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괜찮아, 처음이야(1)
아카데미 서열전은 의미가 있었다.
50위 내에 들면 특별 영재반인 s반에 선발되며, 우승자에게는 교장의 허락하에 아카데미의 보고(寶庫)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
영재반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헌터라면 반드시 거쳐 간 통과의례처럼 상징성이 있었다. 또한, 우승자는 대대로 아카데미의 보고를 얻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서열전 우승은 일생에 딱 한 번만 주어졌다. 영화배우가 신인상을 타는 것과 같았다.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영광스러운 기회였다.
4강전은 무진과 지수의 대결로 정해졌다.
권왕가의 약진이었다. 대대로 상위권에 오르기는 했어도, 우승자를 배출하지는 못했던 권왕가에겐 중요한 기로였다. 4강전만 해도 빼어난 성적이기는 하나, 우승과는 차이는 컸다.
친구이자 동문의 대결.
그 자체로도 흥미를 유발하지만, 무진과 지수가 서열전에서 보여 준 과정이 남달랐다. 서로 완전히 다른 의미로 누가 이기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직계한테는 안 되지.”
“안 되긴 뭐가 안 돼. 패턴이 단순해도 저게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지수가 꺾은 애들을 봐 봐, 칠대가문과 대형 길드 소속이라고.”
“둘 다 일방적으로 이기긴 했지.”
“재능과 화려함을 갖춘 지수의 승리야!”
“무식하긴 해도, 걸리면 지수도 무사하지 못할 걸!”
“설마 저 주먹으로 여자를!!”
“뭔 소리야, 여태 잘도 패고 올라왔는데!”
여자라고 해서 상대를 봐줄 거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소유정이 무진에게 처맞고, 토악질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같이 어울려 다니기에 화기애애하게 끝날 줄 알았던 모두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 주었었다.
무진의 평등한 주먹질이 인상적이긴 했지만, 지수의 승리를 점치는 분위기였다. 외모, 재능, 배경을 고루 갖춘 지수가 그래도 한 수 위라고 보았다.
기다렸던 4강전이 시작되려는 찰나.
-강무진 기권.
모두를 김빠지게 했다. 소속이 같기는 해도, 서열전의 우승이 걸려 있었다. 아카데미 보고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해 보지도 않고 버린 것이다.
아~~~!
우~~~!
안타까움과 비난이 섞였다.
대결을 기대했기에 아쉬움이 남았고,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한 무진의 선택을 조롱했다.
하나, 충분히 예상되는 시나리오였다. 굳이 동문 간에 전력 대결을 벌였다가 결승에서 지기라도 하면 낭패가 아닌가. 전력을 보존하는 차원으로 전략적인 선택을 했다고 봐야 했다.
그럼에도 야유가 판을 치는 연유는 이제 막 입학한 1학년이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야합, 연줄, 파벌을 형성하는 것이 좋게만 보이진 않았다. 저 나이 때는 실패하더라도 도전해야 했었다.
기권을 선택한 무진은 비무대 아래에서 지수를 망연히 바라보다 힘없이 돌아섰다.
아!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야유를 하다가 멈추었다. 자신들이 모르는 속사정이 있음을 짐작했다.
“너무 나쁘게만 볼 필욘 없잖아.”
“자기도 속상해하는 것 같은데.”
“동문인 데다가 지수는 권왕가의 직계잖아. 서열전 전부터 약속한 것일 수도 있지.”
“그 대가로 영약을 받은 거 아닐까?”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심금을 울렸다 말았다 멋대로 조종하는 무진이었다. 그걸 뻔히 알고 있음에도 입에 오바로크를 쳐야 했던 유정은 답답했다.
‘저 연놈들이 짜고 쳤다니까!’
유정은 무진과 지수가 4강전을 시작하기 전에 나눴던 대화를 모두 들었다.
-기권해.
-그래.
기권할 기미도 없었기에 가관이었다. 왜냐고 따져 묻지도 않았다. 기권하라니까, 그냥 해 버렸다. 저래도 되나 싶을 만큼 지나치게 무덤덤했었다.
그러고선 한다는 말이.
-참치 쏠게.
-18만 원.
-콜.
참치는 또 못 참지가 아니고.
고작 18만 원에 우승을 차 버렸다니, 코가 막히고 기가 막혔다. 무진과 지수의 거래 내막이 알려진다면 다들 자괴감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참치 한 마리를 통으로 사 줬지.
그러거나 말거나.
무진은 대결을 끝까지 보지도 않고 연무장을 떠나 버렸다. 말하지 않아도 속상한 감정이 구구절절 전해졌다.
“같이 가.”
유정이 그 뒤를 따랐다.
이렇게 되니 지수에게 배신당한 무진을 유정이 위로해 주는 말 같지도 않은 구도가 되었다.
복잡한 삼각관계?
이러면 또 관심을 끊기가 힘들지.
늘 그렇듯 사람들은 유명인의 치정을 좋아했다.
여기에 같이 다니는 검신가의 검화까지 끼어 있으니, 완벽한 이슈메이커였다.
‘그렇단 말이지.’
128강전에 들지 못했던 유지연은 그동안 속이 썩어 문드러졌었다. 무진과 지수의 활약상이 두드러질 때마다 속으로 이를 갈았다.
솔직히 지수의 재능이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유지연은 차선책으로 무진을 가지고 놀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할아버지의 수제자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땐 황당했지만, 마도의 계승자라고 하여 비웃었었다.
하나, 그런 무진조차도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실력이었다. 본가의 영약을 낼름 먹어 치웠다고 했을 땐 열 받았지만, 효과가 미미해서 그나마 안도했었다.
물론, 운만으로 4강에 오르진 않았다. 실력만 놓고 보면 지수 못지않게 무진도 강했다.
아카데미용이라고 하여 비웃음을 샀어도, 당장의 전투력은 최상위권이다. 흔들리는 관계를 잘만 활용하면 잘난 체하는 지수에게 한 방 먹일 기회였다.
‘근데, 이 망할 놈의 오빠는 왜 이렇게 뭉그적거리는 거야?’
근래에 들어 오빠의 행동이 수상했다. 어딘지 모르게 나사가 빠진 사람처럼 혼이 나가 있었다. 인벤토리를 열었을 때 화들짝 놀란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자기가 하자고선!’
손을 쓰고도 남았을 텐데, 안 쓰길 잘했다. 오빠도 무진을 이기기는 어려웠다.
망신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아니, 당했나? 에이, 아니겠지.’
다툼이 있었으면, 이렇게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다.
쓰읍!
비무대가 아닌 그 주변을 훑어보는 평범한 인상의 사내는 여물지 않은 감정의 변화에 입맛을 다셨다. 생도 하나하나는 별거 아니겠으나, 성장 잠재력을 놓고 보면 훌륭한 원석이었다.
‘저놈은 좀 문제가 있겠어.’
의도한 건 아닐지 몰라도, 생도들의 투쟁심에 불을 질렀다. 시기와 질투로 변질이 되었다면 모를까, 순수한 투쟁심은 작업에 방해가 되었다. 더욱이 천재성에 함몰된 녀석들이 알을 깨고 나오려고 했다.
나태함에 젖어 실패했을 때를 노리려고 했거늘.
‘변변치 않은 놈이 귀찮게 하는군.’
그는 완성된 형태를 원하지 않았다. 앞으로의 가능성을 고려하더라도. 더욱이 지나치게 눈에 띈다는 점도 걸렸다. 가급적 기회를 만들어서 치워 버리는 편이 나을 듯한 예감이 스쳤다.
‘조만간 처리해 주마.’
그 녀석한테는 제법 쓸 만한 재료긴 했다.
***
결승전을 보지도 않고 돌아섰다. 처음에는 둘이 짜고 쳤으니, 아카데미를 나온 후부터는 평소대로일 줄 알았다.
진짠가?
연기라고 하기엔 말 걸기도 껄끄러운 분위기다. 항상 자신감 가득했기에 우울함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유정은 분위기를 풀어 줄 겸 카페로 데리고 갔다. 평소 먹던 카페모카 큰 사이즈로 얼음동동 차갑게 해서 갖다 주었다.
이런 친구가 어디 있냐고.
매일 맞아 주지, 또 맞아 주지, 계속 맞아 주지.
커피도 사 주지……!
그간 무진을 만나고 있었던 나날을 돌이켜 본 유정의 눈 밑에 그림자가 생겼다. 상기할수록 우울해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쓸수록 빠져드는 저주받을 수렁이었다.
무엇보다.
“넌 뭐야?”
“박상원입니다.”
“누가 네 이름 물어봤어? 왜 여기 앉아 있는 거냐고?”
“친구가 우울해하는 것 같아서 따라왔습니다.”
“누가 친구야?”
“접니다.”
이 새끼도 또라이네.
관종을 넘어서는 놈들이 왜 이렇게 많아? 유정은 위기감을 느껴야 했다. 이러다간 인기와 관심을 모두 잃어버리는 수가 있었다. 항상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했다.
특히 이렇게 쑥쑥! 자라나는 관종은 철저하게 짓밟아 줘야 한다. 그래야 누가 더 강력한 관종인지를 체감하지.
“됐고, 넌 언제까지 침울해할 거야?”
“침울해한 적 없는데.”
“뭐? 그럼 여태 왜 취두부 먹은 사람처럼 매가리가 없었던 거야?”
“그래야 네가 커피를 사 주지.”
“……?”
무진의 한마디에 유정은 뒤통수가 얼얼했다. 그러니까, 일부러 우울한 척해서 본녀의 지갑을 열게 했다는 뜻이잖아.
“죽인다!”
“케이크하고 와플은 내가 사려고 했는데.”
“여기 [황천길 케이크]가 맛있더라.”
“제법이네.”
유정은 순간의 감정으로 대의를 외면하지 않았다. 케이크는 사랑이고, 카페모카보다 비쌌다. 모처럼 무진에게 얻어먹을 기회를 망칠 수는 없지. 오늘 같은 날이 흔하지 않았다. 아직 갚아야 할 소원과 빛도 태산처럼 많았다.
‘난 호구가 아니라고!’
케이크와 와플을 사수해야 했다.
무진은 유정에게 카드를 주었다.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먹으라며. 이런 말 하면 자랑 같지만, 저축한 돈이 꽤 되었다. 아버지가 힘들게 벌어서 주신 돈이라 대부분 쓰지 않고 모았었다.
박상원이 기회다 싶어 말을 걸었다.
“신기하다.”
“어떤 점이?”
“보통은 날 상대하면 다들 방심하거든. 그런데 넌 가차 없이 냅다 주먹을 날렸어.”
“또 때려 줄까?”
“……아냐!”
박상원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겪어 보지 못한 경험이라 신기하기는 한데, 저 주먹을 또 맞으면 진짜로 황천길로 직행할 것 같았다.
박상원은 열일곱 살이라고 하기에는 키가 150cm…… 제길! 그래, 149cm다!
몸도 왜소한 편이고, 목소리도 변성기를 지나지 않아서 잼미니로 오해하는 일이 빈번했다.
장난치려고 초등학교 수업을 들었는데 1교시부터 마지막 교시까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웃지 못할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
눈물 없이 듣기 힘든 슬픈 사연이긴 하나, 지금은 중요하진 않았다.
오해하든, 말든 교복을 보면 나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통상적으로 초등학생이 교복을 입지는 않는다. 그래서 더더욱 얕보이는 경향이 강했다.
“날 그렇게 세게 때린 사람은 처음이야.”
“……?”
갑자기 라이트노벨 컨셉을?
번뜩, 움찔!
무진의 두 눈에서 섬뜩한 기운이 번졌다. 가까이 다가오면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는 살의가 뿜어졌다. 구석에서 자기들끼리 뭘 해도 상관없지만, 눈앞에선 가만두지 않는다.
오싹!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던 사람들도 오싹한 한기에 움츠러들었다.
당연히 박상원이 체감하는 공포는 남달랐다. 비무대에서 보여 주었던 모습은 새 발의 피였다.
“……오해야!”
“빨리 말했어야지!! 하마터면 죽이고 나서 물어볼 뻔했잖아. 하아아, 살인자가 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진담은 아니지?”
“당연히 농담이지.”
농담치고 무지하게 살벌했다. 이건 잼미니로 오해를 받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긴, 오해를 일으킬 문장이기는 했다. 이럴 때는 당당히 정체성을 밝혀야 했다.
“나도 여자가 좋다고!”
“쉽지 않은 삶이겠네.”
“너무 대놓고 말하는 거 아냐, 상처받는다고.”
“내 알 바 아니지.”
아직 성장기가 끝나지는 않았어도, 잼미니로는 여자를 만나기가 어려웠다. 이 외모로 끝까지 살아가야 한다면 삶이 순탄치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이토록 직설적으로 말하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다들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쑥쑥! 큰다고 위로를 하곤 했었다. 반면에 무진은 하는 말마다 비수를 꽂는다.
“현실을 직시해.”
“그래도 귀엽다고 한 애들이 있었다고!”
무진은 유정에게 대놓고 물었다. 이런 얘기는 돌려 말해 봤자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았다.
같잖은 동정과 위로일 뿐, 그런다고 사귀어 줄 거 아니잖아. 아주 특이한 성향이나 케이스라면 모를까.
“너라면 사귈래?”
“미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