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원수를 사랑하라(2)
뛰어 봤자 벼룩이었다.
무엇보다 무진보다 체력에서 앞서지 못했다. 만년한철 같은 내구력과 에너자이저 같은 지구력은 1학년 생도에게 지옥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젠장, 좀 죽어!”
“지옥창을 튕겨? 그건 아니지?”
“가시밭길에서 평온하면 어떡하자는 거야!”
“도망쳐 봐야 우린 독 안에 든 쥐라고!”
무진의 원패턴은 여전히 막강했다. 깨기만 하면 되는데, 그걸 깨기가 여간 만만치가 않았다. 학년을 높이고, 레벨업을 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시간이 흐르면 따라잡을 수 있다는 희망은 있으나, 현재로선 암담했다.
그건 s반 상위 서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3학년이 되어서 전용 장비 이외에도 자유롭게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다면 또 모를까, 현재로선 답이 안 나왔다.
‘적운길과 이민용이 당한 게 사실이구나.’
‘혼자서 20명을 때려눕혔다더니!’
‘공력이 늘었어?’
‘흡수율이 폐급일 텐데, 영약을 대체 얼마나 처먹은 거야?’
사건의 내막을 대강이나마 아는 생도들은 아까워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정도면 순순히 인정해야 마땅하지만, 무진의 위치가 걸렸다. 서열 2위라곤 하나, 권왕가의 직계도 아닌 지수의 호위무사로 알려졌다. 그 호위무사에게 복날 개 맞듯이 처맞게 된다면 자신들의 처지가 어떻게 되겠는가.
지수도 아닌, 무진에게도 닿지 못하면 가문과 길드에서도 대접받기 힘들어진다. 무작정 달려든다고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현재로선 3위를 노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어졌다.
부족하나마 유정, 상원이 타깃이 되었다. 무진의 파벌을 어떻게든 흩어 놓으려는 생도들의 결기였다. 방학이 가까워질수록 공고해지고 있어서 조급해졌다.
“왜 우리한테만 지랄이야!”
“유정이는 건드리지 마!”
“넌 닥쳐!”
“……도와준 건데.”
유정의 한마디에 쭈구리가 된 상원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서열은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어 보이는 것과 달리 만만치가 않았다.
“이것들아, 어떠냐?”
“나와 유정이는 무적이야!”
“저리 안 꺼져!”
“내가 촛불도 아니고!”
후우우우우우우!
바람의 정령이 상원을 저 멀리 날려 버렸다.
예상대로 상원이는 자존심이 없었다. 날아가고, 또 날아가도 다시 붙는 상원의 구질구질함이 빛을 발했다.
서열이 쭉쭉 올라갔다.
긍정적인 일인데, 유정과 상원은 마냥 좋아할 순 없는 처지였다. 생도들의 결의를 이겨 냈지만, 자의가 아닌 온전한 타의였기 때문이다. 또한, 파벌에서 가장 만만해서 덤벼든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난 처맞는 게 싫다고!’
‘이게 용기는 아니잖아!’
무진에게 하도 처맞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생도들은 아무것도 아닌 쭉정이로 보였다. 어지간히 당하지 않는 이상, 아프지도 않았다. 사람이 맞다 보면 주눅이 들어야 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애들이 개좆밥으로 보여!’
‘보기보다 굉장히 안 센데.’
드디어 무진과 지수의 눈높이를 알게 된 유정과 상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걔들이 우릴 어떻게 보고 있는지 체감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만만해진 반면, 무진과 지수가 불편해졌다. 상식적으로 따져도 걔들은 월반해야 마땅했다.
‘동기들 그만 괴롭혀!’
‘우린 깐부잖아!’
치열한 공조 속 유정은 상원에게 동질감을 느낄 만도 했지만,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상원의 키가 커져야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만큼 상원에게 있어 유정은 가깝지만 아주 먼 그대였다.
“무려 0.1cm나 커졌다고.”
“됐고, 꺼져.”
“이대로만 가도 금방 10cm는 클 거야!”
“알았으니까, 꺼져.”
유정은 상원에게만 난공불락이었다. 무진에게는 그렇게 쉬웠으면서. 전투나 연애나 상대성은 잔인했다.
미남미녀에겐 쉬워 보여도, 흔남흔녀에겐 너무나 먼 당신들이었다.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가 존재하며, 보통 두 번 이상 찍으면 대가리가 찍히는 수가 있었다.
“나 유정이야! 정령가의 금지옥엽 유정이라고!”
“그래, 내 사랑 유…… 컥!”
어제의 아군이 오늘의 적이 되듯 유정과 상원의 결투도 시작되었다. 정령과 혼연일체가 된 유정의 투기에 상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결과가 나와 있는 구도지만, 막상 대결에 들어가면 쉽사리 승부가 나진 않았다.
“거기 안 서!”
“너 같으면 서겠냐!”
“별거 아닌, 바람의 칼날이야.”
“잔상이라 산 거지!”
반으로 쪼개진 본인의 잔상에 상원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유정의 개수작엔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슬쩍 어깨를 내리며 가슴을 모으자 상원은 정신을 못 차렸다. 열일곱 살의 잼미니에겐 버티기 힘든 강도 높은 수위였다.
주르르르!
안 맞았는데, 코피가.
“색골!”
“……아냐!”
유정 win.
서열 정리는 되었다. 모두의 한숨을 쉬게 만드는 결과물이긴 해도, 시작에 불과했다. 다른 반의 고유리와 구동성의 약진도 놀라웠다. 무진에게 지속적으로 처맞으면서도 끈질기게 달라붙었던 생도들이 활약했다.
굴욕적인 광경이나, 배우는 바가 있었다. 혹시나 하고 무진에게 도전하는 생도들도 꽤 나왔었다.
결과적으로 발전은 본인의 몫이었다.
무진은 아무에게나 깨달음을 주지 않았다. 발전 가능성 못지않게 근성과 끈기가 있는 생도를 높게 평가했다.
“제법인데.”
“더더더더, 나는 아직 배가 고파!”
“그래, 그래.”
“이대로 포기하지 않아!”
무진은 도전해 오는 생도들의 투지를 치하해 주며 꼼꼼하게 두들겨 주었다. 잘 처맞을수록 다음에는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일까, 파벌은 더욱더 공고해졌다.
물론, 외적인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무진은 남녀 생도를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두들겼으며, 끈질기게 도전할수록 강도 높게 두들겼다. 그 혹독한 매타작을 이겨 내야만 단맛을 볼 수 있었다. 예상대로 그런 생도는 흔치 않았다. 정련된 맷집을 가진 생도만이 살아남았다.
“맞는 걸 좋아하는 건가?”
“여자의 턱을!”
“저긴 남자의 자존심인데!”
“여자도 저길 맞으면 갈걸!”
무진의 전투 수위는 굉장히 높았다. 19금의 잔인성과 난폭함을 포함했다. 어정쩡한 강단으로는 관전조차 허락하지 않을 잔혹함이었다. 얼마나 대단한지 보려고 왔던 2학년 선배들조차 학을 떼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마조군단.
무진의 파벌을 비하해서 부르는 생도들의 약어였다. 발전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겠다고 다짐하지만, 무진의 폭력성은 각오를 흔들리게 했다. 매 맞는 고통을 인내하며, 발전의 밑거름으로 득도한 생도만이 황홀경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아!
파벌의 구성과 아카데미에 떠도는 소문에 지수는 한숨이 나왔다. 이토록 무식한 방법으로 이만한 규모의 파벌을 조직할 줄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게 말이 돼?’
유정, 상원을 제외한 생도들의 면면을 새삼스럽게 보았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어디서 본 얼굴들이었다. 그때는 워낙 정신이 없었고, 속성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서 까먹고 있었다.
정천우, 장예정, 조영민, 서미나.
이렇게 4명은 차후 신광, 귀검, 백운, 혈총으로 불리게 된다. 4인방은 하나같이 별종들이긴 한데, 사용하는 속성이 만만치가 않았다. 빛을 다루는 정천우, 귀신을 부르는 장예정, 구름을 지배하는 조영민, 백발백중의 마탄을 다루는 서미나까지.
아카데미 시절에는 크게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탑 등반 후 성좌의 증폭기를 받으면서 개화했었다.
그런 4인방이 무진을 만나면서 이른 시기에 잠재력을 선보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수는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얘들 또라이들이었는데.’
무소속에다가 반골 기질이 짙어 칠대가문이나 대형 길드와 번번이 마찰을 빚곤 했었다. 그러다 던전 폭발이 일어나는 날 사체로 발견이 되었었다.
실상, 어떤 세력과 싸웠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려 200구의 시체가 나왔었다. 서로 죽기 살기로 싸웠다는 걸 주변에 찢겨 나간 주검과 부서진 잔해들로 알 수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지.’
암중 세력에서 포섭하려다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자 제거당한 것이다. 200구 모두 상당한 실력을 갖췄음에도, 저들 넷을 죽인 자는 1명이었다.
‘헤라클래스였으니까.’
따지고 보면 지수의 회귀 당시 마지막까지 괴롭혔던 자였다. 코드네임으로 불렸으며 알려진 것보다 훨씬 강했다.
‘원수가 같잖아!’
이렇게 모아 놓으려고 해도 어려울 텐데.
무진은 의도했다기보다는 상황을 유도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지수의 코와 귀를 막히게 했다.
누군 힘들게 돌아와서 어떻게든 암중 세력을 상대하기 위해 피 터지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무진은 마이더스의 손처럼 댔다 하면 손쉽게 풀렸다.
한 번은 우연으로 치부한다고 쳐. 두 번, 세 번 연속해서 잘 풀렸다. 이게 과연 우연이나 운만으로 가능한 일일까?
“어떻게 한 거야?”
“뭐가?”
“쟤들 말이야, 쟤들. 이리 간단히 수그릴 리가 없는데!”
“전적으로 나의 인망 덕이지.”
상원, 유정, 혜진은 고개를 심하게 갸웃거렸다. 해선 안 될 말이었다. 인간망종도 아니고. 도전해 오는 생도마다 헬조선이 그나마 아름답다는 걸 깨닫게 해 주었다. (마조)군단의 통수로서 긍정적으로 살펴보려고 해도, 아닌 건 아니었다.
당연히 지수의 입에서 거친 말이 터져 나왔다.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하여간 노빠꾸야. 말해 줄 테니까 진정 좀 해. 숨길 일도 아니고. 보는 그대로, 패 보니까 답이 나오더라고.”
“팬다고 사람이 되진 않는데!”
“지수는 됐잖아.”
마조군단, 누군지 몰라도 이름 하나는 기똥차게 지었다. 그 말 그대로다. 마조군단의 통수가 모두의 통수를 제대로 치고 있었다. 패 보면 안다니, 그게 사람이 할 소린가? 폭력 근절에 앞장서도 부족할 판국에.
“그러지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
“정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이따가 따로 좀 보자.”
“……대답이 왜 그런 쪽으로 나가. 내가 언제 또 의심했다고 그래.”
“우리 지수가 궁금하면 잠을 못 자지. 내가 꿀잠 자도록 확실하게 풀어 줄게.”
“안 풀어 줘도 잘 자거든!”
친구 간에도 갑과 을은 명확했다. 둘이 대화하다가 누가 을인지 모를 때는, 네가 바로 을인 거다.
무진과 지수의 아옹다옹이 유정, 상원, 혜진에게는 단순 사랑싸움처럼 보였을 테지만, 진실을 혼자만 아는 지수에겐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이 새끼가 작정하면 다음 날도 일어나지를 못한다고!’
다들 자신의 무위가 무진과 비등한 줄 알기에 속이 터졌다. 여기서 나보다 강하다고 한들 결투를 하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었다. 더욱이 구미호도 백 수는 접어줄 무진이 순순히 따라 줄 리 만무하고.
‘내가 숨기자고 했으니 할 말도 없잖아!’
지금도 많이 드러난 축에 속했다. 그럼에도 무진이 선택한 방법이 지수가 보기에도 최적이었다. 적을 속이면서도 활동 폭이 줄어들지 않았다.
‘내가 이러려고 돌아온 게 아닌데!!’
손수 이끌어도 부족한 판국에 지수는 핏덩이한테 일방적으로 끌려다니고 있었다. 부족한 부분이라도 있으면 채워 주기라도 하지, 보조적인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무시하고 나서 봤자, 사태만 더 꼬이고 말았다.
‘애초에 나보다 강한 것도 말이 안 돼!’
지수의 속이 타는 연유였다. 조금만 약했으면 어른으로서 타이를 수도 있을 텐데.
“나는 너에게 감사하고 있어.”
“갑자기?”
“그동안 정체되어 있었거든. 아카데미 오면서 많이 좋아졌어.”
“……그럴 수가!”
정체되었었다니?
지수로선 감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에도 무진은 완전체였다. 레벨업으로 조금씩 성장하는 건 이해가 되나, 무진의 표정을 보니 그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다고?’
무공, 마도, 정령, 테이머, 연금술, 주술에 이어 아카데미의 모든 학부를 경험하고 있었다. 보통은 이도 저도 아닌 과유불급이어야 하는데, 무진에겐 성장의 밑거름이 되고 있었다.
‘잠깐, 이런 식의 결투도?’
아카데미에 오지 않았다면 관심도 없었을 분야가 무진을 개화시키고 있었다. 불과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무진은 한층 더 발전한 것이다.
“패는 이유가 있었어!”
“오해야.”
무진은 어처구니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자기 멋대로 결론 내는 데는 선수였다. 한데,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패 보면 견적이 나왔다. 궁지에 몰리면 짐승이나 사람이나 본성을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무진은 결투를 통해서 생도의 본성과 잠재력을 파악했다. 사전에 언질을 받기는 했어도, 분별하여 인재를 찾아냈다. 동시에 흑무흡정술의 정수를 무진공에 융화하여 생도의 속성을 끄집어냈다.
결투로 강해지는 생도와 별다른 진전을 얻지 못한 생도로 갈리는 연유였다. 그중 위험 분자로 찍힌 생도는 흑무흡정술로 잠재력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1학년은 거의 다 됐고.’
파벌의 규모와 명성을 확장하면서 생도로 숨은 불순분자를 걸러 내려는 의도가 더 강했다. 아군이 아무리 많아도, 숨어 있는 적 하나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때마침 들키지 않을 범위 내에서 사요공을 시험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