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함정(2)
인공 던전은 이론을 토대로 실제 현장에서 융통성을 발휘하기 위한 훈련 장소였다.
찌잉!
지옥멧돼지를 처리한 후 다음 지점으로 발길을 돌리려던 무진은 미세한 파문을 감지하고 주먹을 뻗었다.
퍼엉!
내지른 주먹에 구슬이 깨지면서 뿌연 연기가 뒤덮었다. 무진은 호흡을 멈추고, 연기의 범위에서 물러섰다.
짝짝짝!
박수 소리가 난 방향으로 무진은 고개를 돌렸다.
20m가량 떨어진 완만한 언덕에서 적운길, 이민용, 배준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진은 의도를 물었다.
“무슨 짓이지?”
“놀랐어? 장난이야.”
“던전에서 장난을 치다간 자칫 퇴학당할 수도 있을 텐데.”
“동기간에 빡빡하게 굴기는.”
“같잖은 것들이 친한 척하기는.”
무진의 도발적인 응수에 적운길, 이민용, 배준상의 얼굴이 굳었다. 당황하는 모습이라도 보이길 바랐는데, 그러기는커녕 가소로워했다.
으득!
다들 무진에게 당한 기억이 있기에 자신들도 모르게 턱에 힘이 들어갔다. 특히 의도치 않은 사태에도 담담한 기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너희들이 뭘 해도 안 된다는 것 같아서 화를 돋웠다.
“너야말로 자신감이 지나친 거 아냐? 던전에선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데 말이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잡것들이 어디서 훈계지? 하긴 버러지들끼리 어울리기는 해.”
“이 개 같은 새끼가 죽고 싶어서 함부로 지껄여!”
“호오, 죽이려고? 들키면 퇴학으로 안 끝날 텐데.”
무진은 기선 제압을 하려는 이민용, 적운길, 배준상의 의도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 도리어 열등감을 부채질하며 판을 깔아 주었다. 도 넘은 행동을 했으면, 갱생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 소용이 없어!”
“바디캠이 있는데도?”
무진은 몸에 착용한 바디캠을 보여 주면서 발뺌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양쪽으로 오고 간 대화로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셔요. 하지만 어쩌지? 찍어 봤자 볼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텐데.”
“그만 깝죽거리고 얌전히 비키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야. 내 넓은 마음으로 이번 한 번은 관대하게 넘어가 주마.”
도리어 협박하는 무진의 여유 넘치는 태도에 그들은 울화가 치밀었다.
“미친놈, 언제까지 잘난 체할 수 있을 것 같아!”
“확실히 버러지들은 통하는 면이 있는 모양이야. 끝까지 가겠다면 각오는 해 둬라. 난 그리 호락호락하게 끝내는 스타일이 아니거든.”
“흥, 할 수 있으면 어디 맘대로 해 봐!”
이민용, 적운길, 배준상은 진동을 느끼자, 더는 말다툼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곧 저 재수 없는 새끼가 싹싹! 빌며 살려 달라고 사정하게 될 테니까.
두드드드드드!
미친 듯이 돌진해 오는 무리가 있었다. 군집을 이룬 지옥멧돼지가 흥분해서 달려들었다. 족히 40마리는 되었다. 한두 마리쯤이야 어렵진 않겠지만,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웜블에 닿은 이상, 피할 수도 없을걸!’
‘그 단단한 몸뚱이가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바디캠은 치우면 그만이고.’
무진에게 던진 구슬 폭탄의 주요 성분인 웜블은 지옥멧돼지를 흥분시키는 성질이 있었다. 원래는 지옥멧돼지를 몰이하고, 유인할 때 사용하는 미끼였다.
다다다다, 쐐애애액!
동서남북 가리지 않고 무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평소의 지옥멧돼지보다 흥분한 상태라 속도가 훨씬 빨랐다. 마기를 줄기줄기 뿌려 대며 무리의 기세가 뭉쳐지기까지 했다.
퍽, 꾸웨웨웩!
쿠다다당!
거리를 좁히며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려들면 보통은 기겁하기 마련인데, 무진은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호수처럼 명경지수를 유지했다.
전면 돌진 지옥멧돼지 한 방.
후면 돌진 지옥멧돼지 한 방.
우측 돌진 지옥멧돼지 한 방.
좌측 돌진 지옥멧돼지 한 방.
사선으로 달려드는 지옥멧돼지도 그 한 방을 피하지 못했다. 마치 사방에 눈이 달린 아수라처럼 미친 듯이 쇄도하는 지옥멧돼지에게 주마등을 선사했다.
무진의 주먹은 선악의 구별 없이 황천길로 안내해 주었다.
꾸웨웨웩!
한 방 이상이 필요하지 않았다. 3분이 지나지 않아 40마리의 지옥멧돼지가 쓰러지며, 무진의 레벨업에 조금 기여했다.
스윽!
지옥멧돼지를 처리한 무진이 그들을 응시했다.
움찔!
이민용, 적운길, 배준상은 질겁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지옥멧돼지가 d급이긴 해도 40마리나 되었다. 상처를 입히진 못해도, 최소한 전력을 소모시킬 수 있을 줄 알았다.
‘빌어먹을 새끼가!’
위험을 인위적으로 조작해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려던 그들로서는 원치 않은 사태였다. 지옥멧돼지가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쓰러지는 바람에 기만 살려 주고 말았다.
저 비릿한 조소를 봐라.
같잖은 듯 자신들을 조롱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하는 짓이야 뻔하지. 이딴 수작이 통하리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고작 지옥멧돼지 가지고 잘난 체하기는, 이건 맛보기에 불과해.”
“너희들로 되겠어?”
“누가 우리만이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무진의 사각을 노리는 암습이 있었다.
슈우웅!
무섭도록 빠른 극속의 찌르기. 사각으로 돌아서며 막으려고 했던 무진은.
멈칫!
일순 움직임이 무거워지고, 바닥에서 일어난 줄기가 육체를 감아챈다.
중력 마법과 바인딩 마법이었다.
타아아앙!
스걱!
파공성과 파문이 번지기 전 날카로운 예기가 발동해 공간을 잘라 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창극을 피해 낸 무진과 습격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대단한데.”
창황정가의 정우민이었다.
주변으로 20명의 생도가 포위 진형을 갖추었다. 이에 더해 파문이 번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공간 결계가 쳐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파아앙!
무진은 대화를 섞기보다 주먹을 내질렀다. 순간적으로 보폭을 조절해서 간격을 좁힌 후 펼친 권공이었다.
큭!
느닷없는 습격에 허둥지둥하기는커녕 정우민은 무진의 역공에 나가떨어졌다.
‘……무식한 새끼가!’
힘이 세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예측한 범위를 넘어서자 정우민은 속절없이 밀렸다. 절삭조차도 통하지 않는 단단함에 치를 떨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무진은 창을 쓸 최적의 공간을 내어 주지 않았다.
솨악!
블러드댄스를 발휘한 이민용의 혈기가 무진의 옆구리를 노렸다. 동시에 적운길은 화염적가의 오의 진천염화공을 중반까지 끌어 올려 염살장을 발출했다.
화르르르!
화인이 새겨질 강렬한 열기에 비명을 지를 만도 한데, 무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우민의 심장을 노렸었다.
츠으으으!
결과적으로 이민용과 적운길의 양동 전략에 정우민을 완전히 쓰러뜨리진 못했다.
휘익!
정우민의 심장이 아닌 왼쪽 어깨를 강타한 후, 무진은 방향을 바꾸어 이민용을 노렸다.
“어딜!”
적운길이 무진의 배후를 장악하며 공세를 이어 갔다. 이민용과 정우민도 합을 맞추어 무진을 방해했다.
화르르!
흥!
무진이 발동한 화염마도에 적운길은 쾌재를 불렀다. 이제 막 배운 마도 따위로 화염가의 화신인 자신과 맞상대를 하려고 하다니 어리석었다.
푸아아아, 화아아앙!
염살장에 적중한 무진이 화염에 휩싸이며 날아갔다.
이민용, 적운길, 정우민은 내심 기회를 잡았다고 여겼다. 더욱더 타격을 주기 위해서 신속히 전력을 발출했다.
퍼엉!
허공에서 직격당한 무진은 속절없이 밀렸다. 특히 육신에 붙은 화염이 꺼지지 않았다.
-요나.
소환된 요나가 날아가는 무진에게 붙은 화염을 소화했다. 이어서 가속 마법을 보법과 결합하여 속도를 한 층 끌어 올렸다.
일부러 방향을 잡고 거리를 벌린 것이다.
어?
무진은 배준상의 앞에 당도했다. 유리하게 흘러가는 줄 알고 대기 타던 배준상은 마른침을 삼켰다. 거구의 무진이 앞을 가로막자 아무것도 안 보였다.
“……잠깐 ……쿠웩!”
주변으로 셋이 모여 있었지만, 무진의 기습에 속수무책이었다. 대비했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퍼퍼퍼퍽!
무진은 놈들의 의식을 끊어 내고, 속도를 좀 더 높였다. 다음 목표는 아까 전 바인딩과 중력 마법을 썼던 마법반의 조문탁, 주성산이었다. 결투를 통해 실력을 쌓기보다는 원한을 쌓은 놈들다웠다. 밴댕이 소갈딱지들에겐 그에 어울리는 최후를 선사했다.
“……이런!!”
재차 마법 술식을 사용하려고 했지만, 무진의 간섭이 들어갔다. 간섭이 디스펠에 최적화된 마법이기는 하나, 무조건 통하지는 않는다. 상대의 마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패턴을 알고 있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조문탁과 주성산의 마법 술식은 무진에게 읽힌 지 오래였다. 그들이 파악했다고 생각한 범주 그 이상으로 낱낱이 알고 있었다.
결투를 통해 알아낸 정보의 양에서 생도들은 무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싸우면 싸울수록 무진에게 실체를 까발리는 꼴이 되었다. 차라리 붙지 않고 연구만 한 후, 새로운 방법으로 기습하는 편이 그나마 효과적이었다.
허억!
마법이 파훼되자 조문탁과 주성산은 무방비가 되었다. 마법사로서 무인과 주먹다짐을 하게 생겼다. 솥뚜껑 같은 주먹과 황소 같은 발차기가 날아왔다.
퍼어엉!
크아아악!
무진은 두 사람이 날아가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기절하기 직전에 두 발을 잡아챈 후 뒤를 노리고 들어오는 이민용, 적운길, 정우민에게 던졌다.
휘이익!
헙!
뒤늦게 무진의 수작질을 알아챈 이민용, 적운길, 정우민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따라붙었었다.
“……비겁한 놈이!”
훗!
적운길의 격노에 무진은 같잖은 듯 조소했다.
누가 더 비겁한지는 딱 봐도 견적이 나왔다. 밀리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수적으로 유리했다. 그런 주제에 비겁을 운운하는 것부터가 애송이란 방증이다.
어쨌든 거리를 벌렸다.
무진은 지체하지 않고 남은 녀석들을 처리해 나갔다. 다들 낯이 익고, 봐 왔던 얼굴들이다. 여러 반을 다니면서 반감을 샀던 생도들이다.
앙심을 품은 이상, 무진의 손속이 너그럽진 않았다. 남을 다치게 하려면, 본인도 다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했다.
“……안 돼!”
“안 되긴!”
테이머반의 여생도 길소정의 등이 새우처럼 휘었다. 목을 잡힌 채로 먹은 니킥에 내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쐐액!
무진은 기절한 길소정을 짐짝처럼 던지며 따라붙는 정우민, 이민용, 적운길의 시야를 재차 가렸다.
“제대로 받지 않으면 목이 꺾여서 뒈질 거다. 살인자가 되고 싶진 않겠지.”
“그건 네놈 짓이잖아!”
적반하장의 극치, 내로남불의 정석을 따르는 무진의 환장할 화법에 그들은 부들거렸다.
“그러네. 크하하하하하!”
“……미친놈!”
무진의 통쾌한 미소에 그들은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더욱이 생도들이 죽는다고 해도 무진에게 책임을 몰 수 있을까? 상식적인 계산이 설수록 판단력이 흐려졌다.
무진은 병신처럼 망설이는 놈들에게 충고도 잊지 않았다.
한때나마 같은 생도로서.
“멍청하긴, 애초에 날 죽이려고 했으면 그딴 사정을 왜 따져. 동료를 제물로 던져라.”
“……닥쳐!”
누가 악당이고, 희생잔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억울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새장에 갇힌 주제에 자유로운 영혼처럼 무진은 미쳐 날뛰었다.
이민용, 적운길, 정우민은 화도 나고 짜증도 났다. 무진이 미친 척하고 살수를 쓸 때마다 안절부절못했다. 모든 죄를 무진에게 뒤집어씌우기엔 수가 적지 않았다.
수적인 우위가 오히려 소명에 방해되었다. 그러다 무진의 꾀에 넘어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부글부글!
망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판단 실수가 불러온 참혹한 현실에 속이 끓었다. 이 와중에도 제멋대로 날뛰고 있는 무진을 보고 있자니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개자식, 죽여 버릴 테다!”
“평생을 후회하게 해 주마!”
“더는 네놈의 얄팍한 수작에 넘어가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