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협상의 대가(1)
스윽!
화아아아!
전망이 탁 트였다. 어두컴컴하고 좁은 바위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전혀 다른 공간으로 이동한 것이다. 던전 틈새의 다양한 특성 중 하나인 텔레포트였다.
“여긴 대체?”
“태평양 인근의 무인돕니다. 그런데 뭘 믿고 순순히 따라 들어온 겁니까?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재벌 3세로서 경각심이 부족하네요.”
“그래, 없다 치고! 자꾸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이유가 뭐야?”
“어디까지 견디나 확인을 해 보려고요. 같이 일할 수도 있는데, 아무나 따를 순 없잖아요.”
“그건 맞네.”
동료를 선택하는 데 탐색은 필수다.
태수와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고개를 강하게 획획! 저었다.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오기는커녕, 자꾸 무진의 페이스에 휘말렸다.
“확실히 보통이 아니구나.”
“아카데미를 휘젓고 다니려면 이 정도는 기본입니다.”
“그래서 진짜로 한판 뜨자고?”
“아니면 카페에서 차나 마시며 잡담이나 했겠지요.”
“네가 1학년에서 손에 꼽히는 걸 알지만, 난 3학년이야. 그리고 상위 서열에 있어. 설마 이길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그러는 선배야말로 제가 전력을 드러냈다고 보시는 겁니까?”
무진의 눈빛이 바뀌었다. 감추어 둔 패도를 드러내자, 기세가 발산되며 태수와 친구들을 압박했다.
우우우웅!
찍어 누르는 강압적인 위압에 태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인의 기준에서 경지에 이르러야만 가능한 무형지기였다. 헌터가 무인에게 초반 기선 제압에서 밀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촤악!
태수가 일보를 내디디며 기세를 양단했다. 갈라진 기세가 방향을 잃으며 흩어진다. 도리어 태수의 패도가 무진의 무형지기를 밀어내며 영역을 확장했다.
“대단한데요.”
“너야말로.”
태수는 [패왕의 팔찌]로 역발산기개세를 발동했다. 선례가 많지는 않지만, 역발산기개세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아무렇지 않은 녀석은 처음이다.
‘오히려 밀렸어.’
아이템을 쓰고도 기선 제압을 못 했으니 태수로선 치욕적이었다. 설마 1학년을 상대로 진심이 되리라고는.
“자신만만한 이유가 있었네.”
“저도 좀 놀랐습니다. 재력을 이용해서 아이템으로 처바른 쭉정인 줄 알았거든요.”
“재벌이라고 노력 안 하는 줄 알아!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아!”
어려서부터 태수는 그 말이 가장 싫었다. 재벌로 태어나 노력 없이 성취했다는 말. 눈으로 본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 자리를 지키려고 쏟아부었던 피와 땀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지금까지는 후배라서 귀엽게 봐 줬지만, 더는 못 봐주겠다. 너 좀 많이 맞자!”
태수의 눈빛도 바뀌었다. 평소의 담담한 기운과는 다른 광기가 번들거렸다. 그러자 5인방도 긴장한 기색을 비치며 물러섰다. 태수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는 알 수 있었다.
‘저 건방진 후배 놈이 기어이 태수의 역린을 건드리네.’
호영은 태수를 흔드는 무진의 버릇없는 언행에 이를 갈았다. 다른 이도 아니고 자신이 모시게 될 주인이었다.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지, 태수의 노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타의 재벌과 같다고 본다면 큰코다칠 것이다.
꽈아아앙!
무진과 태수가 영역을 확장하며 부딪쳤다. 서로의 주먹이 닿으며 굉음이 토해진다. 모래사장의 모래가 천지 사방으로 터져 나가며 희뿌옇게 변했다.
퍼퍼퍼펑!
잔영이 생기는 속도, 공간을 깨부수는 파괴력의 향연.
한 치도 밀리지 않는 공방전이었다. 그것도 잠시 재차 파격을 일으켰다. 섬전처럼 튀어 나가는 그림자, 사각으로 돌아서며 일격을 발출했다.
퍼어엉, 쩌저저저적!
자동 방어 아이템인 [메탈 실드]가 발동되었지만, 태수의 안면이 붉게 달아올랐다. s급의 아이템인 [메탈 실드]가 단 일격에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강하다고?’
낯선 결과가 펼쳐지고 있었다. [메탈 실드]가 무력화되었다고 끝나지 않았다. 빈틈이 생기자 권경이 파고들었다. 가공할 전사력이 육신의 외부는 물론, 내부까지 거침없이 흔들어 댔다.
‘게다가, 전력도 아닐 텐데!’
할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패왕공을 익혔고, 패왕의 팔찌로 전력이 상향되었다. 패왕공을 바탕으로 한 거력발산과 [패왕의 팔찌]의 역발산기개세가 결합이 되면 상대는 평소의 절반 이하로 전력이 떨어지게 된다.
태수는 후배를 상대한다고 해서 방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전력을 펼쳤고, 아이템과 장비로 무장했다. 그렇기에 작금의 불리한 형국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내력을 숨겼구나!”
“숨기면 안 됩니까?”
“뭐…… 헉!”
주도권을 잡은 무진의 권풍이 태수의 옆구리를 스쳤다. 순간 대처가 늦었으면 위험했다. [메탈 실드]가 깨진 이상, 정통으로 맞는 순간 통제 불능이 될 수 있었다.
파파파파팟!
호흡이 닿는 거리에서 무진의 공수는 완벽했다.
가속, 민첩 아이템의 사용에도 태수는 연신 밀렸다. 반격을 가할 틈은커녕 막거나 회피할 여유도 없다. 게다가 점점 파괴력이 상승하고 있었다.
스윽, 꽈악!
태수가 팔을 들어서 막으려고 하자, 무진은 지르던 왼 주먹을 펴며 팔을 잡아끌어 내린다.
헉!
태수의 안면이 비었다. 무진의 라이트훅이 주저하지 않고 휘둘러졌다. 안면이 박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아름다운 궤적이었다.
퍼어어엉, 퍼엉!
권경이 이중으로 폭발했다. 걸레짝처럼 만신창이가 되어야 할 태수는 의외로 멀쩡했다.
크윽!
위기일발의 경각에서 숨겨 놓은 아이템 [거울의 장막]을 사용한 것이다. [거울의 장막]의 무지개 반사는 모든 공격을 그대로 돌려주는 역공기였다.
휘이익, 우아아아앙!
회심의 역공이 성공했다. 당연히 물러설 줄 알았거늘, 무진은 여전히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태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찰나에 충격을 와해했다고?”
“제법 깜찍한 수를 숨겨 두었군요.”
“이런 말도…… 커억!”
“방심은 금물입니다. 최선이긴 해도 위급한 상황을 겪어 보지 못해선지 타이밍이 늦었습니다. 역시나 온실 속의 화초일 뿐이군요.”
태수의 입은 막아 버리고 무진의 손발은 쉬지 않았다.
[거울의 장막]을 사용했음에도 통하지 않은 까닭은 방향에 있었다. 모든 걸 막아 내는 아이템이라도, 태수 본인이 인식한 범위여야 했다. 얼굴로 날아오는 무진의 주먹은 페이크였고, 진짜는 무릎이었다. 도끼로 나무를 찍듯, 복부에 니킥이 들어갔다.
“……그러는 넌?”
“저도 곱게 자랐습니다.”
무진도 마찬가지긴 했다. 지수가 아카데미를 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 팔자였다. 그래도 아버지의 노고를 잊지는 않았다.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뭔 개소리 ……커억!”
대화는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연막일 뿐, 무진의 연타가 들어갔다. 이번에는 힘을 주지 않고 허리의 반동으로 툭툭! 쳐 댔다.
그런데도 태수는 바람에 휘날리는 가랑잎처럼 흔들렸다. 제삼자에겐 가볍게 보이나, 실상은 타점이 절묘하다. 힘을 빼고, 싣는 찰나가 완벽했다.
‘……능숙해!’
속도와 내력도 만만치 않지만, 태수를 제일 곤란하게 만드는 공수는 따로 있었다. 다음 수와 연계가 놀랍도록 정교했다. 마치 자신의 대응을 알고 있는 예언가처럼 공수가 이루어졌다. 그것을 증명하듯 [거울의 장막]이 속수무책이었다. 튕겨 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반동을 주어 위력이 더해졌다.
‘때마침 이화접목을 사용한다고?’
그런 식의 대응은 상식적이지 않았다. 자신을 가르쳐 준 과외 전문 1타 무인이 말하길,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최소한 초절정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럴 수가 없잖아!’
일개 생도가 초절정, 그러면 교관들은 일찌감치 짐 싸서 집으로 돌아가는 편이 경제적이었다. 내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해도, 깨달음이 초절정인 이상 시간이 해결해 줄 사안이다.
이런!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닌데, 반응이 늦었다. 아래에서 무한대(∞)를 반으로 잘라 놓은 미친 궤적이 목을 노렸다. 저걸 맞는 순간 목이 꺾일 테고, 좀비가 되지 않는 이상 움직이기 힘들 것이다.
어!
갑자기 힘이 샘솟고, 속도가 빨라졌다. 동시에 역풍이 발생했다. 그 즉시 태수는 정신을 차리고 전력으로 물러섰다. 그 어느 때보다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후아아앙!
무진의 발차기는 허무하게 공간을 갈랐다. 목표를 상실한 공간임에도 무처럼 썰리는 예리한 명도를 연상케 했다. 그만큼 파괴력이 집중되어 날카로움을 배가시켰다. 맞았으면 목이 꺾이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 데굴데굴 굴렀을 수도 있었다.
오싹!
스윽!
간신히 듀라한을 피했던 태수는 목을 쓰다듬으며 오싹한 한기를 만끽했다. 정말로 그 순간에 주마등이 스쳤었다. 생사의 간극에서만 나타나는 기적이 생명을 연장해 준 기사회생이었다.
호영을 필두로 5인방이 태수의 곁으로 다가왔다. 태수의 위태로움을 지켜만 보지 않고 개입한 것이다.
“우리가 정말 무시무시한 후배를 뒀구나.”
“합공할 겁니까?”
“당연하지.”
“스텟은 별로인 것 같은데, 까다로운 성격이군요.”
“내 주제를 아는 거지.”
호영의 전투력은 다른 애들보다 떨어진다. 그러나 태수를 제외한 5인방의 전술은 호영의 머리에서 나왔다. 특히 상황에 따른 판단력과 처세술에 관해서는 따를 생도가 많지 않았다.
“태수가 비록 온실 속의 화초긴 해도, 칠대가문이나 대형 길드의 생도가 아니면 괜찮을 줄 알았거든. 확실히 세상은 넓구나.”
“호영아, 명색이 내가 네 주군인데, 자꾸 온실 속의 화초라고 할 거야?”
“화초 맞잖아. 네가 언제 이런 경험을 해 봤겠어!”
“시끄러워! 누가 도와 달라고 했어!”
“넌 하나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어! 쪽팔림은 내가 안고 가마!”
친구 간에도 역할 분담은 확실하게 되어 있었다. 태수가 성질을 부리고 있지만, 이면엔 신뢰가 뒷받침되었다. 방금 도움을 받지 못했으면 창피함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호영이 무진을 날카롭게 주시했다.
“하나만 묻자. 좀 전의 발차기는 살수나 마찬가지였어. 진짜로 죽이려고 한 건 아니겠지?”
“합공할 줄 알았습니다.”
“헐, 1학년이 아니라 닳고 닳은 노련한 헌터구나. 힘든 싸움이 되겠어. 그래도 지금부터는 꽤 다를 거야.”
“그런데도 저는 혼자 왔습니다.”
무진의 응수에 태수와 친구들은 표정이 굳었다.
너희들이 합공을 해도 대결의 승패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숨기지 않았다. 선배의 자존심을 긁는 발언을 더는 묵과할 수 없었다.
차자작!
호영의 지시로 포지셔닝은 완성한 상태였다. 다섯은 연습한 대로 각자의 영역을 맡았다. 일대일은 어려워도, 포지셔닝이 구축된 이상 무진의 약점을 노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