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교두보(1)
“역으로 당했다고?”
“천진우의 배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정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계획을 진행하다 그레이 길드와 총통 길드는 적지 않은 전력을 잃었습니다.”
그토록 자신하더니!
멍청한 놈 때문에 일이 꼬였다. 세간에는 암거래를 경시하는 편이나, 전체 시장에서 블랙마켓이 차지하는 비율이 낮지 않았다. 블랙마켓을 지배하는 다섯 길드 중 셋을 장악한 이상 차분히 포섭해 나갔다면 수월했을 것을.
실패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계집을 죽이기 위해 재차 계획을 세우기에는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영악한 계집, 힘을 숨겼었나?”
계집을 따르는 쉐도우 길드의 실세들이 나서지 않았다. 혼자서 그 많은 인원을 처리할 순 없을 테고, 따로 감춰 놓은 병기가 있다는 해석이 되었다.
문제는 얼마나 많은 힘을 숨기고 있느냐다. 그걸 확인하지 않은 상태로 그레이 길드와 총통 길드를 동원했다간 세력만 갉아먹게 된다.
“애를 먹이는군.”
쉐도우 길드만으로 블랙마켓을 장악하진 못한다. 결국, 남은 길드도 힘의 구도를 파악하고 유리한 쪽으로 붙기 마련이다. 시간이 더 걸리긴 해도, 블랙마켓을 장악할 순 있었다.
코드네임 그리드6은 한숨을 쉬었다.
근래에 하는 일들이 조금씩 어긋났다. 대세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더라도,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당장 관여했다가 문제가 커지면 감당하기 어려운 질책을 받게 된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대세를 완성해야 했다.
“계집에게 관측기를 붙여.”
우선은 인과를 조사하기로 했다. 계집의 전력이 드러났을 때 손을 써도 늦진 않았다.
***
마법, 정령, 무공, 테이머, 연금술.
학구열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다. 하나를 집중적으로 파도 부족한 시간에 다방면에 손을 대었다. 어느 것 하나 소득 없이 끝나거나, 전공마저 망하는 지름길이었다.
그래야 하는데.
“……말도 안 돼!”
“이게 정령이었구나.”
놀라고는 있지만, 내심은 담담한 편이었다. 사전에 성공 가능성을 9할 이상으로 끌어 올렸다. 또한, 준비 과정을 단계적으로 파악해 윤곽을 잡았다.
다만, 구차하게 일일이 설명하기보다는 불현듯 되는 편이 충격 요법으론 제격이었다.
“1개월 만에 정령을 소환할 만큼 친화력이 생기다니, 불가능해!!”
“겨우 소환했을 뿐이야, 실전에 써먹으려면 시간과 공을 좀 더 들여야 해.”
정령 수업을 받은 지 1개월하고도 10일. 무진은 정령에 대한 감응력 수치가 올라 물의 하급 정령 수요(水妖)를 소환했다.
정령반 최고점을 도맡은 유정이지만, 이번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개별 속성이 감응력을 높일 순 있으나, 무진은 정령 친화력을 타고나지도 않았다.
‘내 감각을 피했다는 건가?’
다른 건 몰라도 정령력에 관해서는 동년배에서 따를 자가 없다고 자부했던 유정이었다.
하물며 친화력만으론 정령을 부르지 못한다. 정령력을 갈고닦아도 한계가 뚜렷하기에 길이 아니면 오지 않는 분야가 정령술이었다. 레벨 보상으로 정령력을 높이려고 해도, 친화력이 없으면 올리기가 어렵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개뿔! 아무것도 없었잖아!”
“노력했더니 되던데.”
“정령술은 노력한다고 되는 분야가 아니라고!”
“꼭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지.”
유정의 불만도 이해는 갔다.
정령력을 타고났어도, 현대인은 인스턴트 음식과 탁한 공기를 마주하며 살고 있었다. 천성적인 정령력도 소모되거나 사라지는 예가 허다했다.
그런데 한 달 전만 해도 없던 정령력이 하급 정령을 소환할 정도가 됐다는 사실은 놀라운 기사였다.
아!
반 생도들의 아연실색한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정령술이 전문인 조유나 교관도 헛바람을 삼켰다.
무공이 주력인 생도가 정령반에 들어와서 설칠 때까지만 해도, 이런 결말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제 점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100점이다.”
반에서 정령 소환을 못 한 생도는 무진이 유일했다. 다들 각성 전후로 정령을 소환하고 다룰 줄 알았다.
하급 정령을 소환한 것 자체는 대단치 않았다. 그것만으로 100점은커녕 50점도 받기 어렵다.
하나, 정령 수업을 시작할 때부터 무진은 주변의 분위기를 이용해서 내기를 걸었다.
분기 안에 정령을 소환하면 최고 점수와 중급 정령석을 내어 주기로.
더욱이 보상은 그것만이 아니다.
“정령석도 감사합니다.”
원치 않은 떨떠름한 사태였다. 확신은 금물이란 조 교관의 평소 소신과는 어긋나는 현실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용아한테 먹이는 건데!!’
어렵게 얻은 정령석을 홀라당 빼앗기게 되었다. 애초에 약속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교관이 돼서 한 입으로 두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너무 아까웠다.
묻고 더블!!
“이번 학기에 중급 정령을 소환하면 정령석을 하나 더 얹어 주마.”
“싫습니다.”
“……3개?”
“됐습니다.”
“단호한 녀석!!”
이쯤 되니 조 교관도 더는 묻지 못했다.
맘 같아서는 묻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이래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생도들의 의욕에 불을 지를 겸 무진의 의도에 따라 줬더니, 덤터기를 쓰고 말았다.
‘생긴 건 곰도 때려잡게 생겨서는.’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내기를 제안했었다. 일련의 과정을 상기할수록 속았다는 걸 지우지 못했다.
조 교관은 속으로 이를 갈며.
“앞으로 지켜보마.”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성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하급 정령과 중급 정령은 하늘과 땅 차이야. 이번과 같은 수작은 안 통해.”
“유정이가 상급 정령석을 준다고 했습니다.”
“진짜?”
“그렇습니다.”
아까부터 조 교관보다 유정이 울상이었던 연유였다. 그날 따로 무진과 내기를 했고, 이전의 보상까지 묻고 더블로 갔었다. 한 번에 그간의 모든 내기를 무(無)로 돌릴 완벽한 기횐 줄 알았거늘, 단타 치다 세게 물린 격이었다.
조 교관은 무진이 내기를 받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행여나 응했다가는 어떤 꼴을 당할지, 소유정 생도를 보고 알 수 있었다. 대박을 좇다 쪽박을 차는 훌륭한 표본이었다.
‘어쩌지?’
무진은 계약서까지 꼼꼼하게 작성했다. 나중에 발뺌하지 못하도록 유정은 인감도장을 찍었다. 이래서 함부로 도장을 찍으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없는데!!’
단숨에 최고 평점과 상급, 중급 정력석까지 뜯어낸 무진이었다. 조 교관의 보상을 얻었으니 정령력도 더 강해졌을 것이다. 시작할 때만 해도 정령반의 꼴찌였는데, 곧바로 중위권까지 치고 올라왔다.
처벅, 처벅!
소환된 정령이 무진의 주변을 맴돌았다. 걸을 때마다 공중이든, 바닥이든 물소리가 났다.
정령과의 계약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았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요나다.”
-요나.
대화라기보다는 교감으로 인한 인식에 가까웠다. 원활한 대화를 하려면 중급 정령으로 진화해야 했다.
무진은 요나를 소환할 때부터 정령력의 소모와 교감의 작용을 읽어 나가고 있었다. 흐름을 파악한 후, 조 교관에게 배운 걸 써먹었다.
‘뒤로, 날아, 회전.’
-요나.
똑같은 대답이지만, 전달된 의사를 곧잘 따랐다. 같은 하급 정령이라고 해서 능력이 같지는 않았다. 막 소환된 요나의 전력은 갓 걸음마를 뗀 수준에 불과했다.
‘압축, 나선, 물대포.’
-요나.
정령과의 교감은 단어가 아닌 의미를 통한 그림에 가까웠다. 자신이 상상한 의미를 그려서 요나에게 전달해야 했다. 그런 식으로 정형화할수록 보다 정확한 동작을 펼칠 수 있었다.
슈유웅, 철썩!
요나의 물대포를 정령으로 막은 유정은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채무 상환을 고민하는데, 왜 쐈냐고 쏘아붙이진 않았다. 그러기에는 방금 보여 준 정령과의 일체감이 실로 놀라웠다.
“방금 소환한 거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래?”
“잘.”
씨발, 존나 패고 싶다!
울화가 치미는 유정의 분노에 반 생도들도 합세했다. 자신들은 정령을 소환해 명령을 수행할 때까지 오랜 기간 고생했었다.
정령이란 게 그리 만만하지가 않아요. 얘들이 얼마나 까칠한데. 소환하자마자 자유자재로 소통하다니, 삶의 회의감마저 느껴졌다.
더군다나 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봐라.
원래 이 정도는 누구나 하는 거 아니냐는 문장이 생략되었다는 걸 듣지 않았는데 뇌리에 각인했다.
씨부랄, 심언가.
무진은 천재성을 드러내며 생도들을 내려다보았다.
“짐은 관대하니 청해 보도록.”
“……닥쳣!”
“허어, 이 미련한 것아, 정령에 마구니가 들었나 보구나.”
“그만해, 이 미친놈아!!”
“요나, 파이어.”
“요나는 물의 정령이라고!”
-요나, 뿌우우우!
얜 또 왜 하란다고 하는 거야?
물로 어떻게든 불을 쏴 보려는 요나의 몸부림이 안타까웠다. 저런 정신 나간 주인을 만나 고생길이 원했다.
“요나, 백만 볼트.”
“맘대로 해라!”
무진으로선 신경을 많이 쓴 고급 조크였다.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매번 건조하단 소릴 들었었다. 그래서 어울려 보려고 했던 말인데, 애석한 현실이었다.
-요나.
백만 볼트가 얼마만큼의 전압인지 요나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몸부림을 칠수록 유정은 한숨만 나왔다.
저딴 주인한테 이런 노력파 정령이 나오지? 하늘의 뜻을 도통 모르겠다.
“그래 봤자 정령으론 아직 내 상대는 아니거든.”
“힘 차이는 나겠지만, 기술에선 내가 곧 앞서겠지.”
“그 말 취소해, 이제 막 정령을 소환한 주제에 어딜 건방지게!”
“아니면 증명을 해 보든가.”
무진과 유정의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조 교관이 무지개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불렀다.
“얘들아.”
“예, 교관님.”
“지금 수업 중이야.”
“그렇군요.”
“나가서 손들고 있어.”
“검지 하나로 물구나무를 서겠습니다.”
“……?”
교실에서 당당하게 걸어 나가 검지로 물구나무를 서며, 팔굽혀펴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걸 30분 내내 하는데도, 운동 삼아 소소하게 한다는 표정이 압권이었다. 모두를 질리게 하는 무시무시한 체력과 힘이다.
“한 세트 더.”
“……이 개새끼!”
유정은 치가 떨렸다. 그나마 두 손으로 해서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난이도가 극악이다. 어떤 미친놈이 검지 하나로 물구나무를 서느냐고!!
칫!
그런 무진과 유정을 고깝게 보는 시선이 많았다.
정령반 1등을 따 놓은 유정은 그렇더라도, 무진이 나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인이면 무공이나 배울 것이지, 정령술을 우습게 여기는 것 같았다.
정령술 강화 술식에 대한 수업이 끝나자, 무진에게로 여생도가 뚜벅뚜벅 다가왔다.
“네가 그렇게 정령술을 잘 다뤄? 결투장으로 올라와.”
“……?”
이런 기분은 처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