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빌드업(2)
지연은 급히 오늘내일매일 사랑하는 꽃미남 아이돌, 강현우를 떠올렸다.
“이번 일 개입했지?”
“……아냐!”
“네 오빠가 다 불었어. 참고로 영상도 있어.”
“……그런!”
치사한 오빠를 봤나?
자기 살자고 여동생을 꼼꼼하게도 팔았네. 어쩐지 시작부터 주먹질을 하더라니, 오빠의 관찰일기를 넘겼을 가능성이 컸다. 오리발을 내밀기에는 증거가 명확했다.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괜찮아. 이번 일 마인이 개입했거든.”
“……?”
이게 안심하라는 거야, 놀래키는 거야?
지연은 병신처럼 눈만 껌뻑껌뻑했다. 전혀 예상도 못 한 판이 되어 있었다. 그저 무진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 한 손을 보탰을 뿐인데. 거기서 마인이 왜 나와?
“마인 둘이 죽고, 연관된 교관이 있었어. 교관은 뒈졌으니 안심해도 돼.”
“……?”
“아 참! 이거 비밀인데. 발설하면 아주 곤란한 일이 발생한다고 했거든. 하지만 넌 공범이니 괜찮겠지.”
“……?”
말하지 마. 왜 말하고 지랄이야!
알고 싶지 않다고!
왜 그딴 걸 친절하게 설명해.
어째서 실패했는지 인과를 파악하게 된 지연은 절규했다. 세상엔 모르는 편이 신상에 이로운 일들이 많았다. 망할 놈의 호기심이 인생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참고로 교장과 철혈십좌도 알고 있지롱.”
“비밀이라며! 제발 그만해!”
“미안, 이놈의 입이 방정이야. 어쩌겠어. 이미 말했는데. 게다가 넌 마인과 한편이잖아.”
“……아니야!”
정말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었다. 마인과 한편이라니, 퇴학을 걱정하는 선을 넘어선다.
설상가상으로 사람이 죽었다는데 신나서 떠벌리는 미친놈이 눈앞에 있었다. 정상적인 놈은 아닌 줄 알았지만, 상식을 초월했다.
‘왜 이런 놈과 만나는 거야?’
지수를 건드리면 위험할 것 같아서 무진을 노렸었다. 그런데 이놈이 숨겨진 차르 봄바였다. 둔해 보이는 각진 외모는 사람을 속이기 위한 위장 전술이었다. 실제는 뱀보다 교활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래서 무섭다.
철저히 무진이 만든 판에서 놀아났다. 이런 녀석을 이겨 보겠다고 설쳤었다니, 주제 파악을 못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은 거짓이 아닌 사실일 확률이 높다. 빠져나갈 구석이라곤 보이지 않는 수렁이었다.
“마인과 공조한 데다가, 제3 세력과 결탁했다면 어떻게 되려나?”
“나는 모르는 일이야!”
“모른다고 죄가 아닌 건 아니지.”
“제발! 모른 체해 줘. 뭐든지 다 할게!”
공개되는 즉시 지연의 인생은 끝난다. 그건 너무 억울하다. 살아서 떳떳하게 밝은 세상을 살아 보고 싶었다. 살아만 난다면 이딴 일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생도로서 헌터가 되기 위해 매진할 것이다.
“진심이야?”
“진심이야, 믿어 줘!”
“알았어, 가 봐.”
“어? 가라고?”
“싫으면 말고.”
“……갈게!”
지연은 급히 일어나 헐레벌떡 도망쳤다. 저 무식한 녀석과 한시라도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씨익!
지연이 떠난 후, 무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본인 딴에는 약은 척해도, 열일곱 살 소녀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되지도 않는 짓까지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죽을죄를 지었으면 죽여야 한다.
그것은 철칙이다.
딸깍!
다른 방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지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의문이 들었다. 협박하는 솜씨는 놀라웠지만, 마지막이 허술했다.
지연이는 지철 오빠처럼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지금이야 허점이 많아 보이긴 해도, 미래에선 제법 날카로운 독니를 지녔었다. 어쩌면 저년이 미리 정보를 누설했을 수도 있었다.
“저렇게 보내도 돼?”
“당연하지.”
“어째서?”
“사요공하고 흑무흡정술을 썼거든.”
“……하!”
어쩐지 고이 보내 주더라.
무진의 사악한 수에 지수는 혀를 내둘렀다. 이런데도 사고 한번 터뜨리지 않고 대기업의 임원이 되었는지 의문투성이다. 하는 짓만 보면 빌런의 끝판왕도 한 수 배워야 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공을 들일 필요가 있을까?”
“쟤들은 미끼야.”
“미끼라고?”
“미래의 권왕가를 네 숙부가 다스린다며. 20년 후긴 해도, 사부님의 건강 상태로 미루어 봤을 때 시간 때가 맞지 않잖아.”
“콩가루 집안인 건 아는데, 네 입으로 직접 들으니까 씁쓸하네.”
동생이 가주가 되지 말란 법은 없다. 능력만 된다면야, 누구라도 가주가 될 수 있었다.
하나, 개인이 아닌 제3의 세력을 끌어왔다면 다른 얘기가 된다. 무진은 사부님의 수제자로서 권왕가의 기치를 지켜야 했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야지.’
무진은 대여한 장소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흡인지력을 발휘했다. 지성인으로서 매너를 다하는데, 지수가 뚱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가족사라 그런지 아직도 망설이는 건가? 결단력 부족이었다.
“혈연이 걸려서 그래?”
“걘 절대 안 돼.”
“뭔 소리야?”
“안 되면 안 되는 줄 알아!”
여사친의 사생활 침해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처럼 심했다. 자발적인 감정이라면 받아 줄 줄도 알아야 사내대장부지.
훗!
지수의 질투가 귀엽긴 했다.
이럴 거면 진작에 고백했어야지, 고속열차 떠났다니까. 이제 와 후회한들 늦었다. 골려 줄 겸, 90년대 무협지의 주인공으로 잠시 빙의했다.
회귀도 했는데, 빙의 정도야.
“자고로 영웅에게 삼처사첩은 허물이 되지 않는다고 했어.”
“녹음했는데.”
“……농담이야.”
“그래서?”
하긴 무협지의 배경과 현대는 관점이 달랐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한서불침인데.
***
성운 그룹.
건설을 모태로 전기, 전자, 화학으로 계열사를 확장했다. 작금에 와서는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 아이템과 장비 가공 사업으로 기반을 옮겨 갔다. 국내로 한정했을 때 5대 기업 안에는 들어가는 굴지의 대기업이다.
성운 그룹 본사.
정시 30분 전 출근 도장을 찍은 산하는 기업 인수 합병 기획서를 검수하는 중이다. 이사진에 보고하기 전 마지막 작업이기에 조목조목 따져 봐야 했다. 문서의 단어 하나가 나중에는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다.
확인 작업이 끝나 갈 때쯤, 회장실에서 연락이 왔다.
“최 과장, 남은 것 좀 처리해 줘.”
“예, 부장님.”
산하는 최종 검수를 최 과장에게 맡기고, 회장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최 과장과 같이 한 작업이라 불안하진 않았다.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향도 아니고. 그러다 보면 정신이든, 육체든 병이 날 수 있었다.
‘승진이나 시켜 줄 것이지,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하기는.’
최상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편치는 않았다.
성운 그룹의 회장은 평소 얼굴조차 마주 보기 힘든 편이나, 산하에겐 월급 주는 쩐주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회사에 대한 애사심이 없진 않았다. 그저 높은 직위와 풍족한 월급이 충성도를 증명할 뿐이다.
회장실이 있는 최상층에 도착했다.
과거와 달리 각성자들이 설치는 세상이라, 회장님을 비롯한 사장급 집무실의 경비는 삼엄한 편이다. 당연하게도 회장님 근처엔 등급이 높은 각성자가 상시 대기했다.
회장실에 들어서자, 성운 건설을 대기업으로 이끈 진호천 회장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소파의 브렌드를 확인하자, 집값과 호환되었다.
“부르셨습니까?”
“어서 오게.”
진 회장을 처음 봤다면 관록에 짓눌렸을 수도 있었다. 어지간한 강단이 아니고선 맨손으로 기업을 일군 회장의 사나운 기세를 감당하기 어렵다.
당연하게도 산하는 예외였다. 소심한 스타일도 아니고, 근래에 들어선 종종 회장실로 불려 왔었다.
아들 녀석 때문에.
“무슨 일이신지?”
“일은 무슨, 학부모로서 얘기나 나누자는 거지.”
학부모의 포괄적인 개념을 넣는다면 할아버지도 들어가긴 하지만, 진 회장의 지극정성은 의외였다. 철혈의 경영가도 가족의 굴레에선 벗어나지 못하는 건지 원. 어쩌면 세간에 떠도는 소문이 사실일지도.
“이대로만 가면 최소 후작 위는 바라볼 수 있다고 하더군.”
“대단하군요.”
“다 타고난 재능이 아니겠나. 그러고 보면 자네 아들도 제법 이름을 날렸더군.”
“그래 봤자 신입 생도입니다.”
“서열전 상위에 들었다면 필시 백작은 되지 않겠나.”
“그렇겠지요.”
일전에 지나가듯 말을 붙였을 때와 달리 진 회장은 본격적이었다. 조금은 과한 면이 없지 않으나, 기실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기반 산업을 마석, 장비, 아이템 가공으로 전환한 상태였다. 세계정세의 흐름을 돌아보면 앞으로도 던전 개발과 가공이 유망했다.
하나, 진 회장의 혈육 중에는 내세울 만한 각성자가 나오지 않았다. 각성했어도 등급이 낮아 그룹을 홍보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다.
다른 5대 그룹과 차이가 벌어지고 있는 연유였다. 가공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로 이득을 보곤 있지만, 경쟁력을 키우려면 최상급의 헌터가 필요했다. 그리고 가족이나 혈육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이런 와중에 진 회장의 손주는 잠재력을 인정받아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 정도 지원을 받으면 당연한 결과 아닌가?’
지원은커녕 자력으로 강해진 아들을 상기하니, 산하는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진 회장만큼 아니더라도, 받기만 했다. 이래서야 아버지로서 면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후일 그룹 차원에서 길드를 만드는 건 어떨까 하네만.”
“어중간한 길드가 아니라 중견 길드 이상이 되려면 공작급의 헌터가 최소 2명 이상은 필요합니다.”
“그거야 차차 공을 들이면 될 일일세. 당장 만든다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태수 군을 내세우실 셈이군요.”
“아무래도 가족이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지. 그룹에 대한 홍보도 겸할 겸.”
갑작스러운 제안이나, 산하는 놀라지 않았다. 현재 성운 그룹과 계약을 맺은 대형 길드가 2개나 있지만, 수평적인 관계에 불과했다.
각성의 시대 이전에는 설설 기던 자들이 이제는 머리가 컸다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니 성에 찰 리 있겠나.
그렇다고 피도 섞이지 않은 외인에게 길드를 내어 주기에는 찜찜한 것이다. 전문 인력으로 이사진을 꾸려도, 재벌가에서 중요한 것은 피를 나눈 혈족이었다.
가족 경영을 무조건 나쁘게만 볼 순 없었다. 전문 경영인이 뛰어나기는 해도, 성과주의에 목을 매다 보면 그룹에 대한 애착이 다소 떨어진다.
“기존 길드와의 마찰을 어느 정도는 예상하셔야 합니다.”
“어떤 분야든 경쟁 없는 쟁취는 불가능하지 않나.”
“지금부터 철저히 준비한다 해도, 최소 10년을 봐야 할 겁니다.”
“그래야지. 자네 아들에게도 나쁘지 않은 기회가 될 걸세. 그 아이에게 필요한 인재가 어디 한둘일까.”
진 회장의 속내였다.
사실 숨기고 말 것도 없다. 아들의 학기 초부터 신호가 왔었다. 진 회장의 손주 주변엔 생도들이 많았다. 그들은 차후 길드를 만들 때 필요한 인원이었다. 그 안에 아들을 포함시키려는 의도였다.
‘권왕가의 도움도 필요할 테고.’
길드의 반발을 무마하려면 칠대가문의 협조가 필요하다. 단순히 손주에 대한 자랑이 아닌, 그룹의 미래를 위한 회장의 책임감이었다.
‘그게 맘대로 될지는.’
진 회장의 손주가 과연 아들을 다룰 수 있을까? 생도로서 나쁘지 않은 서열이지만, 온전히 태수 군의 실력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하물며 다루려는 대상이 무진이었다. 권왕조차 끌려다니는 것 같은데.
산하는 돌아가는 흐름을 계산해 보고, 견적을 냈다.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굳이 반기를 들 필요성이 없었다. 오히려 제안을 수용하는 편이 장기적으로도 이로웠다.
“맡겨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기획안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이런, 의욕이 너무 앞서는군.”
“성운 그룹의 미래를 위한 일이지 않습니까. 세계 제일의 성운 그룹을 위해 저도 한 손을 보태고 싶습니다.”
“자네가 그리 말해 주니 기분이 좋구먼.”
진 회장은 산하의 적극적인 태도에 흡족했다.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비록 잠재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는 해도, 그 점이 오히려 득이 되었다. 너무 뛰어나면 태수가 다루기엔 불편해질 수 있었다.
‘회장님, 잘 먹겠습니다.’
어떤 식이 될지는 몰라도, 판을 만들어 준다면 산하로선 원하는 바였다. 아들과 회장의 손주는 격 차이가 너무 컸다. 차후 길드가 만들어지고 난 후에는 땅을 치고 후회하겠지만, 그때가 되면 되돌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런, 너무 내 얘기만 했군. 자네 아들은 좀 어떤가?”
“잘 자라 주곤 있지만, 좀 더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할 따름입니다.”
“자네도 나처럼 별수 없구먼. 허허허허.”
“회장님이나 저나 학부모가 아닙니까.”
진짜로 해 준 게 없었지만, 산하는 적당한 선에서 대응했다. 선의를 보인다면 거절할 필욘 없었다. 하나, 아들에게 족쇄가 될 만한 정보는 거론하지 않았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이만 가 보겠습니다.”
산하는 인사를 올린 후 회장실을 나섰다.
진 회장은 그런 산하를 유심히 보다가 옆에 선 사내에게 물었다.
“어떤가?”
“평온합니다.”
“긴장조차 하지 않았다고?”
“대담한 자입니다.”
사내는 진 회장의 수행비서로 사람의 신체 리듬을 읽어 심리를 분석하는 데 탁월했다. 강단이 있는 척해 봤자, 몸은 정직하기에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강 부장은 특이한 케이스였다.
“놀랍군.”
이사로 올려도 손색이 없음에도, 번번이 승진 심사에서 누락이 되었다. 사유는 살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능력은 있으나, 강직한 성향으로 인해서 연줄이 없었다.
진 회장은 그 부분을 파고들기로 했다.
그룹의 총수가 연줄이 되어 준다면 강 부장의 이사 승격은 떼 놓은 당상이었다. 사람이란 자신을 알아주는 주인에게 충성하는 법이다. 충견을 만드는 데 이보다 좋은 수단도 드물었다.
“강 부장의 아들도 잘 봐 주도록.”
“예, 회장님.”
손주의 탄탄대로를 위한 초석이 될 테니, 신경을 써 줄 필요는 있었다. 이만큼만 해도 나머지는 태수가 알아서 하리란 믿음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