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동기부여(2)
드륵!
문이 열리며 연무장으로 무진이 들어왔다.
지철과 지연은 움찔하기는 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온다고 사전에 문자를 보냈었다. 문자는 읽은 후 지웠다. 무진과 메시지를 주고받은 사실은 절대 들켜선 안 된다.
“남매가 보기 좋네.”
“너도 지수와 보기 좋아 보여.”
“당연히 친구로서겠지?”
“물론이야.”
“그러고 보면 난 죄 많은 남자야.”
연기하는 건지, 진심인지 헷갈리게 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면서 지수와 허구한 날 붙어 다니는 건 대체 뭔데?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다고.
“여사친, 남사친 알지?”
“요새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
“알고 있으니 다행이네.”
“혹시 그거 물어보려고 우릴 부른 거야?”
“그렇다면?”
내가 아무 때나 부르면 안 되냐는 듯이 묻자, 지철과 지연은 대답이 궁색해졌다.
이딴 일로 불러 세우고 지나치게 당당해서 어처구니가 없다. 반대로 해석하면 내 맘대로 해도 너희들이 뭘 어쩔 거냐는 뜻이 함축되었다.
“약속은 지킨다니까.”
“그건 당연한 거고.”
“우리가 뭘 해 주기를 바라는 건데?”
“확실히 지철 선배보다는 눈치는 빠르네.”
반박하려던 지철은 입을 다물었다. 동생을 판 몹쓸 놈이 된 이상, 호소해 봤자 본전도 뽑지 못했다.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그래도 너희들에겐 아주 수월한 일이기도 해.”
“큰오빠를 감시하는 거야?”
“그래.”
“난 작은오빠와 달라!”
이번에도 지철은 반박하려고 했으나, 전적이 발목을 잡았다. 지연이 고개 빳빳이 들고 항변할수록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졌다.
“너희들 춘부장도 감시해 줬으면 좋겠어.”
“……그걸 말이라고!”
무진의 공손한 요구에 지철과 지연은 이를 갈았다. 한 번 팔았으니, 두 번은 쉽다는 건가? 그래도 이건 너무하는 것 아닌가. 가족을 팔아서 전부 해체시켜 놓을 심산이 아니고서야.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춘부장께서 가문을 원하니까. 너희들도 알고 있었을 텐데.”
“가문의 일이야, 네가 관여할 사안은 아니잖아.”
“아니기는, 그러려면 사부님을 노려야 하는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사부님이 사라지지 않고서는 춘부장께선 가주가 될 수 없어.”
지수로선 차마 전하지 못한 말이었을 것이다. 무진은 남이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너희들의 감정 따윈 상관하지 않겠다는 냉혹함이었다. 사실 춘부장으로 높여 부르지만, 그래 봤자 남의 가족사였다.
“설령 아버지가 그런 마음이 있더라도, 할아버지는 모두가 인정하는 권왕이야! 싸움 자체가 성립하지 않아!”
“일반적으론 그렇지만, 아들에 대한 믿음이 워낙 강하셔서 말이지.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힐 수도 있고. 아카데미 사태처럼 마인과 공조했을지 누가 알아?”
“……헉!”
지철과 지연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아버지의 욕망을 모르지 않았다. 자신들도 아버지가 가주가 되기를 바랐었고.
그래도 그렇지, 할아버지를 노리지도, 마인을 끌어들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건 가문을 저버리는 행위이며, 패륜이었다.
“도가 지나치잖아!”
“가족이라고 다 안다고 자신하지 마. 정 그렇게 내 말을 부정하고 싶으면 거짓이라는 증거를 찾아.”
지연은 단순한 엄포로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모르는 일면을 무진이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진짜일까?’
아버지와 큰오빠의 야심을 알기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자신은 어찌해야 할까? 아버지와 큰오빠의 편을 들어야 하나? 혼란이 앞섰다. 지수가 못마땅하긴 해도, 지켜야 할 선은 있었다.
“이대로 네 터무니없는 의심을 아버지에게 고변하면 어쩔 건데?”
“반대로 의혹이 아닌 사실이면 너희들은 어쩔 거지? 가문을 위해서 가족을 버릴 수 있을까? 사람은 다 똑같아. 내가 언급하지 않았으면 너희들은 결국 가문을 저버리겠지. 안 그래?”
무진의 확신에 찬 선언에도 지연과 지철은 반박하지 못했다. 아니라고 하기엔 아버지와 큰오빠가 두려웠다. 더욱이 아버지의 야심이 성공한다면 자신들은 지수의 위에 설 수 있었다.
‘무언가 알고 있는 거야?’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도 알고 있을까?’
그렇다면 아버지의 야망이 성공하기는커녕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가문 내의 일로 끝이 난다면 다행이나,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할아버지를 노린다면?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려운 범주였다.
“공정한 경쟁이라면 사부님도 받아들이겠지만, 아니라면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거야.”
“그래서 우리보고 어쩌라는 거야?”
“그건 너희들의 몫이지.”
“이러려고 우리를 끌어들였구나!”
“당연하지.”
부정하기는커녕 지나치게 솔직했다. 이러면 숨겨진 의도가 있다고 볼 수도 없다. 의심스러우니 감시하는 거고,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그 전에 자진 신고해서 광명 찾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거.”
무진은 인벤토리에서 헬 소드를 꺼냈다.
스르렁!
검집에서 나온 검신의 예기가 지연과 지철의 모골을 송연하게 했다. 딱 봐도 예사롭지 않은 검이었다.
“교장 선생님이 주셨어. 너희들도 알지? 아더왕의 검.”
“보고의 칠대 불가사의잖아!”
“자, 구경이나 해 봐.”
무진이 내어 주자 얼떨결에 검을 잡은 지철과 지연이었다. 잡아 보니 검의 능력이 전해졌다. 전 스텟을 10씩 올려 주었다. 아더왕의 검답게 s급 장비였다.
“이제 이리 내.”
무진은 검을 회수한 후 인벤토리에 넣었다.
가족을 고발하라고 하더니, 갑자기 검을 꺼내서 보여 준 연유를 도저히 모르겠다.
지연이 물었다.
“이게 무슨 뜻이야?”
“나 검 있다고.”
“설마 자랑하려고 꺼낸 건 아니지?”
“정답.”
무진의 기세등등한 태도에 지연과 지철은 골이 지끈거렸다.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똑똑한 건 맞는데, 이상한 놈이었다.
“사전에 자백하면 정상참작이 될 테지만, 선을 넘으면 이 검으로 목을 베어 버릴 거야.”
“……무슨!!”
“정색하기는, 농담이야. 내가 설마 그러겠어?”
할 말을 마친 무진은 연무장을 나왔다.
지연과 지철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적이 감도는 연무장 안의 공기가 무겁게만 느껴졌다.
“농담이겠지?”
“자기가 자르진 않겠지.”
농담으로 치부하기에는 사안이 심각했다. 또한, 아버지에게 이실직고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알고 있다면 더더욱.
“개자식!”
분개하는 오빠와 달리 지연은 심사숙고했다. 짜증 나기는 해도, 빠져나갈 구멍을 제시해 주었다. 죽고 살고는 본인의 뜻이지만, 다른 방도는 없었다.
***
‘먹힌 것 같지?’
-그렇습니다.
무진은 남매에게 발칸의 흑마법과 사요공을 시험했다. 심적인 동요와 혼란을 주려고 일부러 솔직하게 답해 주었다. 또한, 헬 소드를 이용해서 금제가 풀렸을 때도 대비를 해 놓았다.
‘고변하는 순간, 백치가 될 수도 있다고?’
-마혼고가 폭발하면 그리될 확률이 높습니다.
‘별거 아니네.’
-……그렇습니다.
무진은 헬 소드를 인벤토리에 넣지 않았다. 아까는 보여 주기 위해서 꺼냈고, 발칸이 안착한 헬 소드는 자동 소환이 가능해졌다.
‘돌아가.’
-예, 주인님.
사부님의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최근 칠대가문의 연합 회의가 있었지만, 사부님하고는 별개의 일이었다. 권왕가의 모든 업무는 가주가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무난하게 잘 돌아가고 있는 걸 보면 지수의 아버님은 대단한 수완가는 맞았다. 다만, 가족의 일에는 빈틈이 보였다.
“사부님, 수제자 왔습니다.”
“부르지 않으면 오지도 않을 셈이냐?”
“친할수록 한 달에 한 번만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 말은 처음 듣는구나.”
“요즘엔 그래요.”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주 보면 서로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이 보이기는 했다. 할 말도 없는데, 매일 보는 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고. 참고로 연인 간에는 헤어지기 좋은 권태기다.
응?
권왕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며칠 되기는 했어도, 변화를 바라기엔 짧은 시일이었다.
“느끼셨군요.”
“어찌 된 거야?”
“7계식이 됐습니다.”
“……허!”
무진의 마력에 권왕은 헛바람이 절로 나왔다. 비범한 녀석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마도사가 되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성장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빠르다. 자신의 제자임에도 솔직히 무서울 정도다. 이게 다 훌륭한 스승 덕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겠지만.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카데미 보고에서 검을 하나 얻었습니다.”
무진은 최대한 사실대로 설명했다. 발칸이 마족이 아닌, 천족으로 둔갑이 되긴 했어도.
하하하하하!
권왕은 제자의 기연에 기꺼운 듯 호탕하게 웃었다. 확실히 뭘 해도 되는 녀석이었다.
“네 복이긴 하다만, 드러낼 때는 아니다.”
“이런, 제가 워낙 낭중지춘데요.”
“제 입으로 그런 말을 하다니, 내 제자답구나.”
“그래서 하는 말인데, 받으세요.”
무진은 사부에게도 지식 전이를 사용했다.
7계식은 사부님과 동급의 경지였다.
다만, 화염마도를 체계적으로 확립한 무진과 달리 사부는 되는대로 주먹구구식이었다. 단숨에 해결하진 못하더라도, 경계를 단계적으로 쌓아 갈 필요는 있었다. 대충 알고 있었던 개념들이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며 초석을 다졌다.
“이런 식으로 운용이 되었던 거군.”
“제법 괜찮죠?”
“괜찮은 정도가 아니지 않느냐.”
“사부님만 좋다면 제자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권왕은 제자가 전해 준 지식이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지녔는지 모르지 않았다. 마법의 어려운 개념을 이처럼 쉽게 풀이해 놓다니, 마도의 경지만 놓고 보면 제자의 성취가 실로 놀랍다. 이미 청출어람의 단계마저 벗어났다. 이쯤 되면 가르친다고 하기도 민망했다.
‘화염마도의 진정한 계승자로구나.’
제자가 마법을 배운다고 할 때만 해도, 요식행위인 줄 알았었다. 이토록 진지하게 몰입하고 있을 줄이야. 그간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어쩌면 자신의 방도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었다.
‘사부님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다를 뿐. 후회하기보다는 사부님만의 길을 가시면 됩니다.’
제자의 메시지 마법에 권왕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다르다는 그 말, 한계를 두고 더는 나아가지 못하기에 테두리 안에 갇혀 있었다. 무공이 아니라서 더더욱 그랬던 것 같았다. 반쯤 장난으로 시작했던 마법이 무공마저 희석시키며 발전을 가로막았었다.
‘나는 권왕이다. 또한, 화염마도의 전승자니라!’
제자에겐 제자의 길이 있듯, 사부에겐 사부만의 길이 있었다. 그 간단한 이치를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않았다. 이제까지의 안일함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우우우우웅!
가부좌를 튼 사부에게서 거대한 기의 파문이 번진다. 새로운 경지에 발을 들이는 탈각이었다. 그 힘의 파장은 가문 전체를 아우르고도 남았으나, 무진은 연무장을 폐관수련장으로 만들었다. 한 줌의 기운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예상대로야.’
사부는 물이 넘치기 직전인 표면장력만 극복하면 되는 단계였다. 다만, 그 한 단계를 넘지 못하고 적지 않은 세월을 보냈었다.
무진은 제자가 될 때부터 지금까지 포석을 깔아 놓았었다. 조금만 넘으면 되는 일이기에 단계적으로 힌트를 주어 벽을 넘을 기반을 완성했다.
‘사부도 좀 하시네요.’
작금의 탈각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순리에는 때가 있듯이, 사부는 자신만의 개성이 마도에 담기면서 무공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위이이잉!
빛의 포화에 가공할 패도가 담겼다. 삼화취정, 오기조원은 이미 겪어 봤기에 빛의 고리를 완성할 따름이다. 연속적으로 이어진 고리는 사부의 머리 위에서 무한의 륜을 형성했다. 우주의 순환을 일부나마 깨닫는 경지였다.
환골탈태의 과정이 극적이진 않았다. 사부의 육체는 완성도가 높았다. 그저 조금 더 전투적으로 변화를 이루었다. 그 조금의 차이가 말도 안 되는 격차를 드러내긴 하지만.
후우우!
번뜩!
기의 고리를 갈무리한 권왕은 눈을 떴다.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자, 삼라만상의 이치가 폭포수처럼 밀려들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