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협상의 대가(3)
무진이 다가오려고 하자, 태수는 급히 호영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놈으로 대신 때우면 안 되겠냐는 정중한 의사 표현이다.
지지고 볶든, 맘대로 해도 되었다.
“친구를 파냐?”
“네 희생을 잊지 않으마.”
네 부모님은 내가 잘 모시겠다는 태수의 호언장담에 호영은 코웃음을 쳤다.
흠.
무진은 관심 없는 척,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웃기는 선배들이었다. 하는 짓은 영락없는 꼴통들인데, 정도를 벗어나진 않았다. 재벌치고는 사람답다고 해야 하나? 드라마가 사람을 버려 놓았는지 선입견이 작용한 듯했다.
태수 선배의 제안을 거절하며 시간을 끈 이유도 성향을 보기 위해서다. 자기 뜻에 부합하지 않았을 때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통상적인 재벌 새끼들 같진 않단 말이야.’
종합적인 검토 결과, 같이해도 괜찮다는 고가 평가가 나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안전장치 없이 힘을 드러내진 않았다. 사요공과 발칸의 공조는 필수 옵션이었다.
‘잘 걸어 놨지?’
-현혹되진 않을 겁니다.
‘사람의 말처럼 가벼운 것도 없지.’
-그렇습니다.
선배들의 영혼에 울타리를 채웠다. 세뇌나 암시는 먼저 걸면 장땡이었다. 왜냐고? 상대가 걸어오면 자동으로 방어가 되거나, 낌새를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울타리의 흔적을 최소한으로 해 암중 세력의 경각심을 누그러뜨렸다.
‘수작을 걸어온다면 알 수 있겠지.’
성운 길드를 창립한 후 길드장으로 발돋움하게 되는 진태수였다. 그 점이 살짝 걸린다. 10년 안에 대형 길드와 자웅을 겨루기엔 부족해 보였다. 드러나지 않은 조력자나 세력이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라도 상관없고.’
불필요한 의심이라면 관계를 새롭게 정리하면 그만이었다. 또한, 재벌가와 협력 관계를 맺는다면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었다. 배후 조종자로 낙점한 사부님이 손을 내밀어도 괜찮고. 그럭저럭 성운 그룹은 괜찮은 먹잇감이었다.
“선배님들의 부모님은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태수와 친구들은 사태를 되짚어 볼수록 암담함이 밀려왔다. 무진에게 예의를 가르친 후, 친위대에 가입시키려고 했었다. 하지만 실체를 드러낸 무진은 천외천의 괴물이었다.
‘그렇게 싸우고도 호흡의 기복조차 없네.’
‘우린 상대도 되지 않았다는 거잖아.’
노력하면 닿을 수 있기는커녕, 까마득히 높은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찮은 미물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시험대에 올린 것이다.
‘그런데 왜?’
내력, 속도, 속성이 부족하다는 세간의 평가가 무의미해지는 강함이었다. 지금까지 숨겼던 힘을 드러냈다는 점이 불안감을 부추겼다.
무엇보다 네가 뭔데 우리 부모님을 왜 모셔? 자기 부모는 자기가 모시는 세상이라고!
“살인멸구 안 합니다.”
“노예 계약이구나!”
노예가 될래? 죽을래?
모 아니면 도로 선택이 아주 깔끔했다.
태수는 지독한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부터 무진과는 상종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제 발등을 찍었으니 누구한테 하소연하기도 힘들었다.
“살인이 쉬운 게 아니에요. 전쟁 때 병사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얼마나 고생하는데, 나는 후배를 고생시키는 선배가 되고 싶진 않아!”
“빨갱이를 죽여 평화가 온다면, 대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요.”
“그 빨갱이가 너라면?”
“가만히 못 있습니다. 당연한 물음을 하시네요. 선배들도 저항하면 됩니다. 저는 자유를 소망하거든요.”
자기들도 나름 뻔뻔한 축에 속하지만, 무진과 비교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말만 쉽게 할 뿐, 대의 따윈 애초에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냥 내키는 대로 행동하겠다는 엄포였다.
“자, 계약서를 읽어 보고 사인을 하세요.”
무진은 사전에 준비한 계약서를 태수에게 내밀었다.
태수는 친구들에게 넘겨주며 같이 읽었다. 다들 최소한으로 불합리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지금까지 자신들인 갑인 줄 알고 살았지만, 진정한 갑은 따로 있었다. 가여운 을로서 갑의 선처를 호소할 따름이다.
-갑(강무진)과 을(진태수 외 똘마니)은 상호 협력적인 관계로 불합리한 결정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갑이라고 하여 을의 생사여탈을 좌지우지 않는다. 합의를 통해 다수결의 원칙을 세운다.
계약 내용을 읽어 내려간 태수와 친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읽을수록 의문이 들었다.
‘왜 이렇게 정상적이야?’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무조건 강제할 것 같았는데, 내용만 봐서는 조율을 거친 합의를 기본 전제로 했다. 다만, 신의를 저버리거나 불의에 타협했을 때 조항이 쎄하기는 하다.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사가 분명했다. 믿고 살기 어려운 현실에 그만한 핸디캡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정말 이것으로 족하다고?”
“그렇습니다만.”
“이상하잖아. 너라면 유리한 방향으로 강제한다고 해도, 우린 거절할 수가 없어.”
“그런 관계도 나쁘진 않지만, 전 자발적인 신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말로 했어도 됐는데.”
“그럴 리가요? 사람은 처맞지 않은 이상 본심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아!”
이해가 안 돼야 하는데, 돼 버려서 태수와 친구들은 속이 탔다. 맞아 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몸은 정직했다. 아닌 척하고 있을 뿐. 무진이 쳐다볼 때마다 움찔움찔 지나치게 설렜다. 몹시 설레서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여태 이런 식으로 설득하고 다녔나?’
알고 보니 무진은 협상의 대가였다. 설득이 안 되면 앞날을 깜깜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채찍에 이은 당근이 제법 달달했다. 거절하지 못할 매력적인 제안이 되었다. 물론, 처맞지 않았다면 계약서를 보자마자 찢어 버렸을 것이다.
‘그걸 보고 어떻게 거절해?’
무진은 열일곱 살이다. 지금이 이런데 차후에는 어떻게 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무조건 같이해야 할 인재(人才) 아닌 인재(人災)였다.
스스슥!
태수와 친구들은 사인했다. 그러자 계약서의 내용이 빛을 뿜어내며 태수와 친구들의 뇌리로 스며들었다.
“……이게 무슨?”
“영혼 계약입니다. 배신하면 지옥에 갈 수 있으니 조심해 주세요.”
“하하, 농담도…… 아니냐?”
“농담이라 치고, 친해졌으니까 말 놓을게.”
“싫다고 하면?”
“더 처맞는 거지.”
계약서의 조항 마지막에 깨알같이 발칸을 언급해 놓기는 했다. 가장 중요한 조항이긴 한데, 지금 당장은 중요하지 않았다. 웃고 떠들며 사내로서 의리를 되새길 수 있으면 족하다.
“계약도 끝냈겠다. 삼겹살이나 먹읍시다. 선배.”
“갑자기 삼겹살이 어디…… 있구나.”
무진은 인벤토리에서 삼겹살과 무쇠 불판을 꺼냈다. 준비된 캠핑 마스터로서 언제 어디서든 집처럼 편안하다. 노지든, 무인도든 온돌 깔린 안방처럼 만들 줄 알아야 진정한 캠핑 마스터였다.
“인벤토리에 집을 옮겨 놓았냐?”
“얼레, 자가발전기까지 가져왔네!”
캠핑의 기본은 장비, 항상 최고급으로 맞추어 놓아야 했다. 하나라도 빠지면 캠핑의 맛을 느끼기 힘들다. 제인 누나에게 부탁한 보람이 있었다. 7계식이 되면서 강화, 보존 마법을 걸어 닳거나 녹슬지 않는다.
화르르르, 지글지글!
뜨겁게 달구어진 통짜 무쇠 불판에 삼겹살과 묵은 김치는 ssss급 사기템이었다. 익는 소리마저 맛있다.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로 보조를 맞추었다.
꿀꺽!
태수와 친구들은 본능에 충실했다. 특히 오늘처럼 군침이 도는 날이 처음이라 씁쓸하다.
상추와 깻잎에 삼겹살 한 점을 올리고 마늘, 양파를 쌓아 입에 쏙! 넣었다. 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제까지 먹어 본 삼겹살과는 차원이 다르다.
‘처맞고 먹는 삼겹살이 맛있다니!’
배가 고프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오묘한 감정이 뒤섞이며 삼겹살을 음미했다.
“삼겹살에 소주가 빠지면 쓰나.”
“너 미성년자야!”
“선배가 아직 인생을 모르네. 난 작년부터 마셨는데.”
“얘 좀 봐. 아주 불량하구나!”
“재벌이 생도 시절에 술도 안 마시고, 참! 너무 건전해서 의심스러워. 아니면 자신이 없나?”
“자신 없기는 누가? 내가 안 마셔서 그렇지, 마시기만 하면 술고래야, 인마!”
열아홉 살이면 술도 마시고, 연애도 하고, 잠도 자고, 한창 그럴 나이 아닌가. 하물며 재벌이면 최소 2년 전에 마스터하고, 지루해야 마땅했다.
‘특이한 선배들이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조금 겉멋이 들기는 했어도, 생도로서 최소한 지켜야 할 선은 지켰다. 요즘 들어 성관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강했다. 피임이라도 잘하든가, 그러다 덜컥 애라도 가지면 어쩌려는 건지, 원.
자기들은 다 컸다고 주장해 봤자, 낳고 기르지 못한다면 개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부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당연히 여기는 애새끼들이 대다수다. 생명은 소중하나, 바르게 키울 자신이 없으면 선택은 불가피했다.
‘선배들하곤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
재벌이 돈이 없어서 애를 못 키우겠나. 재력이 된다면 책임져야 마땅했다.
후르륵!
태평양 한가운데서 삼겹살과 소주는, 상상만으로도 입맛이 돋는다. 그런데 상상이 현실이 되니 취하지를 않는다.
캬아, 죽인다!
한 병, 두 병, 세 병…… 열 병은 순식간이다. 다행히 인벤토리에는 소주 3천 병이 있었다.
그렇게 밤이 되도록 마셨다. 태평양의 밤하늘은 쏟아질 듯 별이 뚜렷했다.
“이 씨발, 다 죽어!”
흠, 주사가 있구나.
태수와 선배들이 처음 술을 취하도록 마셔서 그런지 감정 조절이 안 되는 모양이다. 다행이라면 늠름한 후배와 같이 마시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고로 술은 후배한테 배우라지 않나.
술버릇은 초장에 잡아야 했다. 내버려 두면 습관적으로 주사를 부리게 된다.
“선배, 잠깐 보죠.”
“이 새끼가 지금…… 커억!”
무진은 친절하게 목덜미를 잡은 후, 무인도의 숲으로 들어갔다. 밥 먹는데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었다. 재수가 없으면 무쇠 불판에 전을 부쳐야 했다.
무진은 태수 선배의 배때기에 주먹을 넣어 주었다.
퍼억, 퍼억!
알딸딸했던 태수의 동태 눈깔이 점점 생태 눈깔로 바뀌어 갔다. 이쯤 했으면 된 것 같지만, 무진은 평소와 같은 일관성을 중시했다.
퍼억, 퍼억, 퍼억!
우웨웨웨웨웩!
고래고래 비명을 질러 댔지만, 기막을 뚫고 나가진 못했다.
“아직도 취했나?”
“……깼어!”
“그럼 똑바로 서.”
“……섰어!”
무진은 태수 선배와 어깨동무를 하고 숲에서 기어 나왔다. 다들 해롱해롱한 상태였다. 소리라도 들었으면 정신이 번쩍 들었을 텐데, 무진은 소음 공해를 차단했다.
하나씩 숲으로 데리고 가서 수제 상쾌한을 드렸다. 하나씩 정신을 차리고 돌아왔지만, 누구도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 나만 당할 수 없다는 찐우정만이 있었다.
“2차 콜?”
“우웨웨웨웨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