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빌드업(1)
무공, 나쁘지 않다. 특수 속성도 괜찮았다. 눈치도 있고, 센스도 갖추었다. 전체 스텟을 공평하게 분배하면 자신보다 뛰어난 생도는 많지 않았다. 한데, 그 많지 않은 부류에 기분 나쁜 친족이 포함되었다.
언제나 할아버지의 예쁨을 독차지하는 쌍년! 나도 할아버지 무릎에 앉고 싶……지는 않아!
절대, 네버!!
어찌 됐든 같은 피를 이은 친족이니 쌍년까지는 봐주려고 했었다. 한데, 어느 날부터 개쌍년이 되었다. 하는 말, 몸짓,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맘에 들지 않았다. 어떤 계기로 그토록 재수 없게 변했는지 모를 만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혼구녕을 내 주려고 했었다.
오호통재라!
빌어먹게도 개쌍년의 무위가 상상을 초월한다. 같은 핏줄이 맞나 싶을 만큼 격차가 컸다.
물론, 내 탓은 아니다.
아버지의 유전적 결함이거나 큰오빠에게 재능을 몰아줬거나 둘 중 하나일 터.
결투로는 승산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피는 못 속인다고 눈치도 빨랐다. 어쭙잖은 수작을 썼다가는 되레 당할 수도 있었다.
정면 대응이 어렵다는 판단하에 주변부터 공략하기로 방향을 틀었다. 작은 불씨가 산불이 되듯 혼란과 분란을 심어 자중지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런데 그년 주변도 하나같이 만만치 않다. 어디서 자기 같은 쌍것들만 모아 놓았는지.
특히 나이답지 않게 거대한 규격을 지닌 건방진 새끼는 그년하고 판에 박았다.
똑같은 연놈들!
포기하진 않았다. 세상은 힘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배웠다. 그중에서도 내 손이 아닌 주변을 이용한 차도살인이야말로 전략의 꽃이었다.
반드시 통할 줄 알았다. 제아무리 대단한 놈이라도 신입 생도에 불과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생도도 빠져나가기 어려운 기습적인 난전이었으니.
성공하리라 믿고 기다렸거늘.
믿을 수 없게도 회심의 계책이 실패했다. 자세한 내막을 알아내기 위해 몇 번이나 접촉해 봤지만, 번번이 헛수고였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갈등했지만, 제 안마당처럼 아카데미를 활보하는 쌍년을 보자 다짐했다.
성공할 때까지 몇 번이라도 시도하리라.
알량한 전투력만으론 세상을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깨닫게 해 줄 요량이었다.
하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가장 먼저 악의를 불태웠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둘째 오빠였다. 남매로서 일치단결해도 부족할 판국에 어느 순간부터 뜨뜻미지근했다.
그때는 긴가민가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처맞고 나니 실패한 연유와 인과가 딱딱 들어맞았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다.
그것도 내 가족 새끼가!
부글부글!
지연은 속이 끓다 못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짐작도 못 한 반전에 허를 찔렸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배신할 수가 있냐고!
‘반갑기는 개뿔!’
무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심장마비가 올 뻔했다. 더욱이 친오빠의 뒤통수까지 이중고에 시달렸다.
‘후우우, 난 괜찮아!’
아직도 어질어질하지만, 호랑이한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다.
고귀한 숙녀를 감금한 파렴치한 사고가 밝혀지는 순간 세간의 질타는 불을 보듯 자명하다. 그 어떤 변명으로도 빠져나가기 힘든 함정이었다. 제 발등 찍고 싶지 않으면, 적당한 선에서 끝내야 했다.
‘지가 어쩔 건데!!’
꿀릴 게 없다고 확신한 지연은 세게 나갔다. 갑작스러운 난입으로 제압되었던 기선을 반전시켜야 했다. 전투든, 언쟁이든 중요한 덕목은 초반의 기선 제압이었다.
“우리가 반가워해야 할 사이는 아니지.”
“그러면 일단 맞고 시작할까?”
“……뭐?”
“싸우면서 정든다고 하잖아. 서먹서먹한 사이를 친근하게 정립해 보자.”
……그건 사내들끼리나 하는 소리잖아!
지연은 지성과 교양을 갖춘 숙녀였다. 대화로 풀어 가려는 노력이 단칼에 수포로 돌아가자 말문이 막혔다.
너무 세게 나갔나?
혹시 반갑게 인사했으면 호의적으로 받았을지도. 핀트가 빗나가자, 지연은 사태 파악을 위해 두뇌를 맹렬히 굴렸다.
결론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무식한 놈이라면 모를까, 자신보단 못해서 무진은 머리를 굴릴 줄 알았다.
‘허세를 부리시겠다, 나한테는 안 통해!’
허를 찔러 대화를 주도하려는 어설픈 수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작부터 주먹을 날릴 리가 있나.
그래야 하는데.
빠아악!
번쩍!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머리 위로 별자리가 돌고 돈다. 살가죽을 관통하여 광대뼈를 함몰시킬 괴랄한 파괴력이었다.
숙녀라 지칭한 지연은 바닥을 세게 찍었다. 일격에 눈동자는 풀렸고, 입에선 거품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맷집이 허약한데.”
무진은 숙녀의 뜻을 새롭게 정의했다.
고상함의 대명사인 영국 신사와 숙녀가 얼마나 개떡 같은 소린지를 알게 해 주었다. 제국주의 시대 영국이야말로 혐성의 근원이었다. 그 시절의 영국이라면 중국도 한 수 배워야 했다.
띠용!
딱딱한 바닥에 탄성이 있을 리 만무하거늘, 지연은 바닥을 찍고 튕기듯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런지를 5시간 동안 한 사람처럼 무릎에 힘이 빠지며 휘청거렸다.
무진은 친절한 트레이너로서 지연의 목을 잡아 주었다.
자세 교정 시 목 잡기는 최선일 듯.
꽈악!
꾸웩!
목이 가는 편은 아닌데, 무진의 손이 워낙 크고 단단했다.
숨통이 막힌 지연이 컥! 하는 소리를 내며 연신 핏발을 세웠다. 어안이 벙벙했던 혼란한 정신은 돌아왔다. 안 돌아오면 혼란으로 끝나지 않을 거란 공포로 인해.
“정신 차렸으면 더 맞아야지.”
“……미쳤어!”
“미안하지만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어.”
“……뭔 개소리야!”
이 상황에 어울리는 속담이 아니잖아!
어서 주워 담으라고!
퍼억!
복부에 한 방.
명치에 한 방.
간장에 한 방.
잡고 쳐도 낀 듯 안 낀 듯 손맛이 황홀하다.
맞을 때마다 지연은 황천길에 오르고 있었다. 한 발자국만 넘어서면 요단강을 건널 판이다.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고래고래 내질렀다.
쾌락과 고통은 한 끗 차이라던데.
스윽!
의식이 끊어지며, 지연은 고개를 떨구었다.
무진은 목을 놔주었다.
대신.
꽈악!
상하체인지.
다리를 잡고 바닥의 탄력을 확인했다.
팡! 팡! 팡!
필름이 끊기고 싶었던 지연은 다시 찾아온 소울에 기겁했다. 현실을 인지하기는커녕,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찾아왔다. 유인, 협박, 감금, 폭행, 그딴 거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살려 줘!”
고작 열일곱 살에 죽고 싶지 않았다. 아직 남자도 사귀어 보지 못했는데, 처녀 귀신이 될 순 없잖아!
다 그렇다 쳐. 왜 이렇게 막가는 거야? 뒤가 있기나 한 거냐고!
‘……미친 새끼!’
그제야 지연은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는 걸 깨달았다. 대화도 어느 정도 말이 통하는 사람한테나 통하는 것이었다.
미친놈하고 대화하겠다고 도발했으니, 처맞는 것도 당연……하기는 개뿔!
“안 죽여. 크크크크크!”
“……?”
환하게 웃으며 죽이지 않는다고 다정하게 속삭이는 무진과 눈을 마주한 지연은 얼어붙었다.
걸려도 지독한 놈에게 걸렸다.
오빠의 배신이 점점 이해가 되어서 울화가 치밀었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숙녀로서 지조를 지켜야…… 할까?
잔뜩 찍힘을 당한 후, 바닥에 멋대로 널브러졌다.
‘……이제 끝났나?’
해선 안 될…… 생각을 해 버렸다.
까아악!!
날아오른 거대한 그림자가 지상으로 낙하하며 팔꿈치를 내려찍는다. 프로레슬링의 엘보우 드랍이었다.
지연은 가슴과 가슴 사이를 관통하여 구멍이 나는 줄 알았다. 허공으로 핏물이 분수처럼 아름답게 솟아올랐다.
“아~~! 포션 먹자.”
“……푸웩!”
“이거 비싼 포션이야. 흘리지 말고 다 먹어야지.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야.”
“……어푸! 어푸!”
내상을 입은 지연은 몸이 회복되는 걸 실시간으로 체감했다. 죽이지 않는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그래서 더 환장하겠다.
씨익!
무진의 미소에 지연은 소름이 돋았다.
“지연아, 2차전이야.”
목소리만 다정할 뿐, 현실은 참혹했다. 말로는 어떤 공약도 남발할 수 있으나, 당선되면 바뀌지 않는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이상과 현실을 냉철히 구분하는 무진이었다.
“이번엔 내가 졌어.”
“……무슨?”
“1승 1패네.”
“……왜?”
그냥 2패라고!
무진의 아름다운 무논리로 3차전이 성사되었다. 이성적으로 논리를 따지는 연놈들에겐 노답이 정답이었다. 시답지 않은 소모적인 언쟁 따윈 하지 않는다.
‘돈 들인 보람은 있어야지.’
장소 대여와 포션 구입은 미래를 위한 투자로 비용 처리 했다. 자고로 발밑을 조심하지 않는 자치고 장래가 밝은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역사는 항상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법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히는 건 역사적으로 규명이 되었다.
무진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았다.
온고지신을 기조로.
7전 4승제의 한국시리즈처럼 단기전의 승패는 기세였다. 무진의 압도적인 기세에 나름대로 이성적이었던 지연은 압사당했다.
“포상으로 인벤토리를 선물할게.”
“……싫어!”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지철 선배라면 오줌 지렸을 명대사였지만, 지연은 넋이 나가 있었다. 1년은 정신과를 다니면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정신분석학에 일가견이 있는 무진이 앞에 있었다.
이대로 놔두었으면 실어증을 극복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을 소비했을 것이다.
“인벤토리가 많이 협소하지. 마치 20년을 한 푼도 안 쓰고 꼬박 모아도 서울에 집을 사기 어려운 우리의 가슴 아픈 현실처럼 말이야.”
정신의학의 기본은 자기반성에서 시작한다고 그러더라.
아니면 말고.
어쨌든 아무리 노력해도 서울은 물론, 인천조차 대출 없이는 집을 사기 어려운 소시민으로서 공감했다.
“잘라서 넣을게.”
“……?”
레벨업으로 평수를 늘렸음에도, 무진은 자랑하지 않았다. 국민 평형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한 인벤토리였다. 꾸준히 레벨업을 하여 반드시 34평이 되기로 다짐했다.
“……너 설마?”
“지철 선배보다는 똑똑하구나.”
흐리멍덩했던 지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무진을 보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완전범죄 시나리오였다.
지연은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죽도록 처맞았는데, 이대로 죽기는 싫었다. 그만큼 쳤으면 근성을 인정해서 살려 주는 게 예의 아닐까?
“안 죽인다며!!”
“그러네.”
“사내가 돼서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겠지?”
“사람이 살다 보면 헛소리도 하고 그러는 거지. 약속이라고 다 지키고 살면 병나.”
빌어먹을, 한 입으로 두말할 줄이야.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고리타분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약속을 밥 먹듯이 어기는 상상도 못 할 개새끼였다.
이득을 위해서는 거짓말도 서슴없이 하기에 소름이 돋았다. 처음부터 계획을 다시 세웠어야 했다. 할아버지의 제자라서 융통성이 없을 거란 전제부터 잘못되었다.
“정말 인간적이다. 그치?”
인간적이라니, 어디가?
살인마 새끼!
두 번 인간적이었다간 부관참시 할 놈이었다.
지연은 빠져나갈 궁리를 해 봤지만, 제멋대로 해석하는 무논리엔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목숨을 포기할 수도 없으니 무엇이든 끌어왔다.
“오빠하고 같이 왔어. 주변에 CCTV도 엄청 많고, 내가 죽으면 너라고 무사할 것 같아! 세상에 완전범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우리나라의 치안을 무시하지 말라고!”
“허, 애국자 나셨네!”
무진은 짐짓 감탄한 척했다.
놀라기는커녕 귓구멍을 후벼 파고 있으니, 지연은 속이 타들어 갔다. 비록 생각나는 대로 둘러댔다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과 같이 영상 시스템이 발달한 좁은 국가에서 사고 치고 도망 다니기란 불가능했다.
“놓아주면 어차피 신고할 거잖아. 그럼 난 즐거움조차 얻지 못하고 끝나는 거고. 혹시, 오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있겠어?”
“당연하지, 우린 아무 일도 없었어!”
“크크크, 너라면 믿겠냐?”
“믿어!”
지연이도 보통은 넘었다. 끝까지 살아 나갈 방법을 찾으려고 애썼고, 거침없이 나아갔다. 무공이나 속성이 하찮기는 해도, 지능은 지수보다 나은 편이었다.
‘나눠 가졌네.’
사이좋은 사촌이면 모를까? 서로에게 칼날을 겨누고 있었다. 지금이야 단순 시비나 장난으로 끝이 나도,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어떤 식으로 바뀔지 예측할 수 없었다.
‘사소하더라도 나는 간과하지 않아.’
불우한 가정사로 치부한 지수는 괜한 심력 낭비하지 말라고 했다.
용 잡는 칼로 쥐 잡는 격이라며.
무진은 다르게 보았다.
지금이야 하찮은 미물에 불과한 지철과 지연도 후일에는 날카로운 역린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차라리 타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철과 지연은 지수와 피를 나눈 사촌지간이니까.
나중에 불필요하게 칼을 겨누게 될 바엔 지금부터 싹을 잘라 놓는 편이 이로웠다.
당장은 죽을죄는 아니기에 목을 자르진 않을 뿐. 이후에도 칼을 겨눈다면 반드시 목을 잘라야 했다. 혈육을 베는 패륜은 감당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말로는 믿음이 안 가는데.”
“날 줄게.”
“그딴 거 필요 없으니까, 건설적으로 가자.”
“……그렇지.”
이성적이더라도 여자는 여자.
무진의 단호함에 지연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고심해서 내린 결정이었고, 한창 혈기왕성한 시기였다. 지수와 비교된다고 생각하니 열이 더 받는다.
‘그딴 거라니!’
내가 어디가 어때서!
외모에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었다. 충격이 너무 커서 그런가, 처맞은 기억도 흐릿해진다. 어떻게든 이 새끼를 굴복시키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정신 안 차리지, 더 맞을래?”
“……아냐!”
내가 미쳤구나!
이런 새끼를!
여자를 패는 야만인이다. 게다가 좋아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그런 망상을 하다니. 그럼 뭐야? 내가 매 맞는 걸 좋아한다는 뜻이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