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협상의 대가(2)
“우리가 함께인 이유를…… 억!”
“넌 입 좀 닥치고, 뒤에서 서포트나 잘해!”
태수가 호영의 입을 강제로 틀어막았다. 이 새끼가 말은 잘하는데, 가끔씩 쓸데없는 말도 덧붙여서 속을 태웠다. 지금도 봐라, 우리의 전력을 스스럼없이 까발리려고 했다. 저 음흉한 후배 놈이 그 말을 듣고 어떻게 할진 뻔하다.
‘이놈은 순간순간의 대처 능력이 말도 못 하게 빼어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모르는데도 정확한 대처를 해 왔다. 일련의 과정을 되짚어 볼수록 소름을 돋게 했다.
‘칠대가문의 무인은 다 이런 건가?’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이놈은 권왕가에서 키우는 비밀 병기가 분명하다. 베일에 싸였던 공주님은 이놈을 가리기 위한 위장막에 불과했다.
‘그래도 이긴다!’
아무리 그래도 두 살이나 어렸다. 후배한테 합공을 하고서도 처맞았단 소문이 번지면…… 큭! 아카데미에 얼굴을 들고 다닐 자신이 없다. 게다가 애초에 합공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한 이상 빠져나갈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동시에 입을 맞춰서 그런 적 없다고 잡아떼면…… 응?
“녹화했습니다.”
“……치밀한 새끼!”
저 봐라, 얼마나 용의주도한 녀석인가? 저 둔탁해 보이는 근육 덩어리가 알고 보면 교활한 여우보다 더욱 영악했다. 여태 자신의 실력을 숨긴 것만 봐도 대단한 놈이다. 절로 감탄이 나오지만, 이기기 위해서 참았다.
“다들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해.”
“강적이긴 한가 보다, 네가 그런 소릴 하는 걸 보면!”
“정우철 이상일지도 몰라.”
“믿기지 않네. 저 1학년이 3학년 통보다 강하다니!”
무진이 대단하기는 했어도, 정우철은 창황정가가 내세우는 생도로 1학년인 정우민의 형이다. 3학년에서 그 녀석과 견줄 생도는 없다고 자신했다.
‘애들이 긴장 좀 했겠지.’
과장한 면도 없지 않지만, 그만큼 정우철의 실력은 압도적이었다. 태수조차 아직은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워낙 격차가 커서 서열을 올리는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다구리를 치기에는 창황정가가 만만치 않았다.
버프, 디버프, 가속, 회피, 전력 분석이 태수의 친구들이 가진 능력이었다. 호영이 구축한 포지셔닝의 이름은 환각지대다. 환영을 일으켜 무진을 꾀어내기로 했다.
또한, 태수는 아직 비장의 수를 꺼내진 않았다. 드러내지 않은 비밀 특성, 빙결을 사용할 때였다.
“작당모의는 끝났습니까?”
“건방진 짓을 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태수가 사나운 기세를 발산하며 으르렁거렸다. 개망신당한 그대로 되돌려 주기로 했다. 일대일에서는 밀렸어도 우리가 함께한다면 그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 낼…… 어?
화아아아아아아!
말 그대로 기세였다. 한데, 태수와 친구들은 꼼짝도 못 했다. 몸이 급속도로 냉각되며 심장까지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발이 떨어지기는커녕, 영화 속의 기계처럼 부서져 버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이게 무슨?”
“……허세야!”
구사일생으로 호영의 외침이 약이 되었다. 특성 중에 허세가 없진 않았다. 허장성세를 이용한 장판교의 장비처럼 특성을 발휘한 것이다.
어?
사라졌어.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 시야에서 없어졌다. 기세에 감각마저 얼어붙었던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는다. 환영을 부렸다고 짐작한 순간, 눈앞에 나타났다. 거리가 비록 10m에 불과할지라도, 촌음도 걸리지 않았다.
퍼어어억!
누군가 날아가고 있었다.
내 친구 호영이다.
플라이 마법을 부렸나? 벌써 100m 상공을 날고 있었다. 눈깔에 초점만 있었다면 완벽한 플라이 마법일 텐데, 흰자위와 게거품이 안타까울 따름…… 헐!
언제?
내 친구들이 같이 날고 있었다.
퍼억, 퍼억!
전희수, 박재진, 조산림, 채영기도 호영의 뒤를 따라 바다로 날아갔다. 다시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커어억!
나도 날고 있으니까.
언제 맞았는지 모르겠다. 퍽! 소리가 뒤늦게 났다. 날아가는 동안에도 상념이 복잡해야 마땅하나, 그렇지는 않았다.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의식이 날아간 상태였다.
첨벙, 첨벙!
물보라가 심하게 일며 태수와 친구들은 의식이 돌아왔다. 사실 돌아오지 않으면 익사할 수 있었다. 삶에 대한 애착과 남겨 둔 재산에 대한 미련이 의식을 일깨웠다.
그 돈 써 보고는 죽어야 할 거 아냐!
어푸, 어푸!
의식이 돌아왔음에도,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었다.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대로 믿기에는 터무니없는 진실이었다.
‘안 보였어!’
‘우리가 일수가 당한 거야?’
뭐라도 보였다면 납득이라도 편하지. 아무것도 안 보였고, 빛이 번쩍하는 사이에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
그러나 항복하기에는 이르다. 고작 한 방 맞고 포기하기에는 그간 쌓아 놓은 아성이 있었다.
저벅, 저벅!
어디서 걷는 소리가 들리네.
저 앞에서 걸어오고 있는 익숙한 체형이 있었다. 자신들을 물에 빠뜨려 비 맞은 생쥐로 만든 원흉이었다.
“……마법일까?”
“플라이 마법은 6계식이잖아!”
“등평도수보단 낫지!”
“저 움직임을 봐선 등평도수 같긴 한데!”
“등평도순 화경이잖아!”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어느 것도 이치에 합당하지 않았다. 1학년 생도가 6계식의 마법사라는 의혹도, 화경의 고수란 의혹도 말이 안 되었다. 화경은 능히 군주급의 헌터와 맞먹는다. 그런 괴물과 싸워야 한다면, 차라리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편이 나았다.
“이건 환상이 분명해!”
오!
이번에도 호영이었다. 이 모든 사태를 환상이나 꿈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간단하게 이해가 되었다.
불행하게도 말이 씨가 되진 않았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시무시한 광경이 펼쳐졌다.
타타타타타!
걸어오던 녀석이 뛰어온다. 바닥을 평지보다 빠르게 뛰어오는데 어느 순간 또 사라졌다.
아니, 지가 워프마스터야, 뭐야?
퍼억!
물에서 겨우 숨을 쉬고 있던 호영의 턱주가리가 발등과 만나면서 물속에서 승천했다. 어째서 조선 시대 관아에서 물볼기를 때리는지 이해가 되었다. 곤장과 볼기의 착! 달라붙은 일체감이 섬뜩했다.
씨익!
무진이 미소를 지었다.
오싹, 부르르르!
환상은 개뿔!
어서 빨리 물에서 벗어나 반격해야 하나, 현실은 불합리하다. 무진은 물에서도 자유로운 반면, 자신들은 핸디캡을 않고 싸워야 했다.
다행이라면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 정도일까?
퍼억, 퍼억!
크아아악!
어차피 땅이나 바다나 일방적인 구타에 지나지 않았다. 보여야 대응이라도 하지, 버프나 디버프를 먹일 사이도 없이 턱주가리를 헌납했다. 환각지대와 빙결은 사용도 못 하고 사장되었다.
슈우웅!
우리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L)도 아니고! 생체 병기가 되어서 태평양을 횡단할 기세였다.
첨벙, 첨벙!
또다시 수백 미터를 날아가서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워낙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그런지 표면장력에 내장이 흔들렸다. 일반인이었다면 장기가 몽땅 뭉개졌을 수도 있었다.
“……다들 정신 차려 ……크악!”
친구들을 챙기던 태수가 무진의 타깃이 되었다. 어느새 다가와 킥을 썼다. 왼쪽 턱주가리를 헌납하고, 다시 오른쪽 턱주가리를 내미는 자애로움이었다.
뻐어엉!
가죽 공을 폭발시키는 경쾌한 슈팅이었다. 잘 보면 무회전의 UFO슛과 비슷했다. 회전하지 않고 포물선이 아닌 직선으로 소닉붐이 발생하며 바닷물을 가로지른다.
처저저저저저적!
50방의 물수제비였다.
푸른 물보라와 하얀 거품이 여섯 줄기로 아름다운 선을 그었다. 수백 미터를 우습게 날아가는데도 속도가 줄지를 않는다. 어어느새 따라붙은 무진이 의식을 차린 태수와 친구들을 노렸다.
“……우릴 죽일 심산이냐?”
“살인멸구처럼 효율적인 방법도 드물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무진이 부정하지 않자, 태수와 친구들의 안색은 새하얗게 변했다. 어떻게든 이 지옥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마나의 유동이 정지되었다.
“……어째서?”
“제가 마나를 장악했습니다.”
공간이동이나 텔레포트를 차단해 버렸다. 재벌이라면 최후의 수단으로 도주는 기본적인 루트였다.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우승하기를 바랍니다. 그때까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개소리를, 월드컵 없어진 지가 언젠데!”
각성자가 판을 치는 세상에 기존의 스포츠가 각광받기는 불가능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도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사라졌다. 오히려 헌터들의 투기판인 세계 서열전이 인기몰이 중이다.
어쨌든 없어진 월드컵이 우승하기를 바란다니,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냐고!
뻐어엉, 첨벙!
뉴 버전 인체 공학 축구공으로 빙의한 태수와 친구들이었다.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그래서 더 억울했다.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재벌이잖아요.”
재벌이라고 무조건 나쁘지가 않아요!
우리는 애들 삥을 뜯은 적도, 협박한 적도 없다. 다구리를 치기는 했어도, 그건 합의된 사안이잖아.
억울하다.
재벌은 악하고, 빈자는 선한가?
세상을 봐라, 부자 동네가 훨씬 안전하고 인간답잖아! 모두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대체적으로 보면 그렇다. 그저 세상이 빈부를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부자가 되려면 속임수를 써야 하고, 가난한 사람의 고혈을 빤다는 고정관념이 문제였다.
실상 가난할수록 악착같고, 지독하다. 물론, 그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 좋은 부모, 좋은 교육을 받으면 통상적으로 좋은 사람이 된다. 어른들이 결혼할 때 사랑이 아닌, 집안을 보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처맞는 것도 억울한데, 재벌이라고 죽이겠다니?
더더욱 죽기 싫었다.
“개새끼, 어디 죽여 봐!”
빌어먹을, 왜 입은 정직하고 지랄이냐고!
태수는 자신의 입을 원망했다.
“농담입니다. 힐.”
무진은 원하는 만큼 신나게 팬 후, 치료 마법을 성실히 걸어 주었다. 상처가 순식간에 회복되어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나까지 채워지자, 태수와 친구들은 기겁했다.
“……너, 정체가 뭐야?”
“1학년 생도 강무진입니다. 다들, 이 정도는 하지 않습니까?”
“지랄!”
“그렇죠.”
무진의 잘난 체에도 태수와 친구들은 웃지 못했다. 이게 웃음이 나올 일인가? 이 자식은 괴물이다. 무공도 화경인데, 마법도 최소 7계식이다. 우리도 불공평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이놈은 더했다.
“어째서 하늘은 너를 낳고, 나를 낳은 거지?”
“딱히 그럴 만한 실력은 아닌데요. 참고로 선배가 먼저 태어났습니다.”
선후가 뒤바뀌어도 뜻은 이해되었다. 웃으라고 한 소린데,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제부터 너는 나의 라이벌이다.”
“용납하기 어려운 발언이네요. 우리 잠시 대화를 해 볼까요? 맞는지, 더 맞는지?”
그딴 게 무슨 대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