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눈치 싸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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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톡은 하는데, 언스타는 없다. 사진조차 올리지 않았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외계인이었다. 사람이란 게 가끔은 사진을 캐톡에 올려 보고 싶기도 하건만, 흔적을 남기지 않는 용의주도함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것 같으냐!
부계를 파서 다시 뒤져 보았다. 여아이돌과 만나기 위해서 노력했던 솜씨가 어디 가진 않았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낭만이 판을 치는 90년대 삐삐만 차고 다닐 노인네도 아니고. 공중전화 부스를 찾아다니는 거냐?
자신을 소개하고, 자랑하기에 얼마나 좋은 세상이야. 아카데미에서 그토록 허세를 떨던 녀석이 sns를 하지 않다니, 예상보다 더한 강적이었다.
“날 당황시키다니, 놀랍네.”
자존심이 상해서 친추를 취소하려다가 대범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보아라, 내 화려한 인맥을!”
캐톡에 추가해서 인맥을 자랑했다. 사람이라면 호기심에서라도 찾아보기 마련.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공인 헌터의 전화번호와 같이 찍은 사진도 공유했다. 물론, 여아이돌과 찍은 사진을 더 궁금해하겠지만.
검색이 끝날 즘, 태수는 전화를 걸었다.
-통화 중이라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가…… 뚝!
우연의 일치겠지. 그런데도 화가 나는 걸 보면 빌드업이 꽤 치밀했다.
10분을 기다린 후, 통화를 눌렀다.
-왜요?
헉!
보통은 여보세요, 라고 하지 않나? 시티폰 시절 전부터 송수신의 예의였다. 대뜸 왜냐고 물어본다면 말문이 막히는 것도 인지상정이었다.
“선배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지수, 유정, 혜진이하고 밥 먹고 있습니다.
“아, 그럼 실례했다……가 아니고. 그딴 식으로 문자를 보내는 놈이 어디 있어?”
-의심이 많군요. 아니면 겁이 많거나.
“도발하는 솜씨가 제법이다만, 나한테는 안 통해!”
-목소리에 화가 나 있는데요.
“기분 탓이야!”
지수, 유정, 혜진은 아카데미의 예비 여신 후보에 들 만한 외모였다. 평소 같이 다니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늦은 시간에 같이 저녁을 먹고 있다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엇나가는 후배를 위해서라도, 선배로서 단단히 충고해야 했다. 너는 두 살이나 어리니, 선배한테 양보하는 미덕을 배우라는.
-그냥 친굽니다.
“칫, 누가 뭐래?”
-화가 누그러졌군요.
“야, 인마!”
전화 통화만으로 울화가 치밀기는 처음인 태수였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고도의 심리전을 쓰고 있었다. 1학년 주제에 벌써부터 선배의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고 했다.
-경호원은 데리고 오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날 어떻게 보고.”
-준비는 철저히 해야 할 겁니다. 후배한테 처맞으면 굉장히 쪽팔릴 테니까요.
“겁이 없어도 너무 없구나. 좋아! 배부르도록 처맞고도 그리 뻗댈 수 있는지 보자!”
날짜, 시간, 장소를 정하고 끝내려는데,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호구……는 아니고, 몰라도 되는 사람.
-그런데 왜 싸워?
-싸우는 거 아니고, 타이르는 거야.
졸지에 무명인으로 전락한 태수는 부르르! 떨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었다.
-뚝!
이 새끼가!
명백한 고의였다. 그런데 증거가 없다.
분노를 추스른 태수는 친구들을 불렀다. 경호원은 데리고 가지 않는다. 이번 기회에 선배의 위엄을 확실하게 보여 주기로 했다.
“건방진 새끼, 임플란트 빼고 잘근잘근 씹어 먹어 주마!”
***
별일 아닌 일에 심력을 쏟는 것 같으나, 무진은 지수가 말해 준 미래가 걸렸다. 성운 그룹 산하의 성운 길드가 창립되었고, 규모와 영향력이 상당했다고 한다.
‘뭔가 있나?’
특성이 있거나, 음모가 있거나.
재벌이라고 해서 대형 길드나 칠대가문과 척을 져서 좋을 건 없다. 헌터는 재력만으로 찍어 누를 수 있는 일반인과는 다른 존재다.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래서 정부, 가문, 길드가 연합해서 암묵적인 룰을 협의했다.
‘각성의 시대 초창기면 몰라도.’
초창기 던전이 열리고, 헌터들이 주먹구구식으로 난립할 때와 달리 이제는 체계가 잡혀 있었다. 대형 길드와 칠대가문이 헌터계를 양분했다. 중소형 길드를 창립하는 정도야 선순환으로 볼 수 있겠지만, 칠대가문이나 대형 길드와 자웅을 겨루기는 어렵다.
‘아카데미 생도를 포섭해서 헌터로 육성하긴 너무 오래 걸리고, 공작급 이상의 헌터를 스카우트하기도 난제일 텐데.’
칠대가문과 대형 길드가 최상위 생도나 헌터를 수수방관하진 않을 테고. 그러한 견제를 뚫고, 대형 길드를 설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도 웃기네.’
아버지가 길드의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만약 자신이 아카데미에 가지 않았다면 진 회장과 독대하지 않았을 터. 결과적으로 성운 길드는 창립이 된다. 방해하든, 하지 않든 미래는 변하지 않았다.
‘나비효과만 조심해서 될 일이 아니구나.’
회귀운명론.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고 해야 하나? 영화나 드라마에서 패턴처럼 사용하던 플롯이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미래가 바뀌지 않는 정해진 운명처럼. 설상가상으로 과거를 잘못 건드리면 이상한 방향으로 나비효과만 증폭되어 버린다.
회귀만능설의 궤변인가?
‘만나 보면 확실해지겠지.’
만남의 장소는 지수의 비밀 장소 중 하나였다. 100개 이상 알고 있다고 본인은 주장하지만, 건망증이 심해 신뢰하진 않았다.
장소는 송도 인천상륙작전 기념관 뒤쪽에 있었다. 사람이 지나는 등산로에서 벗어나 바위틈으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공간이 되는데, 던전 경계의 일종인 던전 틈새였다.
무진은 기념관의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상기할수록 또라이 새끼네.”
“조용히 말해.”
“너만 들리게 말했어.”
“입 냄새가 나니까, 10보 옆으로 안 가면 처맞는다.”
화창하고 맑은 일요일. 전쟁기념관이 인기 많은 놀이공원은 아닐지라도, 가끔 데이트 코스가 되긴 했다. 처음에는 장난치는 줄 알고 다시 걸었었다.
-이 장소가 맞는 거냐?
-맞다고 했잖아.
-했잖아는 반말이고!
-했습니다.
마지막엔 예의를 차려서 봐주려고 했는데, 통화가 먼저 끊겼다. 이 망할 놈의 후배 새끼는 예쁘게 봐 주려고 해도, 도무지 봐 줄 수가 없다.
지금도 봐라.
약속 시각이 무려 30분이나 지났다. 찬물도 위아래…… 어쨌든 선배를 기다리게 하고 있었다.
“여친도 5분을 기다리지 않는데.”
“미안하지만 태수야, 어떻게 된 재벌이 여자 친구가 없냐? 재벌도 모태솔로가 있다니 존나 신기하다.”
“……이 새끼가, 나 아이돌하고 찍은 거 못 봤어?”
“봤지, 근데 뭐?”
다른 때는 가볍게 웃어 넘기던 호영이 이번에는 정색하고선 물었다. 말투에 농담이 섞이지 않아서 태수의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너도 없잖아.”
“나 있는데.”
“……거짓말.”
“거짓말을 왜 해. 자, 봐.”
같이 찍은 사진이 있다. 그것도 딥키스를 하는. 저 발가락보다 더러운 입에 키스하다니, 태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비위였다. 여자 친구가 전생에 나라를 팔았나? 이완용도 울고 갈, 최소 세 번은 팔각이다.
아, 씨발!
못생겼으면 이해하려고 하는데, 제법 예쁘장하고 귀엽게 생겼다. 저런 애가 왜 이딴 놈하고 사귀지? 그런 의문이 생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갑자기 자존심이 확! 상한다. 순결주의자는 절대 아닌데.
“협박했지?”
“얘들도 다 같이 만났는데 뭔 소리야.”
“잠깐! 그런데 나는 왜 몰랐지?”
“전에 소개팅 시켜 준다고 하니까, 싫다고 했잖아.”
“아, 그랬네.”
쓰벌, 저 정도인 줄 몰랐지. 너 얼굴을 봐라. 소개팅 받고 싶나. 전혀 이해가 안 되는 피지컬 극강의 개그상인데, 인기가 있었다니. 개그맨 와이프가 미인이 많은 이유가 있는 건가? 아무리 재밌어도, 저 얼굴을 자고 일어난 침대에서 보면 화날 텐데.
‘솔직히 재미도 없잖아!’
태수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과 마주했다. 같이 다니기 바빴던 호영이 자신도 모르게 알콩달콩 연애하고 있었다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천재지변이었다.
한숨을 쉬던 5인방 중 전희수가 나섰다.
“소개 안 받는 게 나아.”
“어째서?”
“걔 빼고 다 이상해.”
“해 봤냐?”
“안 본 네 눈 사고 싶다. 이 자식이 자기 빼고 폭탄을 돌렸더라고. 우리가 그날 얼마나 고생했는데. 먹기는 또 얼마나 많이 먹는지.”
전희수, 박재진, 조산림, 채영기는 4 대 4 소개팅에서 크게 덴 이후로 한동안 여자 보기를 돌같이 했었다. 다행히 지금은 황금처럼 보게 되었다.
“얘들아,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어.”
“우리 호영이가 상황 파악을 못 하네. 일단 묻자. 그리고 비 온 뒤에 다시 보자.”
그제야 만족한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호영이 이 자식을 만나는 여자 친구도 제정신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끼리끼리, 유유상종……은 아니고.
호영이 때문에 대화의 흐름이 이상해졌지만, 본래의 목적지로 도착해야 했다.
“혹시 수 쓰는 건 아니겠지?”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데서 수를 쓴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냐.”
“그래서 더 열 받아. 이 자식은 대체 뭘 믿고 뻗대는 거지?”
“솔직히 그만한 실력은 되잖아. 배경도 권왕가면 어마어마하고.”
“너 대체 누구 편이야?”
“나야 당연히 우리의 주군이신 진태수의 따까리지.”
주제 파악은 겁나 빠르네.
친구들 모두가 말 더럽게 안 듣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위계 서열을 지켰다. 태수가 말하기 전에 다들 알아서 적재적소로 행동했다. 빈틈이 많아 보이는 모습은 편견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다면 태수는 진작 인연을 끊었다. 냉정할 수도 있으나, 서로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면 친구는 하지 않는 편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씨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기 온다.”
언덕길을 느긋하게 걸어오는 무진이 보였다.
태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검은색 쿨티에 청바지를 입었을 뿐인데, 핏이 살아 있었다. 전신에서 퍼져 나오는 여유가 주변의 시선을 끌었다. 잘생겼다고 할 순 없지만, 남자다운 거친 야생미가 있었다.
“너 이 자식, 시간관념이 없는 거냐?”
“주변을 둘러볼 시간을 준 겁니다.”
“둘러댄다고 해서 약속 시각을 어긴 사실이 지워지진 않아!”
“저도 선배가 어찌하나 지켜봤을 뿐입니다. 상원아, 이제 가 봐도 좋아.”
건너편에서 어린이날 애들처럼 풍선을 들고 선 상원이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고 있었다. 지나치게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다들 눈치채지 못했었다.
“무진아! 나, 이거 시키려고 부른 거야?”
“당연하지.”
“유정이는?”
“집에 있겠지.”
상원은 머뭇거리다가 썩은 미소를 지었다. 유정이가 나오는 줄 알고, 헬리콥터 모자에 잔뜩 멋을 부렸거늘. 전화라도 하고 올 걸 그랬다.
“유정이 전화번호라도 줘.”
“스토커로 신고당해.”
“우리 같이 다닌 지 5개월이잖아.”
“안됐네.”
“키는?”
“아버님의 컬렉션을 가져와.”
“날 죽일 심산이야!”
상원은 뭘 해도 무진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에 치를 떨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갑질인가? 아쉬울 게 없으니 저리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컬렉션을 훔치다 걸리면, 제삿날이 그날이 된다.
상원은 유정이가 나오지 않아서 서운하긴 해도, 사나이로서 우정을 지키기로 했다.
“나도 같이 가.”
“선배들 패러 가는 건데, 오려고?”
“……아, 약속이 있었구나.”
궁금했는데, 이제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우정은 무슨! 상원은 신속히 자리를 벗어났다. 혹시나 잡을까 봐, 가속 마법까지 시전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가공할 속도였다.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인상과 달리 상원이도 상위 서열에 있었다.
헐!
어쩌다 병풍이 된 태수와 친구들은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 자기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아예 대놓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걸 보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뻔뻔했다.
정신 사나운 가운데서도 태수는 감정을 누그러뜨렸다. 사람 지나다니는 거리에서 성질부리다 인터넷에 오르락내리락하면 좋지 않았다. 일단은 인적이 드문 장소를 찾아야 했다. 후배의 참교육을 위해서 숨을 골랐다.
“잰 뭐 하는 놈이야?”
“호영 선배와 같은 포지션입니다.”
“쓸모없는 놈이 분량만 차지하는구나.”
“이하 동문입니다.”
발끈하는 호영을 친구 4명이 사지를 잡았다. 바동거려도 친구들은 놔두지 않았다.
“내가 인마, 태수랑 고무줄놀이도 하고, 끊기도 하고 마~~~! 공기놀이도 하고, 같이 똥도 싸고 다 했어!”
“그건 우리도 몰랐…… 어서 입 막자!”
친구들이 급히 호영의 자유분방한 입을 막았다. 혹여 새어 나올 수도 있기에 신던 양말을 사용했다. 어차피 양말이나 입이나 더러운 건 매한가지였다.
“가죠.”
“오냐, 넌 죽었어!”
무진은 기념관의 계단을 올랐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뒤로 돌아서 6m쯤 되는 담벼락을 넘었다.
태수와 친구들도 따랐다.
기념관 뒤쪽의 산봉우리를 향해 걷다가 수풀로 돌아간 후, 바위지대가 나오는 능선에 멈춰 섰다.
“여깁니다.”
“이건 설마 던전 틈새?”
“알아보는군요.”
“이런 걸 잘도 찾아냈구나.”
포괄적으로 던전 경계일지라도, 틈새를 찾기는 어렵다. 던전이 오픈될 때처럼 마나의 흔적이 남아 있지도 않고, 대다수의 던전 틈새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없어졌다.
“제가 보내는 신호를 따라와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함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드러내 놓고 함정을 파는 경우가 어디 있어?”
“그마저도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라면요? 용기가 있다면 따라오세요.”
“오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이처럼 판단하기 어려운 후배 새끼는 태수로선 처음 보았다. 게다가 다짜고짜 시비를 거는 것부터가 상식적이지 않았다.
무진은 쉬지 않고 도발했다.
“용기가 없나 보군.”
“오냐, 얼마나 대단한 함정이 있는지 기대하마!”
태수와 친구들은 던전 틈새로 들어갔다. 던전 틈새를 발견해도 모르고 지나치는 또 다른 이유는 비틀어진 흐름 때문이다. 감각이 예민한 각성자가 아니고서는 비틀린 흐름의 규칙을 찾아내기 어렵다. 일반인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는커녕, 도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