 못 하겠단 권왕의 태도에 창황의 안색이 변했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저 얼굴은 참기 힘들었다.
창황은 평생을 패배감에 시달려야 했다. 권왕을 이기려고 절치부심했으나, 언제나 그렇듯 비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승리 후 거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면서 깔봤던 주제에.
가장 불쌍한 피해자처럼 아무것도 모른단 표정을 짓다니!
창황은 애초부터 곱게 끝낼 생각은 없었다. 곧 죽어도 기가 꺾이지 않는 권왕의 자존심을 철저하게 짓밟아 버려야 했다. 이는 오만한 행위에 대한 필연적인 단죄였다.
“이후로 참 재밌어질 거다.”
“어쩌려는 게냐?”
창황의 음산한 웃음에 권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속내를 숨겼던 교활한 놈이기에 더더욱.
“네놈을 제압한 후, 네 손녀와 제자를 생으로 갈아 주마.”
“이 미친 새끼가 감히!”
“언제까지 네놈이 내 위에 있을 것 같았느냐.”
더 들어 주기엔 귀가 썩는다.
권왕은 창황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창황은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손안에 든 여의신창을 휘둘렀다.
꽈아아아아앙!
권과 창이 충돌하며 소름이 끼치는 매서운 기파가 터져 나온다. 층층의 날카로운 기격이 유리 파편처럼 부서지고, 권왕과 창황의 공간을 완성했다. 누구도 공방 안으로 접근하기를 원하지 않는 듯 밀어냈다.
퍼퍼퍼펑, 투아아앙!
충격파를 온전히 맞으면서도 물러서지 않은 유경운이었다. 계획을 따르지 않는 창황의 돌발 행동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아버지의 전력에 있었다. 아직도 저만한 여력을 남겨 두고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들끓었다.
‘끝까지 이런 식인 겁니까?’
부자간의 혈투에서 친구 간의 혈투로 변질이 되었지만, 무진의 처지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무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구속구가 채워져 있었다.
탄식하는 무진을 보며 정혼기가 비아냥거렸다.
“아쉽게 됐구나.”
“그러게, 친구 좀 그만 괴롭히실 것이지. 때리더라도 빵은 제값을 쳐줬어야죠.”
……빠직!
대화의 핀트가 완전히 어긋났다.
공포에 미쳐 정신 나간 놈으로 치부하면 그만이지만, 정혼기는 화가 치밀었다. 자기 말을 애초에 듣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짖어라, 나는 안 들으련다.
“이 새끼가 오냐오냐했더니, 정말로 죽고 싶어!”
“그러면 구속구 풀고 맞다이 뜨시든가?”
“그딴 수작에 넘어갈 것 같으냐?”
“기대도 안 했어, 겁나면 하는 수 없지요.”
반말과 존댓말을 교묘하게 섞어 쓰는 무진의 어투였다. 그것이 그들의 심기를 은근히 건드렸다. 이 버릇없는 애새끼를 조져 버리고 싶은 살인 충동을 느꼈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배신이나 당하고, 사부님이 인생을 잘못 사셨구나. 참, 어쩌다 저리되셨을꼬. 무공 빼고는 보고 배울 점이 없네.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다.”
“……!”
따지고 보면 상관이 없는 내용인데, 그들의 속을 오묘하게 긁었다.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사부를 비판하지만, 아버지와 친구를 배반했다고 돌려 까는 것 같았다.
그뿐이랴, 자기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올바른 결론을 내서 그들의 화를 돋웠다.
‘우리가 잘못 살았다는 거냐!’
‘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를 어떻게 조져야 잘 조졌다고 할 수 있지!’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외총관은 명령을 중시하는 성격이었다.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것이 설령 아주 사소한 실수임에도 봐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무진의 개소리를 이때까지 받아 준 것이다. 아니었다면 진작에 혀를 자른 후 토막을 냈다.
“더는 없나?”
“시끄러우니까, 입 닥쳐!”
외총관은 권왕과 창황의 혈투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터질 듯한 분노가 전해졌다. 도저히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신경질을 부리는 선에서 멈추었다.
음.
그러거나 말거나 무진은 조금 아쉬웠다.
패륜과 배신이 정확히 예측한 범위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등장인물을 바랐으나, 함정이 워낙 교묘했다. 게다가 더 나올 시기도 지났다. 공략이 끝난 이상, 던전이 사라질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창황이 배후라고 볼 순 없겠지.’
그래서 대단하긴 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창황이라면 사부님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무인이다. 원한을 이용했다곤 하나, 창황이 누군가의 명에 따랐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 말은 배후에서 이 사태를 주도하는 세력이 따로 있다는 의미가 되었다.
‘알고 있는 것보다 더할지도 모르겠는걸.’
무엇을 원하는지는 짐작하기 어려워도, 우리나라의 실세를 움직일 만한 힘과 세력을 지녔다고 봐야 했다.
‘게다가 아주 치졸해.’
사람의 심중에 감추어져 있는 부끄러운 감정들. 숨기고 싶은 욕망을 증폭시켰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끌어냈다고 해야 할까?
그 예가 바로 유경운과 창황이었다.
보통은 평생 속에 감추고 사는 반면, 저들은 패륜과 배신을 자행했다. 단순하게 보면 어차피 그렇게 될 운명일 수도 있으나, 누군가 개입했다면 얘기가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저들의 행위에 당위성을 주진 않는다. 누군가 부추긴다고 패륜과 배신을 당연하게 저지른다면 세상이 어찌 돌아가겠는가.
‘사부님이 너무 만만하게 본 거지.’
내 자식은 아닐 거란, 부모로서의 믿음이 현실을 가린 것이다. 그러나 사부의 잘못으로 치부하기에는 직접 겪지 않고서는 누구도 속단하기 어렵다.
실제로 부모는 자식이 패륜을 저지른다 해도, 죄를 묻지 않는다. 그것이 타인은 헤아리기 어려운 부모의 마음이었다.
‘피할 수 없는 시련입니다.’
무진은 분명히 사부에게 경고했다. 그럼에도 사부는 자식을 끝까지 믿었다. 그러한 관계를 제자가 강제로 깬다고 상상을 해 봐라.
설령 사실이더라도 당해 보지 않으면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사부님처럼 우직한 단세포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그래서 무진은 지금까지 방관했다. 똥인지 된장인지 사부님 스스로 찢고, 뜯고 맛을 보도록.
‘어떤 맛입니까?’
정답은 나왔기에 궁금하진 않았다. 사부님의 표정만 봐도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슬슬 끝낼 때가 됐지.’
사부님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해 있을 테니 말이다. 저 와중에도 아들의 변심을 되돌리려는 부성애가 눈물겹기는 했다.
따지고 보면 유경운은 재수가 없는 케이스였다. 막 던전이 생성되는 초창기만 해도 권왕과 같은 무력캐가 대세로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힘이 있어야 세력을 이끌 수 있으며, 대표성을 가진 상징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 초창기와 달리 현재는 안정이 되었다. 무력이 중요하지 않기는 해도, 세력을 이끌어 나가려면 지도력이 중요했다.
사부님의 성향을 볼 때 과거에는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그런 사부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유경운에게 있어 현실은 불합리할 수밖에 없다.
자기는 무력을 최고로 치부했으면서 정작 가문은 무위가 부족한 첫째에게 주었으니, 둘째로선 기가 막힌 노릇이겠지.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너나 나나 가주로서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니 얼마나 울화가 치밀겠는가.
‘이해는 합니다.’
무진은 유경운의 심경을 이해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설령 사부님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해도, 패륜을 정당화할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