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서열전(3)
승자로서 어차피 안 줘도 그만이었다. 다만, 500원도 감지덕지하라는 표정은 정말 킹받는다.
‘두고 봐, 내 기필코 정령왕을 소환하고 말 테다!’
무진은 유정의 불타오르는 투지를 응원했다. 사람마다 성향이 천차만별이기에 동기부여가 쉽지가 않았다.
유정은 격려보다는 도발이 잘 먹혔다. 포기하지 않는 투지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령왕이 음료수 사 오면 재밌겠네.’
-서열전 128강전을 시작하겠습니다.
128강전부터는 무작위 추천으로 사전에 고지되었다.
무진과 일행은 비무대가 보이는 계단에 앉아서 대기했다. 계단 주변으로 상위권에 속한 생도들이 있었다.
칠대가문과 대형 길드의 생도들을 중심으로 파벌이 형성되었다. 어떤 세상도 힘과 권력에 대한 갈망은 매한가지였다. 성공을 위해 줄을 대거나, 인맥을 쌓으려는 생도들이 많았다.
아카데미의 목적이 순수한 실력 향상보단 인맥으로 인한 파벌 경쟁으로 변질되었다.
여러 파벌 중 용신가의 김정구와 천상길드의 장민준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 주변으로 모인 생도들도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가문의 후광으로 치부하기엔 둘의 외모도 상당했다. 미남의 정석과도 같은 김정구와 선이 굵고 거친 장민준의 극명한 대비가 매력적이었다.
다른 쪽으론 도제진가의 진천우, 진천예와 창황정가의 정우민도 여러 생도와 같이 있었다.
전부 그렇다고 볼 순 없었다.
인맥에 의존하지 않고, 본인의 실력을 중시하는 부류도 보였다. 그중 섣불리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는 생도들도 있지만, 멋지진 않았다. 애송이들이 고독한 이리를 흉내 내는 것 같다고 할까?
무진도 파벌을 형성 중이었다.
여자 셋밖에 없지만, 칠대세가 중 세 곳이 모였으니 파벌 중에선 가장 끗발이 셌다.
무진은 굳이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예스를 외치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다. 개인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배경도 중요하다고 여겼다.
어쨌든 그 중심에 떡하니 자리하니 관심이 집중되었다.
‘저놈 뭐야?’라는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가장 많았지만, 10단계 통과자라는 점이 조금은 상쇄했다. 확실히 아예 듣보잡보다는 설득력이 있어 다툼의 여지를 줄였다.
그러나 적운길 같은 소갈딱지들이 아예 없기를 바라는 건 배부른 투정이었다.
유정이 음료를 가지고 왔다.
“음료는 역시 콜라지.”
무진은 탄산 강한 콜라 원샷을 좋아했다. 과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톡 쏘는 그 맛이 일품이었다.
우리나라 콜라는 왜 이 맛을 못 만들지? 안타까웠다. 콜라 하나로 세계 굴지의 대기업이 된 걸 보면 실로 대단했다. 치아 브레이커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곤 있지만.
“와, 콜라살인마!”
“이상한 별호 붙이지 마라.”
“그거 2l라고!!”
“남의 소소한 취향에 가타부타 말 많네.”
요즘 콜라값이 오르긴 했으나, 정령가에겐 사소한 부담이었다. 여하튼 콜라 좀 많이 마셨다고 정령가가 망하진 않는다. 그걸 탓할 거면 칠대가문에서 빠져야지.
“어떻게 트림을 안 하지, 500ml도 아닌데?”
“천무지체라서.”
“미친놈!”
“무극지체일지도.”
갖다 붙이면 다 되는 줄 알아?
유정이 판단하기에 제일 이상한 놈이 바로 무진이었다. 이럴 때 보면 정말 무식해 보인다. 그렇다고 만만하냐? 전혀 그렇지 않았다. 허술해 보이는 것조차 상대를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였다.
‘틀린 말은 아닌데.’
무진은 딱히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천무지체와 무극지체를 본 적은 없지만, 책에서 나온 육체의 기능을 살펴보면 얼추 비슷했다. 게임상의 만렙 신체로 하늘이 내린 무(武)의 재능과 무(武)로써 극한에 이른 신체였다.
무진은 만독불침과 금강불괴를 더했다. 그러나 장담은 하지 않았다. 왜냐? 독에 중독을 당하거나, 상처가 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내 몸에 독 좀 넣어 주고, 의도치 않은 상처 좀 내 주면 좋겠는데.’
그럴 만한 생도들이라면 이 주변에 있을 수밖에 없다. 수많은 생도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한 이상, 자신만의 특수한 속성을 가지고 있을 테니 자못 기대되었다.
씨익!
무진의 탐욕적인 미소에 지수는 ‘저 새끼 또 뭘 훔치려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서 얼빠진 채 한숨을 쉬는 유정이 안타까웠다. 이미 빼먹을 만큼 빼먹었는지 토사구팽은 기본이고, 순전히 날먹이다.
서열전을 기다리며 콜라로 노가리 까는 와중.
또각, 또각!
우리 쪽으로 한 여생도가 걸어왔다.
주변의 이목이 쏠렸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았다. 여생도의 외모가 혜진이와 판으로 찍어 낸 듯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혜진의 일란성쌍둥이 동생, 천혜수였다.
“내 동생이야.”
“안녕, 만나서 반가워.”
혜수는 손을 잡으며 정답게 인사를 했다. 말 걸기 어려운 혜진이와 달리 붙임성이 있었다. 며칠 동안 함께했던 혜진이보다 요 몇 분 동안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어느새 동화되어 동고동락한 동료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그새 친구를 많이 사귀었는지.
“언니, 이따가 봐.”
“그래.”
자매간에 서로를 응원하는 모습이 훈훈했다. 감정이 예민한 시기라, 조금만 어긋나도 소원해질 수 있었다. 다행히 재능은 둘 다 뛰어난 편이었다. 그저 혜진의 검에 대한 자질이 월등할 뿐이지.
“치고받고 싸울 땐데, 사이가 좋구나.”
“그래, 내게는 없는 능력이야.”
혜진은 동생을 대견해했지만, 말재주가 없어 내색하지는 않았었다. 서운할 수도 있을 텐데, 어렸을 때와 달리 먼저 다가와 주는 동생이 고마웠다.
“나보단 못하지만, 너도 좋은 언니야.”
“재수 없어.”
지수는 약을 주면서도 병을 주는 걸 한시도 잊지 않았다. 삶도, 무공도 조화를 이루어야 했다. 칭찬만 받다 보면 사람이 나태해질 수도 있었다. 쌍욕도 먹어 봐야 균형감 있게 발전하는 법이다.
실제로 빌런과 싸울 땐 지저분한 패륜적인 욕은 기본 옵션이었다. 더러운 혓바닥에 농락당하지 않으려면 같이 쌍욕을 해 줘야 했다.
그런데 욕이 서툴러 더듬거리면 병신 같아 보인다. 평소에 욕도 자주 써서 업그레이드해 줘야 했다.
무진은 혀를 찼다.
“독하다, 독해.”
“전적으로 혜진이를 위해서야.”
인정하기에는 대련 때마다 꼬박꼬박 짓밟아 주고 있었다. 잡초도 그렇게 밟으면 더는 못 자라지 않나? 이삭 밟기의 정석을 보여 주었다.
‘꼭, 틀린 말은 아니지.’
검에 대한 자질을 놓고 보면 혜진이는 대단했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 한계선을 두고 있었다. 이해는 간다. 항상 내려다보면서 대결을 하다 보니 무의식적인 습관이 심신을 지배한 것이다. 스스로 최선을 다한다고 여기지만, 본인도 모르게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실력이 늘기는 했으니까.’
혜진은 근래에 들어 정체기였을 것이다. 그 타개책으로 대련을 청했지만, 만족할 만한 성취를 얻지는 못했을 테고.
하나, 소성을 얻고서도 지수에게 일방적인 패배를 당한 이상, 더는 한계선을 둘 수가 없게 되었다. 리미트를 걸어 놓았을 때와 아닐 때의 차이는 컸다.
“좋아 죽는 표정을 봐선 이해 안 가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지.”
“사적인 감정은 없었다니까.”
“알았어.”
“진짜야.”
피해 당사자인 유정과 혜진은 가만히 있는데, 둘이서 협상을 마쳤다. 마치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갈라 먹을 때랑 비슷했다. 힘이 없는 분단국가의 서러움을 유정과 혜진은 몸소 체감하고 있었다. 이래서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하는 김에 무진은 서열을 정해 줬다.
“이번에도 유정이는 꼴찌 하겠다.”
“이번엔 달라.”
“아니, 이번엔 더 힘들어.”
“어째서?”
“비무대는 협소하잖아.”
너무나 확실한 조건에 유정은 말문이 막혔다. 비무대보다 넓은 결계 안에서도 사로잡혀서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맞았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자 몸서리가 쳐졌다.
‘그나저나 말해 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남보다 못한 가족이라면 또 몰라, 지금 말하면 역효과야.’
‘그러다 잘못되면?’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야.’
전음을 보낸 지수는 입맛이 썼다. 어떻게 보면 이런 쪽으론 무진이 더 비정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말이 옳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와아아!
서열전의 열기가 더해 가는 가운데, 무진의 차례가 되었다. 상대는 혈천길드 길드장의 아들 이민용이었다.
10개의 대형 길드 안에서도 혈천길드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초대형 길드였다. 또한, 길드장인 이극환은 십대초인의 일인으로 혈제로 불린다.
이민용은 혈제의 아들로서 길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최상위권의 성적으로 입학했다. 특수 속성과는 별개로 모든 능력치가 고르게 높았다. 1학년에서 두각을 나타낼 신성으로 대내외적으로 기대치가 상당했다.
상대적으로 무진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입학시험 때만 해도 권왕가의 속가제자로 알려졌는데, 별안간 권왕의 숨겨진 수제자가 되었다. 신분제가 사라졌다곤 해도, 하루아침에 신분 상승을 했다.
10단계 통과로 최상위 성적표를 얻었다곤 해도, 권왕의 수제자는 과할 수밖에 없다. 하물며 멀쩡한 제자들 놔두고, 이제 막 각성한 생도를 수제자로 선택했다니 더더욱 이치에 맞지 않았다.
권왕가의 저의가 의심스러운 사람들은 그 짧은 시간 무진에 대해서 파고들었다. 결과적으로 상상도 못 한 내용이 흘러나왔다.
권왕의 수제자는 맞았다. 다만, 권왕가의 적통이 아닌 화염마도의 계승자로서 선택을 받았다.
밝혀진 내막에 사람들은 며칠 동안 황당함을 지우지 못했다. 권왕의 이름이 마법협회의 명단에 적혀 있다고는 하나, 마법사라고 하기엔 찜찜하다. 일례로 그게 마법인지, 폭력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또 궁금해졌다.
대체 왜 그런 되지도 않는 짓거리를 했는지. 알다시피 우리나라 사람은 다른 건 다 참아도 궁금한 건 못 참는다.
그리고 밝혀진 또 다른 내막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가공할 신력을 선보여 권왕가의 진신무공을 전수하려고 했지만, 평범한 내력이 발목을 잡았다.
특단의 조치로 권왕가의 영약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공력만 받쳐 준다면 패도를 지향하는 권왕가의 무공이 빛을 발할 줄 알았던 것이다.
웬걸.
실체가 영약 잡아먹는 하마였다. 원래 좋은 영약일수록 흡수율도 빠르고, 공력으로 전환율도 높았다. 일례로 킹크랩을 50만 원을 주고 샀는데 수율이 30%도 안 나온 것과 같았다.
“이거 참 골 때리는 놈일세.”
“신력은 이미 일반 헌터는 꿈도 못 꾸는 수준이잖아.”
“그럼 뭐 해, 영약 전환율이 폐급인데.”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잖아.”
“이미 쏟아부은 영약이 아까워서라도 못 버리지.”
“버렸다가 성좌 선택 시 무한공력이라도 나오면 남 좋은 일 시키는 거고.”
내다 버리기엔 무척이나 아깝고, 데리고 있자니 당장은 뾰족한 방도가 없는.
더욱이 지금은 약하지도 않았다. 환술이나 환상에 약하다는 것도 장비발로 메울 수는 있었다.
저벅, 저벅!
무복을 갈아입은 무진은 비무대로 천천히 올라갔다. 주변의 아리송한 표정들도 이때만큼은 압도되었다. 갓 중학교를 졸업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압도적인 신체였다.
일부러 반소매 무복을 입은 효과가 드러났다. 지금 당장 길거리에서 싸움을 벌여도 우승할 상이었다.
“와, 도복이 뜯어지겠다!”
“저런 몸은 대체 어떻게 만드는 거지?”
“열일곱 살이 저래도 되는 거야?”
“옛날에 태어났으면 천생 장수다!”
“저거 신종 스테이로드인 오크로이드야!”
“그거 맞으면 털이…… 말 안 하련다!”
무진은 기백을 숨기지 않았다. 여러 가지 복잡한 시선 속에서도 담담했다. 그러한 모습이 주변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풍겼다.
사뿐.
이민용도 비무대로 올라왔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사위를 압도하는 무진의 기백에도 이민용은 여유가 있었다.
씨익!
되레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웃었다. 절대 패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10단계를 통과하다니, 정말 대단해. 나도 전력을 다할 테니, 후회 없는 대결을 해 보자.”
“기대에 부응해 볼게.”
훈훈한 덕담과는 달리 기세와 투기가 살벌한 대치를 이루었다. 맞부딪치기도 전에 대결은 시작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맛있게 요리해 주마.’
명분은 친구를 위한 만찬.
칠대가문과 대형 길드 간 사이가 좋지는 않지만, 이민용은 적운길과 친분을 나누었다. 대단한 의리를 내세울 만큼은 아니더라도, 주고받음은 확실했다.
[그 개새끼, 아카데미에서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하도록 서열전에서 망신을 톡톡히 줘!]
며칠 전 적운길은 요구를 들어주면 오우거의 혈정(血精)을 구해 주겠다고 했다. 혈정은 던전에서 발견되는 마물의 피로 뭉쳐진 정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