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서열전(5)
교장과 교관의 예상대로였다.
무진은 대련 생도를 연달아 격파했다. 이민용과의 대련이 고전한 것처럼 느껴질 만큼 압도적인 역량을 보여 주었다. 상대로선 허를 찔리고 나서야 현실을 깨달았다.
무진은 운이 아님을 입증했다. 그러면 서열전의 중심이 되어야겠지만,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권왕가의 숨겨진 공주님, 유지수의 활약상이 놀라웠다. 강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었던 용신가의 김정구와 천상길드의 장민준을 차례로 격파한 것이다.
당초 김정구와 장민준도 압도적으로 이겨 왔기에 지수의 패배를 거론했었다. 한데, 그 둘을 연속으로 꺾어 냈으니 파란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했다.
반대로 우승을 노렸던 김정구와 장민준은 물론 파벌까지 침울해졌다.
정작 서열전의 스타가 된 지수와 무진은 주변의 관심에 무관심했다. 차세대를 지배할 신성의 대결로 바라봤겠지만,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애들 놀이터에서 어른이 끼어서 잘 논 격이었다. 김정구와 장민준이 같은 학년에선 압도적일지 몰라도, s급 헌터와 비교하면 격차가 있었다.
무진은 쏟아지는 시선을 무시한 채 점심을 먹었다.
서열전은 오전 오후로 대결을 나누었고, 중간에 2시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장어덮밥을 학식으로 줄 줄은 몰랐네.”
“영종도 아카데미가 학식으로 꽤 유명해. 일부러 찾아와서 돈 내고 먹는 사람들도 왕왕 있거든.”
“아무나 못 들어온다며?”
“그냥 그렇다고.”
무진은 다음 대결보다 장어덮밥의 양념에 진심이었다. 이 비법 양념을 알아내기 위해서 혀의 감도를 극한으로 끌어냈다.
[무진류 극한식도락 천상의 혓바닥!]
천상의 혓바닥을 발동하자 양념의 맛을 내는 광경이 뇌리에서 순차적으로 구현되었다.
“간장, 생강, 올리고당, 설탕, 맛소스, 맛술이 아주 절묘하게 배합이 되었어.”
“미친놈!”
무진과 외식할 때마다 지수는 간혹 이 새끼가 진성 또라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맛을 집에 가서 그대로 구현하는 미친놈이니까.
‘왜 그걸 무공 이름처럼 적냐고!’
자기 이름을 빛내지 못해서 안달인 새끼였다.
여차여차 식사 후 무진과 지수는 아카데미의 풍경을 한가롭게 즐겼다. 주변의 관심이 많았지만, 함부로 다가오진 않았다. 권왕가라는 확실한 배경을 뚫고 들어와 스카우트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칠대가문보다 좋은 조건의 길드나 문파는 거의 없었다.
흥.
무진과 지수의 여유가 거슬리는 유정이었다. 서열전 때문에 피똥 쌌던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아주 그냥 여유가 철철 넘치시는구나. 상대하는 애들이 벌레보다 못한가 보지!”
“그렇지 않아, 32강.”
“저승사자는 뭐 하나 몰라, 이놈 안 잡아가고!”
“32강께서 화가 많이 나셨구나.”
32강전에서 무진에게 패한 유정은 울화가 치밀었다. 전략을 바꾸어서 극단적인 도박수를 썼지만, 정령과 함께 어이없이 탈락했다. 열불이 터져서 비꼬았더니, 역관광에 마상 제대로 당하고 말았다.
“그 정도면 잘한 거야, 32강. 나도 깜짝 놀랐어.”
“……그만해, 내가 잘못했어!”
유정은 패배를 자인했다.
대결로도, 말로도 이길 수가 없었다. 대화를 이어 갈수록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담담하게 갈구니까, 더 열이 받는다.
“따로 노니까 각개격파를 당하지.”
“말처럼 쉬우면 넌 뒈졌어.”
“각성이나 성좌에 지나치게 연연하는 건 좋지 않아.”
“예예, 잘나신 놈께선 뭐든 잘하시겠죠.”
“32강은 말귀도 어둡네.”
“이 새끼가!”
자꾸 뼈를 때리냐고.
저놈의 32강, 이러다가 아카데미 내내 32강 소리 듣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32강이 어때서? 설마 32강에 못 들면 사람도 아니라는…… 아, 그렇구나.”
“……안 할게, 제발 그만해!”
유정은 듣는 사람이 없나 병신처럼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가 들었으면 짱돌로 이마를 백 번 찍혀도 할 말 없었다.
한순간에 우월 의식에 젖은 인종차별자가 되었다. 조화와 균형을 지향하는 정령사에겐 최악의 욕이었다. 비록 관종이긴 해도, 최소한 악의는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하긴 32강이 대단한 건 아니지.”
컥!
주화입마가!
사람을 들었다 놨다, 언제까지 롤러코스터를 타게 할 셈이야!
유정은 멀미가 나서 정신마저 혼미했다.
“쟁탈전이 있다니까, 잘해 봐.”
“졌다고, 대체 언제까지 이겨야 직성이 풀려!”
“나 그런 사람 아니다. 널 이겼다고 기쁘지도 않고.”
“……그게 더 나빠!”
네가 그렇게까지 대단하지는 않다는, 무진의 담백함이 압권이었다. 원래 저 정도로 하면 보통은 그만한다. 그러나 사람 하나 보낼 때 무진의 악랄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지수와 혜진도 소름이 돋았었다.
한편으로 매번 당하면서 하루살이도 아니고. 잊어 먹고 달려드는 유정이도 대단했다.
아니면 닭대가리?
유정이와 비교해서 괜히 닭한테 미안해지는 지수와 혜진이었다.
“장어 양념 소스를 개량해서 통닭하고 버무리면 괜찮을 것 같은데, 이름 하여 풍천장어통닭, 어때?”
“……?”
무서운 놈!
장난이라고 하기엔 매우 진지했다. 오늘 저녁부터 풍천장어통닭이 밥상에 올라올 것 같았다.
츄릅!
빌어먹을!!
어째서 맛있을 것 같지?
승승장구.
지수는 도제진가 진천예, 창황정가 정우민을 격파했다. 칠대가문과 대형 길드의 직계를 연달아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서열전은 하루 안에 펼쳐진다. 무난한 대진이었다면 또 모를까?
교장도 지수의 권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같은 학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완숙함이었다.
“허어, 권왕가에서 칼을 갈았군.”
“권로를 완성했다고 봐야겠습니다.”
권로(拳路)란 초식의 의미를 이해하고, 틀을 깨어 자신에게 맞는 권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이었다. 아무나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재능을 타고나야 하며 초식의 완성도가 높아야 했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단련하고, 실전을 겪어야 한다.
이제 막 아카데미에 입학한 1학년이 권로를 완성해 나간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성취였다. 이는 천재란 범주마저 넘어선 재능이었다.
“천재성만 믿고 설치는 녀석들에게도 재앙이겠어.”
“잠재력도 상당합니다. 어디까지 발전할지 모르겠지만, 권왕의 입이 찢어지겠습니다.”
지수는 우승 후보로 점쳤던 기대주와도 격이 달랐다. 연이은 격전에도 기량의 저하는커녕 숨겨진 역량의 차이가 컸다.
‘나쁘지 않군.’
천재란 늘 본인의 자질에 취해 게으름을 피우는 경향이 있었다. 재능도 노력하지 않으면 흐려지기 마련이었다. 세월이 쌓일수록 지나간 시간의 아쉬움이 커질 때였다. 도달할 목표의 등장은 동기부여를 위해서도 필요했다.
‘그렇더라도 지나치긴 해.’
뛰어나다는 평가보다 익숙하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대결 중 갑작스러운 변화에도 능수능란했다. 흔들림 없이 상대를 제압하는 침착함은 발군이었다.
그래서 의심이 들기도 했다. 대체 어떤 수련을 해야 저 나이에 저런 완숙함을 지닐 수 있을까?
교장의 의문에 지수도 할 말은 많았다. 무진과 겨루다 보면 저절로 알아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수가 유명인들을 꺾어 내며 대회장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한다면 무진은 우직하게 강자의 면모를 각인시켰다.
하나, 매번 하나의 기술로 승부를 보는 원툴, 원패턴의 무공이었다. 이러면 역으로 약점을 찌르고, 파훼법이 나와야 하거늘. 누구도 무진의 단순한 패턴을 공략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우우우우!
때려치워라!
관중석은 야유로 들어찼다.
8강에서 무진을 상대하는 박상원은 죽을 맛이었다. 대결 전 무진을 유심히 관찰하여 분석했었다. 실상, 파훼법은 간단하다. 좀 더 빠르고, 방어력을 무력화할 공격이면 되었다.
그런데 말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박상원은 스트렝스를 육신에 걸어 힘을 강화한 후 무진에게는 바인딩을 걸었었다.
무진을 꼼짝 못 하게 한 후, 가속 마법으로 마무리하려 했던 박상원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4급 마력이 아니면 무리야.”
“제기랄!”
욕이 튀어나왔다. 1학년이 3급 마력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취였다. 4급 마력은 최소 3학년은 되어야 했다. 막 각성한 것치고 박상원은 대단한 잠재력을 선보였다. 하물며 2계식 마법을 제법 잘 구사했다. 8강까지 운만으로 오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대로 승승장구할 줄 알았지만, 임자를 제대로 만났다.
3계식 마법으론 무진을 상대로 시간을 끌지도 못했다. 바인딩은 허무하게 끊어져 버렸고, 강화된 육체는 권압에 쪼그라들었다. 가속 마법으로 겨우 피하고 있었다.
붕붕!
후아아앙!
주먹이야, 황천길이야?
‘……저거 맞으면 난 죽는다고!’
자신은 마법사지, 무인이 아니다. 기실 무인도 저거 맞으면 뒈질 거다. 무진을 상대한 생도마다 어째서 같은 수법에 당했는지 뼈저리게 체감했다. 이건 우리 수준으론 답 안 나오는 괴물이었다. 한 대라도 잘못 맞으면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쫓고 쫓기는 대결의 양상이었다.
박상원은 비무장을 최대한 활용하여 겨우겨우 도망치고 있었다. 관중석에서 야유가 나올 만했다.
박상원도 마냥 도망만 다니진 않았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마법을 썼었다.
‘이 여우 같은 새끼가!’
곰 같은 덩치에 모두가 속고 있었다. 무진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깨닫지 못할 뿐, 박상원은 마법사에게 무진이 얼마나 치명적인 존재인지를 체감했다.
어중간한 마법은 통하지 않았다. 무진은 마도의 원리와 흐름을 이해하고 있으며, 역산할 수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급하게 꺼낸 박상원의 마법은 무용지물이었다.
1계식 마법은 몸으로 맞아 버리고, 기껏 사용한 3계식 마법은 역산당해서 제 위력을 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정면 대결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헉!
그러다 외통수에 걸렸다.
수가 통하지 않아 가속만 남발하던 박상원의 말로였다. 도망쳐 봤자, 무진의 스텝을 벗어나진 못했다.
헙!
코앞에서 무진을 마주한 박상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정면에서 마주한 기분이었다.
“……항!”
발사된 핵미사일은 돌아오지 않았다. 항복이란 단어를 완성하기도 전에 배에 구멍이 난 줄 알았다.
쩌어엉, 쿠웨웨웩!
비무대 주변은 투명한 결계가 쳐져 있었다. 날아갔던 박상원은 결계에 맞고 비무대의 반대쪽까지 튕겼다. 한 대 쳤는데 세 대 맞은 효과를 자아냈다.
쿠다다당, 철퍼덕!
푸른 하늘을 올려다본 박상원은 게거품을 시원하게 내뱉었다. 돌아간 동공도 돌아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헐!
결과에 다들 황망했다.
그렇게 도망 다닐 거였으면 기권을 해도 되었다. 기권하면 욕을 먹기는 하겠지만, 저런 비참한 꼴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패배를 해도 아주 더럽게 했다. 아무것도 보여 주지 못한 허망한 패배였다. 아카데미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게 될 것이다. 그럴 바엔 휴학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반면, 상위권에 속한 1학년 생도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무진의 대결을 지켜볼수록 체감한 것이다. 저 지겨우리만큼 우직한 원패턴이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다들 박상원을 비웃지만, 대처 자체는 정석에 가까웠다. 자신들도 무진을 상대로 비슷한 수법을 썼을 것이다.
‘젠장, 저 말도 안 되는 내구력을 어떻게 깨지?’
‘스피드는 보통이라도, 눈이 너무 좋아.’
‘비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어.’
‘우직하게 코너로 밀어붙여 한 방에 끝내다니!’
원패턴임에도 아카데미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는 치트키나 다름이 없었다. 실력을 쌓아 전성기에 다다랐다면 모를까, 같은 학년에선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아카데미에서 살상 장비를 쓸 수도 없고.
씨익!
그런 생도들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이 무진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이 발악을 해 봤자, 같은 학년 내내 나보다 아래라는 강자의 여유였다.
빠득!
그러한 무진의 여유는 생도들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진은 아카데미용이었다. 여기서만 무적이지, 현장에 나가면 무적에 가까운 장점을 활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발전 가능성이 없는 놈이 잘난 체를 하고 있으니 빡이 칠 수밖에.
‘비대한 온실 속 화초 새끼가!’
‘장비만 착용해도 넌 안 돼!’
‘졸업하면 아무것도 아닌 새끼가!’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들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열불 터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당장 분풀이하고 싶어도, 만만치 않았다. 하물며 배경으로 찍어 누르기엔 무진의 소속이 권왕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