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성동격서(1)
교장은 교감과 철혈십좌를 교장실로 불렀다.
사로잡으려고 했던 조풍산이 죽었다. 노병의 실력 발휘는커녕 말을 걸기가 무섭게 자결했다. 도대체 무엇을 숨기려고 자결을 한단 말인가? 죽음으로 지켜야 할 만큼 중대한 사건이라면, 가려진 내막을 반드시 밝혀내야 했다.
생도들 간의 다툼이야 경중에 따라서 교칙으로 처벌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리 판단하기엔 돌아가는 정황이 좋지 않았다. 최악을 고려해야 했다.
“마공을 사용했단 말씀입니까?”
“조사가 끝나지 않아서 단언할 순 없네만, 죽은 생도의 몸에서 마기가 느껴진 건 사실일세.”
“마혈대전 이후로 칠대가문은 마공을 전부 소각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도 철저하게 규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이 꼬였네.”
교장이 받은 제보는 단순했다. 무진 생도를 시기하는 생도들이 인공 던전에서 일을 꾸미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교관을 불러 적당히 처리하기에는 개입된 생도가 20명이나 되었다.
일이 커질 걸 우려해서 찾아갔더니 교관이 지수 생도를 죽이려고 했으며, 생도 중에 마인이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일어나선 안 되는 사고였다. 그뿐인가, 2명이 죽고 15명은 팔다리가 부러지는 치명상을 입었다. 아카데미 역사에서도 흔치 않은 대형 사고였다.
“생도들이 마인과 결탁하다니요?”
“무진 생도가 찍은 영상이 있으니, 보고 판단하도록 하세.”
교장은 영상을 봤음에도, 개인적인 판단을 내리진 않았다. 교관들이 칠대가문이나 대형 길드와 연관이 없다고 단언하긴 어려웠다. 편향된 결정을 내렸다간 곤란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다.
크흠.
허어!
교감과 철혈십좌는 침음했다.
제보 내용대로 흘러가나 싶었는데, 개입된 자들이 심상치가 않았다. 마인의 등장도 문제지만, 교관까지 포섭되었다.
일련의 사태를 보니 생도들의 약점을 틀어쥐고, 제멋대로 휘두르려고 했다. 생도를 바르게 이끌어야 할 교관이 도리어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영상이 퍼지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숨겨진 내막이 있다고는 하나, 아카데미는 신망을 잃게 될 겁니다.”
생도들을 꼬드기고 부추기는 세력이 있었다. 추적하여 발본색원해야 마땅하나, 조풍산과 마공을 익힌 생도가 죽으면서 꼬리가 잘려 나갔다.
“그렇다고 감출 수도 없는 일이지.”
“생도들은 마인에게 속았을 뿐입니다.”
“누가 그렇게 보겠나? 참고로 영상은 사본일세.”
“아주 철저하군요.”
아카데미로선 사건이 불거져서 좋을 것이 없었다.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편이 나았다. 문제는, 생도들 간의 감정 다툼으로 끝내기에는 증거가 명확하다는 점이다.
“일련의 과정이 계획적인 데다가 악의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렇다고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닌가?”
“생도들이 어려서 함정에 빠진 겁니다. 이 시기엔 유혹에 빠지기도 쉽지 않습니까?”
“어리다고 용서할 일은 아니지요.”
연루된 생도들은 무진이 파 놓은 계획에 끌려 들어갔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어리숙해서 당했다고 하기에는 생도들의 행위를 정당화할 순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마인까지 개입했다. 영상이 퍼지는 순간 매장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생도들도 문제지만, 마인이 아카데미 내에서 버젓이 활보하고 있습니다. 이런데 누가 아카데미를 믿고 생도들을 맡기겠습니까?”
“그렇다고 진실을 숨기자는 건가요?”
“진실, 중요하지요. 한데, 이득은 누가 보겠습니까? 아카데미는 생도를 가르치고, 최고의 헌터를 만들기 위한 기관입니다. 저들의 목적을 모르는 상황에서 아카데미의 신망이 떨어진다면 우리나라의 기틀이 무너질 겁니다.”
“다 핑계일 뿐입니다.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것 아닌가요?”
“말씀이 심하군요.”
교관들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사실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부류와 대의를 위해서 일정 부분 숨기자는 부류로 나뉘었다.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면 밝히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그것이 꼭 이로운 방향이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아카데미 중에서도 탑이 존재하는 아카데미는 전 세계에 열두 곳뿐이다. 한국에서 최상위의 헌터가 나오는 연유였다. 아카데미가 타격을 입게 되면 국가적인 손실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에겐 물고 늘어질 좋은 빌미였다.
“자자, 그쯤들 하시게.”
소모적인 언쟁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교장으로서 영상을 보여 준 것은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생도들이 계획적으로 마인과 결탁하진 않았으니, 교칙대로 처벌하고 끝내는 편이 낫지 않겠나.”
“그 전에 아카데미에 숨어든 쥐새끼들을 확실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그건 당연한 일일세.”
“한데, 무진 생도가 이대로 넘어가겠습니까?”
본인에게 반감을 품은 생도들을 골라내서 함정에 끌어들였다. 의도가 불순하긴 하나, 생도들의 선택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한들 핑계와 변명이었다. 그릇된 선택을 한 이상 책임을 져야 한다.
아카데미 내에서 끝내려면 무진의 동의가 필요했다. 교관과 마인의 등장까지 계산하진 않았겠지만, 굉장히 영악한 생도였다. 과연 순순히 동의해 줄지 판단이 서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권왕가, 정령가, 검신가의 생도도 함께했다.
“그래 봤자 아직 생돕니다. 좋게 얘기하면 될 겁니다.”
“합당한 보상이 주어진다면 무진 생도도 납득하지 않겠습니까.”
교장은 다수결로 교관들의 동의를 받았다. 3명의 교관이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결정을 반대하진 않았다.
“연관된 생도들의 집에 연락하도록 하게.”
“그리하지요.”
생도들의 가족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예상이 되었다. 그들이라고 외부에 알려지기를 바라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내력 대결 중에 폭발했다던데, 무진 생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외상은 크지 않으나, 내상이 심해 당분간은 집에서 요양하기로 했네.”
“그 전에 사태를 마무리해야겠군요.”
“그러니 서두르세.”
교관들은 무진의 동의보다 마인의 개입을 중요하게 보았다. 조풍산과 마인의 신상을 파악하고, 연관된 자들을 찾아내야 했다.
하나, 발밑을 등한시한 대가는 가볍지 않았다.
***
“창천 길드다.”
“이번에 미노타우로스를 사냥했대. 그것도 5마리나.”
“미노타우로스면 a급 마물이잖아.”
“길드장이 혼자서 두 마리나 잡았다고 했어.”
창천 길드는 대형 길드에 속하진 않아도, 이 바닥에서 제법 잔뼈가 굵은 중견 길드였다.
창천 길드장 박정환.
쉰 살의 유부남이란 사실이 무색할 만큼 빼어난 외모를 자랑했다. 얼굴과 체격은 스무 살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테리우스란 별명이 그처럼 어울리는 헌터도 드물었다. 더욱이 가정에 헌신하는 다정다감한 모습에 cf 섭외 1순위로 꼽혔다. 길드장의 높은 호감도와 넓은 인맥으로 창천 길드의 평판도 좋은 편이었다.
“진짜 저 얼굴이 50대라니, 반칙 아니냐!”
“우리 애가 창천 길드장 보고 오빠란다!”
“여태 스캔들 하나 없는 거 보면 대단하긴 하지.”
“딱 1년만 저 얼굴로 살아 보고 싶다.”
헌터로서의 능력도 대단하고, 외모도 빼어나고, 길드를 대표했다. 사내로서 주변의 부러움을 사고도 남을 만큼 다 가졌다.
창천 길드장은 부담스러운 시선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사인을 부탁하는 팬들에겐 사진도 함께 찍어 주며 매너까지 좋았다.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든 후, 박정환은 차에 탔다.
차 문이 닫혔다.
인자한 눈웃음이 사라지고, 무심하고 차가운 얼굴이 되었다. 같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변화였다. 그는 수행원이 내준 세정제로 손을 꼼꼼하게 닦고, 핸드크림을 발랐다.
“물건은?”
“창고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창천 길드는 5개의 지부를 가지고 있었다. 규모만 놓고 보면 대형 길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박정환은 보름에 한 번씩 지부를 돌았다. 항상 같은 시간에 이동하기에 의심을 사진 않았다.
세단은 제2경인을 타고, 창천 길드의 평택 지부에 도착했다.
산을 배후로 둔 평택 지부는 다른 지부와 달리 상당히 넓었다. 도시보다는 농지와 가까이 있어 대지가 싸고, 인적이 드물었다.
울타리를 넓게 친 지부로 세단이 들어갔다.
창고라고 했지만, 잘 지어 놓은 별장과 다르지 않았다. 시골에 농막을 지어 놓고 세금을 내지 않는 수법과 비슷했다.
창고엔 지부의 길드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정보 유출을 제한하기 위해 박정환이 직접 뽑은 길드원들을 배치해 놓았다.
“오셨습니까?”
“그래.”
거실 소파에 앉은 박정환의 앞으로 이제 막 소녀티를 벗은 여인들이 목각 인형처럼 빳빳하게 서 있었다. 그는 물건을 품평하듯 여인들을 위아래로 훑었다.
“좋군, 오늘은 자고 가지.”
“알겠습니다.”
박정환은 계집들의 신선한 생기에 입맛을 다셨다. 일전의 물건은 상품에 흠이 있어서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번엔 냄새만으로도 때가 타지 않은 최상품들이었다. 확실히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지, 음심을 끌어 올렸다.
“나가 봐.”
“예.”
길드원을 내보냈다.
박정환의 동공이 검게 변하며 사이한 기운을 뿜었다.
여인들은 몽롱한 얼굴이 되었다.
“이리 오너라.”
“주인님.”
박정환의 눈이 완전한 칠흑으로 변하자 검은 운무가 흘러나와 여인들의 육신을 뒤덮는다.
흑무흡정술(黑霧吸精術).
진기를 흡입하는 사술로 박정환의 젊음을 유지하는 비법이었다. 특히 때가 묻지 않은 남녀의 진기를 흡입했을 때 효과가 좋았다. 그래서 그는 정기적으로 여러 보육원을 후원하여 진기를 보충했었다.
하나, 진기를 모조리 흡수하진 않는다. 보육원에서 나와 취업을 알아봐 준다고 한 후 사라지면 의심을 사기 마련이다. 한두 번은 넘어가더라도, 지속적인 흡기는 불가능했다.
-속성, 영혼의 사슬.
겉으로 티가 나지 않을 만큼 진기를 흡수한 후, 영혼을 금제하여 노예로 만들었다. 사요공(邪妖功)과 운용하면 효과가 극대화되어 절대적으로 따르게 되었다.
후후후후!
흑무흡정술, 사요공, 영혼의 사슬은 세트였다. 지속해서 사용할수록 레벨과 속성이 늘어나 지배력을 강화했다. 그가 생기 흡수를 끊지 못하는 연유였다.
“좋구나.”
사내는 진기만 흡수하는 편이고, 즐기기에는 계집이 훨씬 좋았다. 때가 타지 않을수록 강제하는 맛이 일품이었다. 생기 흡입 시 사요공을 운용하면 극한의 쾌감을 얻는다. 마약을 먹지 않아도 되는 극락경이었다.
후우우!
원하는 만큼 진기를 흡입하고, 계집들의 옷을 벗기려고 할 때였다.
드르륵!
이크!
망측스러워라.
문을 당차게 연 거구의 사내가 들어오다 손으로 눈을 가렸다. 타이밍이 살짝 어긋났다. 다 하고 난 다음에 들어올걸, 다행히 15세 등급은 되었다. 자칫 미성년자 관람 불가 판정을 받아 못 들어갈 뻔했다.
무진은 준법정신이 투철했다.
“이놈!”
눈치가 상당히 빨랐다. 누구냐고, 어떻게 들어왔냐고 물어볼 만도 한데, 박정환은 계집들을 잡아서 집어 던졌다.
쇄액, 훌렁!
가운을 입고 있던 여인들이 홀라당 벗겨지며 무진을 덮쳐 왔다. 눈을 가린 중지와 약지가 살짝 벌어졌지만, 전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이런 좋은…… 치사한!!
“죽어랏!”
여인들의 배후를 쇄도해 들어오는 박정환이었다. 중견 길드의 길드장답게 상황 파악도, 전투 센스도 기민했다. 무진의 존재 자체가 그에게는 굉장한 위협이었다.
슈슈슈슉!
박정환은 [신속]을 발동한 상태에서 창천검을 소환 즉시 창천극영을 펼쳤다. 계집들의 목숨 따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안위와 명예가 중요했다. 영혼이 사라진 고깃덩어리가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스륵
어?
계집들의 정면에 있어야 할 무진이 박정환을 정면에서 보고 있었다.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속도였다. 어떻게 움직였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공간이동을 한 것 같은데, 스킬이나 속성이라고 하기엔 마력 파동이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