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동기부여(3)
스륵!
주먹으로 공기를 밀듯이 뻗었을 뿐이거늘, 연무장의 벽면이 관통한다. 권의 극한, 심권에 도달했다. 의지만으로 공간을 장악하는 경지였다. 이 안에서 자신은 천하무적을 자신했다.
“고맙구나.”
“다 제 덕입니다.”
“내 제자라면 응당 그래야지.”
“아무렴요.”
공은 나누지 않는다. 무진의 당당한 태도가 권왕을 흡족하게 했다. 따지고 보면 지금은 뭘 해도 예쁜 내 제자였다. 광화문에서 똥을 싸지 않는 이상 외면하지 않는다.
“이만하면 세계 10대 초인과 겨루어 봐도 되겠는걸.”
“당장은 미루었으면 합니다.”
“어째서?”
“지수의 앞날을 위해서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치워야 합니다.”
무진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지수는 당분간 지켜보자고 했지만,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다. 이럴 때일수록 직선적이어야 했다. 의도를 곡해하는 것 자체가 불신의 씨앗이 될 수 있었다.
크흠.
권왕의 눈매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좋았던 기분이 삽시간에 가라앉는다. 그에 따라 연무장의 중력이 몇 배로 증가했다. 다른 일도 아니고, 가족이기에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선을 넘는구나.”
“저는 사부님의 제자이자, 지수의 친구입니다. 그러니 선을 좀 넘어도 됩니다.”
“허, 너무 막 갖다 붙이는 거 아니냐!”
“그래서, 아닙니까?”
무진이 진지하게 묻자, 화를 내던 권왕은 궁색해졌다. 이렇게까지 정색하고 물어봤으니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군사부일체를 거론한 이상, 권왕으로선 답이 정해져 있었다.
“가족에겐 신뢰가 중요한 법이다.”
“일방적 신뢰란 언제나 탈이 나기 마련입니다. 일례로 지철과 지연은 지수에게 열등감이 큽니다. 지수를 끌어내리려고 암수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그래.”
“저는 생일이 더 느립니다.”
헙!
내가 더 어리다는 제자의 반박에 권왕은 허를 찔렸다. 맞는 말인데, 여태 그런 생각을 해 보지도 않았다. 워낙 애늙은이 같은 구석이 있어서 열일곱 살인 것을 까먹고 있었다. 더욱이 방금의 깨달음을 상기하면 할수록, 제자 녀석은 최소 천 년 묵은 요물이었다.
“일전에 백무대의 부대주는 저를 시험해 보더군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백무대의 부대주 유지호의 속셈을 무진은 간파하고 있었다. 방해될 소지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없다고 판단이 되자 지철과 지연에게 맡겼었다. 진의를 드러냈다면 유지호는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심증일 뿐이지 않더냐?”
“내기하실래요?”
끄응!
무진은 아카데미 마인과 연관하여 이 일련의 사건들을 하나로 연결했다. 그러자 그럴듯한 가정이 윤곽을 드러내며 권왕을 압박했다. 단순히 심증으로 치부하기에는 무섭도록 직관적이고, 선명하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섭니다. 저도 제 예상이 틀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확신을 하면서 아니기를 바라다니, 심보가 아주 고약하구나.”
제자의 의도가 괘씸하기는 해도, 권왕은 부정하지 못했다. 한편으로 둘째가 선을 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제부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면 되었다.
사부의 안일한 속내를 무진은 꿰뚫고 있었다. 그렇다고 더 밀어붙이면 역효과를 일으킬 소지가 다분했다. 어떤 일이든 단계적인 빌드업이 필요한 법이다.
“사부님, 지수와 대련을 하겠습니다.”
“갑자기?”
“아카데미에서 못 가렸던 승패를 가리고 싶습니다. 제자의 바람을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대체 무슨 꿍꿍이냐?”
“저는 악의나 꿍꿍이를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사부님의 하나뿐인 순수한 제자입니다.”
의혹은 부풀리고, 가족은 해체하려고 했으면서.
제자의 뻔뻔함에 권왕은 헛바람이 나올 뻔했다. 오늘 하루 천당과 지옥을 오고 가게 하고선. 살면서 무진만큼 특출 나면서도 여우 같은 녀석은 만나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음흉하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솔직하다.
“사부님의 성좌는 누군가요?”
“나, 디스트로. 전쟁의 지배자라는데 내가 보기엔 그냥 전쟁광이지.”
“그래서 얼마나 좋아졌는데요?”
“기본적으로 속성과 능력치가 배로 늘어나. 잠재력에 따라 비율이 달라지긴 해도.”
지수는 본인의 전투력이 전성기 때와 거의 비슷하다고 했다. 그 말은 앞으로 최소한 2배 이상으로 강해질 여지가 있다는 뜻이 되었다.
‘어쩐다?’
성좌를 선택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 아직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문제는 무턱대고 선택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스텟을 2배 가까이 늘려 주는데 선택하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성좌를 증폭기라고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뿐인가? 개별 퀘스트를 달성하면 보상까지 준다.
‘한데, 너무 좋기만 하잖아.’
자고로 공짜는 없다고 했다.
***
권왕가의 대연무장.
무인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권왕이 지수와 무진의 대결을 대연무장에서 하겠다고 공표하자, 하던 일을 멈추고 연무장을 채웠다.
“뜬금없이 대결을 왜 하는 건데?”
“서열전에서 못다 한 승부를 보겠다는 거지.”
“둘이 사귀는 거 아니었어?”
“연인은 연인, 무인은 무인이지.”
가내에선 둘의 관계를 친구 이상으로 보고 있었다. 아카데미를 같이 다니기도 하고, 마법이긴 해도 전대 가주의 수제자였다. 한 가족이 될 수도 있기에 이번 대결에 관심이 컸다.
현모양처를 맞이할 것인가, 퐁퐁남이 될 것인가?
내기가 성행했다.
“다퉜나?”
“서열전 1위가 아쉽기는 하지.”
“대범하지 못한 녀석이구먼.”
“승부는 승부야!”
서열전의 양보를 당연하다고 보는 부류와 무인이라면 끝까지 승부를 냈어야 한다는 부류로 나뉘었다. 다른 문파나 가문이라면 전자가 맞겠지만, 권왕가는 후자가 더 많았다.
열혈의 승부사들, 권왕가가 다른 가문과 유독 섞이지 못하는 이유였다. 냉철해야 할 때 불같은 성향으로 효율보다는 무인의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뜻이 같으면 이보다 든든한 아군이 없으나, 반대되면 아주 속이 터지는 족속들이다.
“그나저나 누가 이기려나?”
“지수는 생도의 수준이 아니라고.”
“쟤도 만만치 않잖아. 전에 보여 준 것도 있고.”
“그래 봤자 애송이들이지.”
백무대에 속하기는 했어도 남우철, 백상호, 김태기는 후보군에 불과했다. 물론, 권왕가에 들어온 이상 아무나 뽑지는 않을 테니, 무진의 실력을 깎아내리지는 않았다.
대연무장의 구석에 선 남우철, 백상호, 김태기는 인상을 구겼다. 그날 이후로 백무대에서 평가가 박해졌다. 올라갈 기회는커녕, 앞날이 깜깜하다.
칫!
하극상이 분명하지만, 권왕가는 힘센 놈이 장땡이었다. 졌으면 구질구질하게 행동하지 말고 수련이나 열심히 해야 했다. 그러나 사람인지라 앙금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방심한 거라고!’
‘다시 하면 달라!’
‘두고 보자!’
포기하지 않는 정신, 권왕가답기는 했다. 그때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 절치부심했기에 자신감이 붙었다. 처음부터 무공과 속성을 전력으로 썼다면 허무하게 당하진 않았다.
흑무대, 백무대, 적무대의 대원들도 연무장에 있었다. 일전에 심판을 봤었던 석경환 대주도 모습을 비쳤다.
전과 달리 사람도 많았고, 이들이야말로 권왕가의 정예였다. 권왕가의 무인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삼대를 다스리는 자가 권왕가의 주인이란 말이 괜히 나오지 않았다.
하아!
대연무장의 중심에 선 지수는 한숨을 가렸다. 집에 오기 전에도 일방적으로 깨졌다. 이제는 쉬나 했더니, 집에 와서도 대련을 하게 되었다.
이거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승패는 뻔한 데다, 결국 광대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무진의 의도를 알기에 답답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해야지.’
‘남의 집이라고.’
‘그러니까.’
지수는 무진의 냉철한 판단에 괜히 화가 났다. 자기 가족이 아니라고 함부로 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무진의 계획을 반대하기엔 무공도, 명분도 역부족이었다.
‘아니면 각오해.’
‘너도 의심했잖아.’
‘차차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어.’
‘시간을 끌어서 될 일은 아냐.’
무진은 전부 말해 주지 않았다. 이는 지수를 신뢰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알아내기를 바라서다. 지금도 대략적으론 알고 있으니, 외면하지 않으면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시작해 보거라.”
권왕의 선포로 무진과 지수의 권공이 불을 뿜었다. 초반부터 내외력을 아끼지 않고 쏟아붓는다.
퍼퍼펑, 화르르!
지수의 권기에 다들 놀라고 있었다. 단순히 권기를 발출할 수 있어서가 아닌, 완성도 높은 밀도와 파괴력에 감탄했다. 저 나이 때에서는 보여 주기 힘든 능수능란한 기의 운용이었다.
파파파팟, 타아앗!
권폭이 연이어 터진다.
무진과 지수의 그림자가 반대편에 나타났다. 어느새 5m의 공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냈다. 속도 역시 보통이 아님을 보여 준다. 파괴력에만 치우치지 않고, 권왕가의 권공을 전투에 녹여 냈다.
“허, 저 정도일 줄이야!”
“서열전의 1등이 우연이 아니구나!”
“우연은커녕 역대 1위라고 봐야지!”
“저 녀석도 대단한데.”
폭발적인 파괴력과 신속이었다. 분명 지수의 권공은 생도 수준에서 감당하기엔 벅찼다. 이를 뒤처지지 않으면서 막아 내는 무진의 권공에 다들 소름이 돋았다.
“저번보다 더욱 완벽해졌군!”
“올해의 생도들은 지옥 같겠어!”
“저게 어떻게 1학년이야!”
무진의 대응은 빈틈이 없었다. 내력과 속도에서 뒤처진다고 했지만, 이화접목과 보법으로 상쇄했다.
내력, 외력, 와류, 전사를 이용한 거리 싸움에 혀를 내둘렀다. 지수의 공격도 완벽했다고 생각했는데, 무진과 비교하니 틈이 있었다.
압축, 발경.
궤적이 완성되었다. 공격을 2, 방어를 8에 두던 무진이 공세로 전환했다. 그 일련의 동작이 너무나 깔끔해서 마치 하나로 이어진 무공처럼 보인다.
꽈아아앙, 후아아아앙!
츠으으으으!
내력, 신력, 전사가 결합하여 완성된 권경이 대연무장을 뒤흔들었다. 권기, 권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타점의 완성도가 남달랐다. 공기가 타들어 가면서 열기가 발출되었다. 귀를 찢는 권파가 정신마저 뒤흔든다.
휘릭!
흘렸다.
지수는 무진의 막강한 권경을 흩어 내고, 반동을 이용해서 사각으로 돌아섰다.
슈웅, 쩌어엉!
내지른 일격, 점과 점을 이으며 날카로운 선이 되었다. 면을 줄이고 줄여 압축했기에 관통력이 극대화되었다.
파아아앗!
무진은 물러서지 않고 회전하여 지수의 권을 팔꿈치로 쳐 낸다. 회심의 일수를 펼치고 난 후에도 방심은커녕 공수가 완벽했다.
착!
지수도 일수로 끝내지 않았다. 내지른 권을 회수하지 않고 팔꿈치를 뱀처럼 타고 들어가서 목을 노렸다.
사르르르!
독사출동을 알아챈 무진이 상체를 꿈틀대며 밀어낸다. 생겨난 1cm의 틈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슈슈슈슝!
짧게 끊어지는 단타.
위력이 없어야 하거늘, 그 짧은 거리에 온전히 힘을 실었는지, 피했음에도 공기를 치는 굉음이 울린다.
“요나, 분무 수압.”
-요나!
애초에 타격을 입힐 거라 자신하지 않았다. 회피할 공간에 요나를 배치하여 물을 안개처럼 분사시켰다. 공기에 압력을 가해 지수의 호흡과 중력을 교란했다.
“……저럴 수가!”
“정령술까지 쓸 줄 아는 거야?”
“저런 말도 안 되는!”
화염마도를 계승했고, 저번에도 사용했기에 마법을 쓸 줄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정령술까지 썼다. 단순히 사용하는 데만 그쳤다면 모를까, 정령과의 유기적인 움직임이 실로 놀라웠다.
“정령전투술이 거의 상급 정령사와 맞먹는군.”
“내력과 속도가 부족하기는 어디가?”
“그건 투자 대비 효율성을 말하는 걸세.”
“아, 그런가!”
대주들은 무진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내력과 속도의 부족을 만회하고도 남았다. 특히 부족한 내력은 꽤 보완되었다. 생도들이 가타부타 말을 하기에는, 레벨 차이가 심했다.
그래도 부족한 점을 찾자면, 떨어지는 효율성이었다. 만년삼왕을 먹었다면 진작 3갑자는 돼야 했었다.
‘정령사로서의 자질이 더 뛰어난 건가?’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질을 고려하면 하급 정령으론 어림도 없었다. 최소한 중급 정령에 올라서야 했다. 정령사의 레벨이 시간보다는 친화력에 있다고는 해도, 1학기 만에 중급 정령사가 되었다면 가볍게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