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성동격서(3)
맞은 자의 고통을 아는 사람만이 크게 된다고, 중학교 한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찾아가 보려고 했더니 얼마 전 촌지를 받아서 은퇴하셨다고 들었다. 명예롭지 못하긴 해도, 명언은 남겼으니 되셨다.
“현실에 타협하는 스타일이구나.”
아카데미의 돌아가는 꼴을 보니, 적정한 선에서 타협을 보고 끝내려는 듯하다. 참으로 안일한 판단이었다.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는다면 아마 못 볼꼴을 많이 보게 될 것이다.
물론, 교장과 교관들의 처지를 모르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신뢰를 떨어뜨리기엔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거야 아카데미의 사정이고.”
무진은 아카데미를 위해 희생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집단이 잘된다고 해서, 개인에게 이득이 오는 것도 아니고.
희생을 원한다면, 그에 걸맞은 대가는 필수였다. 보상이 시원치 않다면 많이 서운한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넘치는 보상에 훈훈한 결말은 진리였다.
사람을 서운하게 하면 안 되지, 아카데미도 날벼락을 맞아 보고 그래야 정신을 차리는 법이다.
딩동.
지수가 찾아왔다.
문병을 왔으면 응당 푸짐한 과일 바구니나 에너지 음료 세트라도 사 와야 하거늘. 빈손으로 찾아오는 당돌함은 대체 어느 나라의 똥매너일까?
게다가 적반하장이었다.
“왜 안 말했어?”
“뭘? 다 말해 줬잖아.”
“지랄하네. 어디까지 봤어?”
“보긴 뭘 봐?”
깜빡이도 안 켜고 들어온 지수의 험악한 쌍심지에 무진은 어이를 상실했다.
누가 봐도 완벽한 마무리와 최적의 결과물이었다. 그런데도 만족하지 못하다니, 원래 이렇게 염치가 없는 녀석이었나?
“봤지?”
“자꾸 뭘 봐.”
“걔들.”
“걔들이라니, 사람한테.”
이제야 누굴 말하는 건지 파악했다.
밑도 끝도 없이 앞뒤 자르고 말을 하는 지수의 못된 버릇이었다. 고치려면 조금 많이 혼나야겠어.
그 부분은 나중에 시간을 들여서 패다…… 가르친다면 교정이 될 테니, 당장의 문제부터 풀어 보기로 했다.
“놓고 오면 죽을 수도 있어서 제인 누나한테 갖다 준 거야.”
“그래서 봤어?”
“그냥 사람이야.”
“봤냐고?”
더럽게 집요하네. 그게 중요해? 사람이 죽네, 마네 하는 판에. 오호, 통재라! 생사가 오고 가는 현실에 인류애는 없다는 말이던가? 아포칼립스를 살다 오더니, 감정이 메마른 모양이다.
“사람을 구했을 뿐이야. 나는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어.”
“봤네, 씨발!”
“갑자기 약지에 힘이 빠지는 바람에.”
“어딘가는 힘이 들어갔겠지.”
와, 확실히 서른아홉 살 맞나 봐.
열일곱 살 무진으로선 감당하기 힘든 문장이 지나갔다. 아니면 이때도 그랬는데, 몰랐던 건가? 여자는 비밀이 많은 존재였다.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 뒤통수를 얼얼하게 했다.
“타이밍이 안 맞았어.”
“맞추고 싶지 않은 건 아니고?”
“설령 그렇다고 한들 그분들도 가만있는데 네가 왜 설치는 거야?”
“그분?”
“초면에 그년이랄 순 없잖아.”
“초면이면 본 건 본 거네.”
“잘 들어 봐. 듣다 보다 보면 이해도 되고, 받아들이기도 수월할 거야.”
무진은 대단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항변했다. 그 시점을 정확히 초 단위로 구분해서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도 지수는 무대포였다.
4시간 동안 쳇바퀴를 돌고 나서야 끝이 났다.
끝난 거 맞겠지?
무한 루프일까 봐, 이쯤에서 그만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간 지수를 가볍게 여겼는데, 방심 못 할 여사친이었다.
항시, 몸 관리를 잘하고 있어야 했다. 언제 어느 때 방문을 열어젖힐지 모른다.
음.
여사친의 간섭이 이 정도면 여친은? 여보는? 미래를 상기할수록 답답함이 밀려왔다. 종말의 아포칼립스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건가? 퐁퐁남이 될 바엔 세상을 전부 없애 버리는 편이, 잠깐의 망상이었다.
“아카데미는 어때?”
“평소대로지, 뭐. 속이 썩어 가고 있는데도 과감하게 쳐 낼 용기가 부족해.”
“오랜 시간 고착된 체계를 무너뜨리기가 쉽지는 않지.”
“할아버지도 인정했던 풍신이라고. 솔직히 실망이야.”
“필요한 물건을 얻는 선에서 끝내자고 한 건 너야.”
아카데미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은 지수도 무진도 바라지 않는 방향이었다. 세계는 호시탐탐 각국의 인재들을 원하고 있었다.
이젠 인종이 아닌 헌터의 자질이 중요한 시대였다. 아카데미가 무너지면 나라의 인재가 외국으로 유출될 것이다. 정의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할 순 없다.
“아카데미에도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깊숙이 파고들어 왔을 줄은 몰랐어. 네가 보기엔 어떻게 될 것 같아?”
“당분간은 간섭하지 않겠지.”
아카데미에서 터진 사건도 머리가 아플 텐데, 창천 길드가 무너지게 생겼다. 둘 간의 연관성이 없는 구도라 더더욱 막막할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안심하기는 이르다. 가장 위험한 시기가 완벽하다고 여길 때다. 자만하지 않으려고 해도 안심하는 순간,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애들은?”
“상원이야 원래 줏대 없는 녀석이고, 유정이도 납득한 것 같고, 혜진이가 문제야.”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둬.”
“그러다 잘못되면?”
“현실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겠지.”
혜진은 명백한 정의를 담고 있었다. 자기가 가는 방향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보기에는 좋다. 그러나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 현실은 책 속의 내용처럼 정의롭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의도가 좋다고 해서 이로운 방향으로 흐르진 않는다. 혜진에게는 시련이겠지만, 하루라도 빨리 겪어 보는 편이 나았다. 골드미스가 되어 갈수록 사상을 바꾸기는 점점 더 어렵다.
“그나저나 아는 게 너무 없는 거 아냐?”
“사람이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하면서 살아.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돼? 5년 전 아파트 상가 편의점에서 산 물건 가격을 알 수는 없잖아.”
“12,350원. 쿠키, 빵, 김밥, 사이다를 샀지. 멤버십으로 5% 할인받았고.”
“넌 그게 문제야. 대체 어떻게 된 머리야? 망각을 모르는 드래곤이야?”
“차라리 나한테 주지 그랬냐.”
커억!
빈손으로 병문안을 온 방문객은 주화입마에 빠질 뻔했다.
지수는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된 녀석이 사드도 아니고, 하나하나 다 요격해 버렸다. 이어지는 쐐기포엔 답할 자신이 없어졌다. 맞는 말이라, 울화가 치민다.
“잔인한 새끼, 너 잘났다!”
“그러니까 잘해.”
사실 개소리긴 했다. 5년 전 편의점에서 산 물건을 어떻게 알아? 산 적도 없지만.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될 내용까지 머리에 집어넣진 않았다.
궁지에 몰린 지수는 화제를 돌렸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회귀했지만, 무진이 더 낫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못했다. 회귀를 해도 더러운 세상은 변하지를 않는다.
“그보다 박정환이 쉬운 상대는 아니었을 텐데.”
“궁금해?”
“그래. 박정환의 미래는 지금과는 많이 달라. 10대 초인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었어. 특히 마나량으론 따라올 자가 많지 않았거든.”
“마나가 전부는 아니야.”
무진은 거실에 앉은 지수의 앞에서 보법을 밟았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도 잡아 볼 겸.
박정환을 상대할 때의 속도로.
휙, 스윽!
헐!
기의 파동과 마력 파문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더욱이 앉은 자리에서 선 채로 이동한 수법은 철판교에 소림의 부동명왕보를 연상케 했다.
워낙 뻥이 심한 중국이라, 소림에서 실제로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긴 해도. 절세의 부동명왕보가 눈앞에서 발휘되고 있었다.
부동명왕보만 해도 놀라운데, 극의에 도달하자 9명의 무진이 결가부좌, 반가부좌, 유회좌, 윤왕좌, 의좌, 교각좌, 열반상으로 이어진다.
“……연대구품?”
“짝퉁이야.”
누가 짝퉁인지, 원!
이러면 원조가 와서 배우고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무진이라면 구배지례를 할 때마다 발로 밟을지도.
“중국과 교류전에선 절대 쓰지 마!”
“춤이야, 춤.”
현대의 태극권과 같다. 영화는 멋있는데, 실전에선 샤옹둥 미만잡이었다.
아카데미 간 세계 교류전이 있었다.
일종의 아카데미 월드컵으로 예선, 최종 예선, 본선으로 구분했다. 한국은 8강에는 안착할 전력이지만, 12년째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사사삭, 휘리리리릭!
무진이 집 안 곳곳에 있었다. 잔상이 남아서 어느 것이 무진인지 구분되지 않을 지경이다. 무념무아무상무극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야 할까?
헐!
박정환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상상이 되는 지수였다. 알고도 이런데, 모르는 상태에서 느닷없이 당했다면 귀신을 본 사람처럼 당황했을 것이다.
“……뭐 하는 거야?”
“청소.”
어째서 청소기를 안 쓰는지 이해가 되었다. 저 미친놈이 움직일 때마다 집 안의 먼지들, 미세먼지까지 흡입되고 있었다. 먼지를 낱알 단위로 회수하여 삼매진화로 태워 버렸다. 저러니 쓰레기 배출량이 현저히 줄어들지. 우리나라의 탄소 배출량을 줄이려면 삼매진화는 필수였다.
“……관리비 적게 나오겠다!”
“이제 뇌기만 남았어.”
“……전기료까지!”
“인덕션은 요금이 많이 나와서.”
친환경 대체에너지가 멀리 있지 않았다. 어쩌면 태양광발전을 자신의 몸으로 구현해 낼지도. 능히 그리하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남들에겐 뻘짓이 무진에게는 가성비 좋은 생산적인 활동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창으로 찔렀어. 간단하지?”
“그래, 아주 간단하다, 십새끼야!”
무진의 찌르기에 지수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저건, 본다고 막을 수 있는 성질의 찌르기가 아니다. 자신을 대입할수록 전신의 털들이 빳빳하게 곤두섰다.
무극무영창이었다.
저게 실제로 되는지도 의문인데. 되네, 쓰벌!
“그리고 요렇게 했지. 지수야, 멍멍!”
“내가 그딴 걸…… 멍멍!”
왜?
하란다고 했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하고 싶어졌다. 해야 한다는 당위성마저 느껴졌다. 그나마 불굴의 의지로 버텼기에 네 발로 기어 다니지는 않았다. 하마터면 무진에게 목줄을 매 달라고 간청할 뻔했다.
“……이 변태 새끼!”
“나는 그냥 짖어 보라고만 했는데.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 거야?”
“……아무 생각도 안 했거든. 난 아주 맑고 순결해!”
“꼭 그래라. 다가오진 말고.”
무진은 지수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묘한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함께하기에는 너무 먼 골드미스셨다. 그간 너무 건방지게 대했던 것 같다.
39년을 순결했으며, 돌아와서 1년이 되어 간다. 불혹까지 순결했으니, 얼마나 위험할까?
무진으로선 감히 상상도 가지 않았다.
“잠깐, 이거 사요공이야?”
“배움에 높고 낮음이 없잖아.”
“사요공을 쓰면 동공이 검게 변하는 거로 아는데.”
“난 색깔론자가 아니거든.”
그 색이 그 색인지는 둘째 치고, 지수는 무진의 속성에 의구심이 갔다. 원체 보고 배우는 능력이 뛰어나기는 해도, 처음 본 걸 이처럼 완벽하게 구현해 내다니!
이건 정말 사기캐였다.
“설마 흡정술도 익힌 건 아니지?”
“조금.”
“미친놈, 그거 잘못 쓰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하지만 잘 쓰면 이렇게 유용하지.”
무진은 아버지의 난초에 손가락을 댔다. 그러자 방금까지 누렇게 떠 있던 난초가 파릇파릇하게 돋아나고 있었다.
헐!
난 기르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전국의 난 기술자들이 보면 기겁할 일이었다. 죽은 난을 살려 내는 무진의 기술을 본다면 너도나도 배우려고 할 것이다.
‘부동명왕보가 문제가 아니잖아.’
로열티도 없이, 기술 탈취의 끝판왕이었다. 남들이 오랫동안 고심해서 만들어 낸 기술을 한 번 보고 홀라당 빼앗아 버렸다. 이건 알려지는 순간 세계 공적이 된다.
“어때?”
“그년들도 세뇌했구나!”
말이 왜 그렇게 나가냐?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향이라 무진도 당황스러웠다. 이게 어쩌면 지수의 매력일지도.
‘갖고 싶지는 않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