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권왕의 운전자론(1)
산하는 회장실로 불려 갔다.
아들의 말대로 회장의 안색이 며칠 전과 달리 훤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도 않았다.
“어차피 만날 거 왜 그렇게 속을 태웠나? 그래도 아주 대단했다고 하더군.”
“만났다니 다행이군요.”
“하긴 그리 호언장담을 했으니 사실대로 전하기는 어려웠겠지.”
“자기 딴에는 최곤 줄 알았을 겁니다.”
“그러면서 배우는 걸세.”
진 회장은 무진을 띄워 주고 있지만, 손주의 승리를 몇 번이나 강조했다. 손주를 자랑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팔불출 할아버지였다. 일 처리에 사감을 넣지 않아 아이언 마스크로 불리던 양반이 저리 감정적으로 나오리라고는.
“하하, 메탈 실드를 부쉈다더군. 그만큼 자네 아들의 수준이 높다는 뜻이겠지.”
“혹시 다치진 않았습니까?”
“예끼, 우리 태수가 어디 가서 다칠 아인가!”
“과연 혈통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너무 고깝게 생각하진 말게. 우리 태수의 오른팔이 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진 회장에게 악의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저 손주를 자랑하기 위한 밑바탕으로 무진이 선택되었을 뿐이다.
산하도 감정을 드러낼 만큼 사회생활 짬밥이 녹록하진 않았다.
‘좋아하실 때가 아닐 텐데.’
아들은 아무 이유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의도가 뻔히 보였고, 회장님의 손주는 미끼를 물었다. 무진을 이겼다는 태수의 발언만으로도 확실했다.
“내 자네 아들에게는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네.”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마다하지 말게. 어른이 주는 걸세.”
“그러시다면 부담스럽지 않은 선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자네는 좋은 사람이군. 길드 창설에 최선을 다해 주게.”
“대형 길드와 견줄 만한 길드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산하의 의욕적인 모습에 진 회장은 흡족함을 드러냈다. 자신의 수족이 되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비에 이어서 아들까지 대를 이어 충성을 바치는, 성운 그룹의 충신이었다. 당장은 훗날 크게 쓰일 때를 대비해 베풀어야 할 시기였다.
“강 부장, 차를 바꿀 때가 된 것 같구먼.”
“근래에 살이 좀 찐 듯합니다.”
“그럴수록 큰마음을 먹어야 하네.”
“외국계 헌터를 알아보려면 필요하기는 합니다.”
진 회장과 산하는 그 정도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내용을 보면 이상하긴 한데, 붙여 놓으면 외제 대형 세단이었다. 산하는 주겠다는 걸 마다하진 않았다. 회장이 고작 세단 한 대에 일희일비하진 않을 테고.
-주면 다 받아요.
-거지도 아니고, 정당하게 일하고 받아야지.
-제가 일하잖아요. 선배의 명성과 실력을 확실하게 끌어올리겠습니다. 이거 아무나 못 받는 특급 과외예요.
-방패막이는 아니고.
-바람막이 정도예요.
-태수 군이 불쌍하구나.
아들이 자신한 이상, 태수는 강해질 수밖에 없다. 강해지지 않으면 삶이 아주 많이 고달파질 것이다. 그건 당해 본 사람만이 아는 공감 능력이었다.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게.”
강 부장이 회장실을 나간 후, 진 회장은 남 실장에게 재차 확인했다.
“어떤가?”
“충성스럽군요. 하지만 일을 맡기는 건 다른 문젭니다.”
“능력을 보인다면 기용해야겠지. 잘 살펴보게.”
“예, 회장님.”
남 실장이라면 적절히 개입해서 강 부장을 컨트롤할 수 있을 것이다.
***
“지금으로선 10명이 최선이구나.”
“그 10명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말하는 거야?”
기억을 쥐어 짜내다 머리에 쥐가 날 뻔했던 지수로선 억울한 일이었다. 기껏 생각을 해 줬더니, 수고했다는 말은커녕 못마땅한 기색이다.
“그래 봤자 나보다 약한 사람이겠지.”
“너보다 강한 사람이 어딨어?”
잘해 보시라고는 했지만, 무진은 아버지의 개입이 탐탁지는 않았다. 지수가 전한 미래에서 아버지는 길드 창설과 연관이 없었다.
무진이 아카데미에 들어가면서 진 회장의 관심을 끌었고, 아버지는 길드 창설의 기획자가 되었다.
“아버지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잘하는 건지 모르겠다.”
“네가 반대한다고 아버님이 하지 않으시겠어?”
무진으로선 예상하지 못한 나비효과였다. 진 회장의 팔불출을 고려하지 못한 패착이었다. 그러나 이왕 시작한 이상, 최대한 유리한 방향으로 끌어와야 했다.
일단은 아버지의 실력을 검증받을 필요가 있었다. 회사 일만 하던 분이 길드 창설의 기획을 맡은 이상, 구설이 올라오기 마련이다. 사회에서 경험이란 세간의 눈과 인식을 결정하게 된다. 믿고 맡겨도 될 안목을 검증받아야 했다.
“그래도 안전이 최선이야.”
“아버님 반만이라도 우리 가족을 챙겨 주면 안 되겠니?”
“아버지하고 같을 순 없잖아.”
“말이라도 해 주면 어디가 덧나.”
“빈말은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거짓말은 밥 먹듯이 하면서!”
“그게 나만 잘되자고 하는 일은 아니잖아.”
무진은 아버지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워낙 열정적인 성향인 데다가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계셨다. 마치 기회를 노렸던 것처럼 아버지는 의욕을 불태웠다. 그러니 내색하지 않고 열심히 하라고 응원했다.
“좀 더 떠올려 봐.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에 제인 누나한테 알아보라고 할 테니까.”
“파파보이 나셨네!”
“너하곤 상관없는 일이야. 혹시, 관심 있어?”
“없어!”
“없다니 다행이네. 나는 아메리칸 스타일이거든.”
“그러기만 해 봐!”
지수가 으르렁거리자, 이쯤에서 마무리했다.
무진은 선배를 찾았다.
상호 협력하기로 약조를 맺었으니, 진 회장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아버지의 말을 들어 보니 진 회장의 반응이 예상보다 더 좋았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네를 위해서 선행을 베풀기로 했다.
‘그것도 이상하긴 해.’
나이 든 노인네의 비명횡사야 언제든 가능하지만, 시기가 좀 공교롭기는 했다.
어쨌든 눈에 띄는 장소에선 태수 선배를 깍듯이 대해 주었다. 말 몇 마디 해 준다고 돈 드는 것도 아니고. 간간이 선배의 개인 트레이닝실에서 훈련과 대련을 했다. 한쪽만 전력을 다하기는 했어도, 선배의 승리였다.
“꼭 가야 해?”
“나야 상관은 없는데.”
우리만의 아지트에선 무진은 본성을 숨기지 않았다.
태수와 친구들은 무진의 폭력에 기겁했다. 전처럼 한 방에 끝나지 않았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다. 일격에 의식이 끊어지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맞을 때마다 고통이 뼈에 사무친다. 흔적이 오래가서 밤마다 강제로 복기해야 했다.
“쉬운데, 못 하는 이유가 뭘까?”
“보통은 다 못 해!”
“선배들은 할 수 있어. 나는 믿어.”
“우리는 네가 아니라고!”
무진은 일방통행이었다. 선배의 앙탈은 관심 없었다. 다음 학기부터는 1학년도 전 학년과 결투가 가능해진다. 활동 반경을 넓히고 어색해지지 않으려면 선배들이 강해져야 했다. 지금 정도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무진은 선배들을 하나씩 두들기며 실력을 점검하고, 가지고 있는 것들을 탈탈 털었다. 스텟, 속성, 장비, 아이템의 연계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려면 낱낱이 알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까지 하찮지는 않잖아?”
“그러네.”
말로만 아니라고 할 뿐, 시큰둥한 무진의 태도에 태수는 열불이 터졌었다. 3학년에서 상위권 서열을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건데.
‘망할, 징징거려 봤자 서글프기만 하네!’
무진과 비교하면 하찮지 않을 수가 없었다. 1학년이 이미 군주급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것부터가 상식적이지 않았다. 당장 현역으로 활동해도 손가락 안에 꼽혔다.
‘그러면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
아카데미에 오지 않으려고 했다는데, 이런 실력을 갖추고 평범하게 산 것부터가 정상적이지 않았다.
“연계가 부자연스러워. 타이밍을 반 박자 느리게 가져가고, 거력발산을 배후에서 사용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이건 기선 제압용이라고!”
“그거야 선배보다 약한 경우에나 통하지, 비슷한 수준만 되어도 허장성세에 불과해.”
“……빌어먹을 팩트 폭력!”
할아버지는 꽃으로도 때린 적이 없는데, 이 망할 놈의 후배 놈은 말로도, 주먹으로도 가리지 않고 두들겼다. 인정머리라고는 조금도 없는 무자비한 녀석이었다.
헐!
짜증은 나나, 이놈의 말은 다 정답이다. 처맞을수록 공수가 몰라보게 매끄러워졌다. 자신과 친구들의 합격도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전력이 급격하게 오른 것도 아니다. 그저 방식을 바꾸었을 뿐인데, 개념이 달라진다.
오싹!
보는 관점이 아예 다르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선지자처럼 가야 할 길을 안내했다. 이게 과연 열일곱 살의 나이에 가능한 일일까? 전투력 못지않게 소름 돋는 안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감탄할 필욘 없는데.”
“그래, 너 잘났다!”
“알고 있어.”
“겸손이란 건 알고 있니?”
“내가 그러면 재수 없다고 할 거잖아.”
그건 맞네!
겸손도 어느 정도여야 받아들이지, 아예 수준이 다른데 그 앞에서 겸양을 떤다고 상상해 봐라. 그걸 겸손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패왕공은 어때?”
“1성이 올랐어.”
“쩝, 2성은 오를 줄 알았는데.”
“1성 올리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별로.”
무진은 내력을 패왕공으로 바꾸어서 일장을 내질렀다. 그러자 정면이 부서지며 호풍환우가 일어났다. 패왕공의 진의, 패왕의 강림이었다.
멍!
태수와 친구들은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남의 무공을 한 번 보고 따라 한 수준이 아니다. 또한, 패왕공이 아니라고 하기도 힘들었다.
“같은 무공인데, 천지 차이네!”
“우린 태수가 천잰 줄 알았지 뭐야? 범재였어!”
“주군을 바꿔야 하나?”
“능력 차이 정말 심하다!”
태수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확실히 자신의 친구들이었다. 언제 어느 때든 친구의 등에 비수를 꽂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우리 사이에 위로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 어느 때든 물어뜯을 기회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바꾸려고?”
“아니, 우린 의리가 있거든.”
“의리는 개뿔!”
“주군으로 모시기엔 보잘것없지만, 우리 아니면 누가 모셔 주겠어.”
“너희들은 양심도 없냐?”
“맞지, 태수가 재벌 아니었으면 우릴 어떻게 만나겠어.”
무진이 쏘아 올린 공을 잘도 받아먹는 태수의 친구들이었다. 아주 이때다 싶어 죽자 사자, 태수의 자존감을 짓뭉갰다. 하지만 패도 자기들이 패겠다는 친구들이다.
“다 웃고 떠들었으면 다시 하자.”
“아니, 다 못 떠들었는데!”
“하면서 떨어.”
“하면서 어떻게 떨어!”
“떨걸.”
“……그러네!”
하도 두들겨 맞았더니 몸이 자동 반사적으로 비 맞은 개처럼 떨었다. 이러면 골병이 들어야 하는데,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그러한 현실에 통탄을 금치 못하겠다.
‘할아버지가 너무 좋아하시잖아!’
할아버지가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있어서 태수를 빠져나오지 못할 수렁으로 몰아갔다.
-우리 태수가 말일세!
-자네 손주는 어떤가?
-우리 태수를 따라오려면 멀었지!
-쯧쯧, 안됐구먼.
요즘 들어 우리 손주 때문에 기 펴고 산다며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손주 사랑이 지독할수록, 태수로선 감당하기 벅찬 현실이 되고 있었다.
“자자, 선배는 할아버님의 자랑입니다!”
“개자식!”
그걸 알고 있는 무진은 태수를 놔주지 않았다. 손주밖에 모르는 할아버지를 실망시킬 거냐고, 끊임없이 닦달했다.
“선배들, 부모님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봅니다. 이대로 그냥저냥 하찮은 헌터로 살다 갈 겁니까?”
“벼락 맞아 죽을 놈!”
“어떻게 부모님을!”
“우린 효자가 되기 싫어!”
불효자가 부러운 태수와 친구들은 울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찌감치 일탈을 해 보는 건데 경험 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