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교두보(2)
아카데미의 결투장은 학년별로 나누어져 있었다.
공개된 연무장과 달리 실내에 있으며, 서로 협의가 되면 언제든 대련이 가능했다.
대련 시 결투장의 통제는 아카데미 상황실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대련 과정이 전부 녹화되기에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게 되면 즉시 개입하며, 나중에라도 감점과 징계를 받게 된다.
서열 쟁탈은 3학년이 되기까지는 학년별로 진행이 되는 편이다. 저학년에선 도전할 수 있으나, 3학년 이상은 대련을 강제하지 못한다. 이는 신입 생도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지만, 늘 그렇듯 좋은 취지를 배반할 때가 있었다.
현재 결투장은 꽤 활성화된 상태였다. 위로 치고 올라가려는 생도들의 열정이 높았다. 물론, 열정만으로 결과를 이루기엔 현실의 벽은 냉정했다.
여생도 고유리.
반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정령 수재로 묵묵히 수업, 훈련, 집, 모범생 루트를 따르는 생도였다. 그렇다고 마냥 얌전하지만은 않은, 본인만의 카리스마가 있었다.
고유리는 무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무능력했다면 모를까, 한 달 반 만에 정령을 소환한 재능이었다. 모든 시간을 정령술에 걸었기에 무진의 행보가 기만행위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봐라.
패배 따윈 안중에도 없는 무진의 여유가 유리의 심기를 자극했다.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지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날 여자라고 얕보다간 큰코다칠 거야!”
“그 말 굉장한 실롄데, 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패.”
주먹을 정성스럽게 말아 쥐는 무진의 모습에 주변에선 마른침을 삼켰다. ‘뚜득!’거릴 때마다 뼈마디가 아작 나는 기분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박에 유리도 당황했다. 여자라고 무시하지 말라고 했더니,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이었다.
“네 맘대로 되진 않아!”
“다들 그렇게 말하지, 처맞기 전에는.”
무심히 내리깔리는 무진의 저음에 분위기도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결투장에 오를 땐 네 맘이지만, 내려갈 땐 내 주먹에 달렸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어설픈 각오로 도전을 했다면 경을 치게 해 주겠다는 엄포였다.
“그딴 겁박에 내가 굴복할 것 같아? 어서 시작이나 해!”
“강단은 있구나. 좋아, 네 말대로 전력을 다해서 패 주마.”
무진과 유리의 규격 차이가 상당했다.
서열전 4강에 오를 때까지 보여 준 파괴력이 상기되었다. 느리다는 편견을 뒤엎을 파괴력이었다. 일단 한 대라도 맞으면 남녀 생도 불문, 술 취한 사람처럼 해롱댔다. 우스갯소리로 폭탄주를 빗대 폭탄취권이란 이명도 돌았었다.
우우우!
편이 확실한 생도들의 불만이 있었다. 제대로 맞으면 인사불성은 기정사실이었다. 남녀를 떠나 서열 차이가 있는데도 저러는 건 잔혹한 폭력에 지나지 않았다.
“원하는 바야.”
“정령사로서 화끈하게 싸워 보자.”
“우습게 보지 마!”
“곧 후회하게 해 줄게.”
무진이 선공을 취하려고 하자, 결투장 밖의 유정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본 무진은 우직하리만치 답답한 평등주의자였다. 한순간의 시기와 객기로 도전했다면 평생 씻기 힘든 악몽이 될 것이다.
‘무슨 자신감이래!’
유정은 유리의 말로를 상기했다. 비슷한 실력인 줄 알고 도전했던 혜진도 무진에게 개처럼 처맞았었다. 모두가 설마 하던 짓을 태연히 저질렀었다. 얼추 비슷하게 싸워서 남들보다 비참했을 수도 있었다.
‘쌍으로 지랄이었지!’
지수가 워낙 압도적인 무력을 과시해서 그렇지, 무진도 그에 못지않았다. 둘이 어쩜 그리 재수 없게 강한 건지, 환장할 커플 그 자체였다.
-아니다.
끼리끼리, 유유상종이 분명하거늘.
그런데도 아니라고 하는 무진의 단호함에 유정은 헛웃음이 나왔다. 끼어들 틈을 주겠다는 건가? 대놓고 어장 관리를 하겠다는 건데, 백상아리가 떡하니 자리한 꼴이었다. 자살 희망자가 아니고선 턱도 없는 영역이다.
솨아아, 처저저적!
응?
대결이 되고 있잖아.
유정의 예상과 어긋나는 결투장의 광경이었다. 그래서 더 놀랐다. 정상적인 대결은 기대하지도 않았었다. 이상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무진은 이제 막 정령을 소환했다.
‘왜?’
정령사다운 치열한 대결이 펼쳐졌다. 모두의 기대를 배반한 흥미진진한 전투였다.
솨아아아, 푸앗!
무진의 요나가 [물의 벽]을 세워 유리의 기습적인 [흙의 가시]를 막아 냈다.
땅의 정령 토요를 다룰 수 있는 유리는 토군이란 이름을 주었다. 정령은 정령술사의 성형에 따라서 형태가 다변적이었다.
요나와 토군의 대치는 일방적인 편이었다. 정령력에서 무진보다 우위에 있기에 토군의 전력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요나, 곡선으로 물대포.”
“토군, 토벽을 비스듬히 세우고, 흙 사태로 묻어 버려.”
의사의 전달과 행동.
대화의 기본으로.
정령과의 교감도 마찬가지로 대화에서 출발했다. 정령술사의 어려운 점은 교감이 되지 않은 상태로 강제하려다가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투가 진행되는 점에 있었다.
앞으로 가라고 했는데 뒤로 가거나, 회전하라고 했는데 가만히 있으면 급박할수록 페널티가 되기 마련이다. 낭패를 당하지 않으려면 의미를 마음으로 정확히 전달하고 교감해야 했다.
마법사가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여 구현한다면, 정령사는 정확한 사물과 사태의 전달에 있었다.
‘왜 못 뚫는 거야?’
유리는 일방적인 공세를 취하는데도 무진을 무너뜨리지 못하자 독이 바짝 올랐다. 무공도 아니고, 정령만으로 이토록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다. 만약, 정령력에서 앞서지 못했다면 언제든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비슷한 수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섬뜩한 진실에 유리는 소름이 돋았다. 수준이 같았다면, 훈련 연차가 같았다면, 대결의 양상은 백팔십도 달라졌을 것이다.
‘이럴 리가 없어!’
유리로선 믿고 싶지 않았다. 무공으로 졌다면 또 모를까, 정령술로 밀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동안 쌓아 놓은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나 다름없음을 실토하는 꼴이다.
‘아냐, 난 틀리지 않았어!’
토군, 우린 지지 않아!
흔들렸던 유리는 곧 냉정을 찾았다. 전투란 모름지기 현재가 중요했다. 전력의 우위를 극대화하며 요나를 밀어붙였다.
대지의 정령이 가진 진정한 능력, 단계별로 묵묵히 쌓아 가는 유리의 의지와 일맥상통했다.
‘물의 정령은 자유로움에 있었지.’
틀만 주어지면 변형이 가능했다.
무진은 그러한 기본에서 벗어나지 않았었다. 유리는 그제야 무진이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보통이 아냐.’
배울 점은 배워야 했다.
강력한 파괴력과 현란함에 함몰되어 대지의 정령이 지닌 본래의 힘을 간과한 것이다.
‘되돌려 주마.’
처음에는 토벽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단계를 높여 가더니 굳건한 성벽으로 변했다. 사방이 가로막힌 공간 속에 요나가 사로잡혔다.
“이겼어.”
“어디가?”
“어?”
“난 무인이다.”
아까는 정령사라며!
요나에만 정신이 팔렸던 유리는 다가오는 무진을 확인하지 못했다. 야금야금 밀리면서도 무진은 거리 싸움을 벌인 것이다.
“아니지?”
“일단 한 대.”
부지불식간 헛바람을 삼킨 유리는 무진의 주먹이 복부에 박히자 숨이 막히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식한!’
설마 했던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무진은 여타의 남생도와는 질적으로 다른 미친놈이었다.
그걸 다가오는 주먹을 보면서 깨달았다.
퍼억!
쿠다다다당, 데굴데굴!
턱주가리를 처맞은 유리는 결투장 중심에서 외곽까지 날아간 다음에 튕겨져 나와 바닥을 굴렀다. 허공을 바라본 동공은 이미 허옇게 물들어 있었다.
진정 먹물을 뺀 세계였다.
정적이 흘렀다.
헐!
다들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어 현실을 보았다. 일격으로 끝을 내고선 마지막을 장식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렇지, 믿고 있었다고!”
하늘을 향해 어퍼컷 세리머니를 하며 환호하는 유정의 행태에 남녀 생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진과 함께 다니면 생기는 아주 많이 잘못된 사례였다.
무진은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정령술은 네가 이겼다. 하지만 승리는 나의 것. 아무도 내 서열을 건드릴 수 없다.”
“……!”
저게 의식 잃은 소녀에게 할 말인가?
상식적인 선을 가뿐히 넘어선 기행이다.
안타깝게도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무진은 분명히 말했었다. 누가 되든 최선을 다해 패 주겠다고.
“……언행일치!”
“나는 방금 무진이 노인을 패는 꿈을 꿨어!”
“애도 잘 팰 놈이라고!”
패륜, 패륜, 패륜.
경로우대는커녕 박해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자동차에 ‘애가 타고 있어요.’라는 스티커가 붙으면 가만두지 않을 상종 못 할 개새끼였다.
“너희들!! 말이 심하다. 무진이가 비록 위아래가 없고, 줄기차게 이상한 말을 지껄이고, 주먹 아래 만인이 평등하단 소릴 하긴 해도, 그렇게까지 패륜은 아니라고.”
유정의 반박에 생도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칭찬이야, 먹이는 거야?
승리를 만끽하던 무진도 이때만큼은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휘청였다.
어쨌든 패륜이란 거잖아.
아버지를 17년째 봉양하고 있는 무진으로선 듣기 힘든 고욕이었다. 그만한 정성이면 심 봉사도 눈을 뜨고 시력이 5.0이라고 외쳤어야 했다. 심청이는 두 번 죽었다 깨도 하지 못할 절대경의 효자였다.
“유정이 올라와.”
“……내가 왜?”
화들짝 놀란 유정이 급히 손사래를 쳤다.
저 미친놈하고 싸워 봤자, 결과는 자명하다. 기절한 채 헛구역질을 해 대는 유리의 처참함이 남의 일이 아니었다.
얼마 후.
정령반엔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후로 감히 재도전하지 않으리란 모두의 예상을 비웃듯, 유리는 무진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결투장으로 올라와!”
“오냐.”
패배를 알면서도 도전하는 유리의 용기에 감탄하면서도, 손 속에 사정을 두지 않은 무진의 단호함에 혀를 내둘렀다.
결투를 벌일 때마다 유리는 하루 반나절을 꼬박 앓아누웠다고 한다. 건강한 엘리트 생도가 36시간을 정신 못 차렸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했다.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한 방이면 됐잖아, 무식하게 세 방이나 두들기냐!”
“유리가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저러는 건지!”
생도들은 무진의 비정함에 치를 떨었다.
이쯤 되면 남녀를 떠나 같은 생도로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거나 끝을 냈어야 했다. 연거푸 의식을 날려 버리는 행위가 탐탁지 않았다.
“다들 미쳤어!”
“왜 자꾸 도전하는 거야?”
“저 새끼는 악마라고!”
유리의 높은 투쟁심과는 별개로 도전자가 더는 없을 줄 알았다. 보편적인 의견과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도전자가 하나둘 늘었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다.
고유리의 발전이 보였다. 비록 마지막은 볼썽사납게 쓰러지지만, 분명 어제보다 나은 정령술이었다. 특히 동화력과 기술적인 연계가 전보다 훨씬 매끄럽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