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서열전(2)
“아버지, 신수가 환해지셨네요.”
“그래, 네 덕이다. 됐냐?”
“오래오래 사세요.”
“네 속셈이 훤히 보이는구나.”
20살과 50살은 나이 차가 커 보이지만, 320살과 350살은 친구처럼 편해진다. 이게 바로 하락장 시 물타기의 정석이었다. 수익률은 플러슨데 돈은 못 버는.
의외로 지수의 아버지는 화끈했다. 서열전을 하지 않았음에도 영약을 보내 주었다.
다만, 만년삼왕이 아닌 천년삼 열 뿌리였다.
산술적으로 따지면 동탄데, 효능은 천양지차다. 만년삼왕은 흡수 시 2갑자를 얻는 반면, 천년삼 열 뿌리는 반년 치의 공력에 그친다.
‘통이 큰 것 같으면서도 교묘하시다니까.’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겉으론 얼추 비슷했다. 그러니 만년삼왕 대신 천년삼 열 뿌리로 퉁쳤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깝지만, 하는 수 없지.’
무진도 그 이상으로 요구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본인이 복용할 용도로 달라고 했지만, 천년삼은 아버지의 배 속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무단 용도 변경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절대실드 같은 거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요.”
“내가 애도 아니고, 지금도 과해.”
“아버지를 두고 아카데미에 가야 하는 제 심정이 어떤지 아세요?”
“좋으면서 지랄 좀 그만해라.”
무진은 아버지가 좋았다. 밖에서는 형식을 꼬박꼬박 차리지만, 집에서는 누가 아빠고 아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만큼 편한 관계임에도, 지켜야 할 선은 반드시 지켰다.
“태워 줄까?”
“지수가 오기로 했어요.”
“보기 좋구나.”
“버스 떠난 지 오래예요.”
산하는 아들의 연애를 간섭하진 않았다. 아들이 좋다면 좋은 거고, 아니면 아니었다. 스스로 절제하고 옳은 방향으로 가기에 믿었다.
“다녀오세요.”
“저녁때 술 한잔하자.”
“자꾸 그러시는데, 저 미성년자예요.”
“술은 아빠한테 배우는 거야.”
흥, 아저씨한테 이미 배웠는데요! 서운하실 테니, 티는 내지 않았다.
“남들이 욕해요.”
“취하지도 않으면 엄살은.”
무진의 신체는 자연 치유 정화력이 극한에 이르렀다. 술을 마셔도 몸 안에 들어가는 즉시 정화되어 주기가 빠져 버린다. 마시고 바로 음주측정기를 불어도 0.0000이 나오는 사기캐였다.
아버지를 보낸 후.
권왕가의 무복이 아닌, 아카데미 생도복을 입었다. 입학시험 전과 후의 대우가 달라졌다. 생도의 신분이라 제복을 입어야 했다.
물론, 대련이나 현장 테스트에는 전투복 착용이 자율이었다. 생도복은 말 그대로 등하교 시 입는 교복과 같았다.
입학시험으로 절반이 떨어졌다. 실제로는 떨어졌다기보다 포기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통과할 수준이 되어도, 벽을 체감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더욱이 입학시험을 통과해도 서열전이 남아 있었다. 실전과 같은 일대일 전력 대련으로 대부분 본인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악착같이 버티고 버텨 상급 성좌의 선택을 받을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일확천금의 기회는 잘 오지 않았다. 어설프게 남아 있으면 6년을 허비하는 꼴이 된다.
그렇다고 마냥 비관적으로 볼 필욘 없다. 어떻게든 헌터가 되기만 하면 벌이는 괜찮았다. 단지, 돈을 버는 만큼 목숨을 걸어야 할 뿐이다.
과거보다 던전 공략과 마물 사냥은 능력을 세분화하여 안전성이 높아졌다고는 하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산업재해보다 3배 이상 높았다.
서열전에 대한 세간의 기대와 관심은 컸다. 또한, 생도들에게도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서열전에서 최소 3,000위에 들어야 영종도 헌터 아카데미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국내에 있는 10개의 헌터 아카데미 중 영종도의 시설과 인력이 최고였다. 엘리트를 집중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본교이기 때문이다.
분교에 해당하는 아카데미의 시설도 나쁘진 않지만, 탑의 존재와 국가 간 교류를 고려하면 질적인 차이가 컸다.
입학시험과 서열전은 영종도에서 다 같이 치르고, 순위에 따라서 분교로 분배가 이루어졌다. 생도 대부분은 적어도 서울에서 가까운 지역의 아카데미로 가기를 원했다.
그렇다고 기회가 없진 않았다. 각 분교에서 최상위에 속하는 생도는 영종도로 올 자격이 주어졌다.
반대로 영종도에 속해 있다고 해서 나태해지면 분교로 떨어질 수 있었다. 이는 생도로서 끊임없이 분발하기 위한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서열전은 입학시험에서 이루어진 테스트를 반영하여 치러진다. 점수가 높을수록 상위에 배정되며, 하위 서열에서 올라오기란 굉장히 힘들었다. 개천에서 용이 나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그리 이상적이지 않았다.
하위에 있을수록 대련이 많아진다. 더욱이 서열전의 기간은 정해져 있었다. 그 안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이거나, 이겨야 하는데 말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혹여, 부상을 입어도 올라가고 싶으면 연전을 치러야 했다.
그것이 입학시험에서 최선을 다하는 연유였다.
실력을 숨겨 봤자 서열전이 불리하고, 아래서부터 위로 급격히 치고 올라가면 관심 생도로 구분된다. 문제가 없으면 다행인데, 숨겨진 배후가 있다면 아카데미에서 집중적으로 관리했다.
웅성, 웅성!
무진이 들어서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10단계 통과가 여론전으로 옅어지긴 했어도 이름값은 남았다. 하나, 전적으로 무진 때문이라고 하기엔 주변의 이름값이 훨씬 높았다.
검신천가 천혜진.
권왕유가 유지수.
정령소가 소유정.
입학 성적만 놓고 보면 무진이 높았지만, 가문의 이름값이 주는 무게가 달랐다. 더욱이 상위 50위 내면 실력 차를 정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각자의 장기와 특기가 갈린 데다, 특화된 속성을 고려해야 했다.
무진은 그녀들과 서열전이 열리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수일에 걸쳐 치러진 예선과 달리 서열전의 결승은 하루에 치러진다. 상위 성적자와 서열전을 치르고 올라온 생도를 포함, 총 128명으로 구성했다.
100명을 제외한 28명은 격전을 치렀기에 불리할 수도 있으나,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순 없다. 연전의 힘든 싸움으로 투기가 한껏 올라와 있었다. 초반에 기선을 제압당하면 되레 당하는 일도 빈번했다.
“부럽다, 나도 저기에 끼고 싶다!”
“저 새끼는 뭔데, 같이 다니는 거야?”
“10단계 통과자.”
“그래 봤자 반쪽짜리라며!”
“그 반쪽이라도 되고 나서 떠들어!”
실력만 갖추고선 이 정도로 시선이 쏠리진 않았다. 세 여생도의 미모가 주변을 압도하며 발생하는 다양한 감정의 쏠림이었다. 하나하나 대단한 미모를 지닌 데다가 칠대가문이라는 배경이 한몫했다.
조연, 단역으로선 1명도 만나 보기 힘든 여주인공들과 시시덕거리고 있으니, 무진에 대한 감정이 좋지가 않았다.
특히 상위 서열전에 참석하지 못한 적운길은 더더욱.
‘저 빌어먹을 새끼 때문에!!’
내력에 손상을 입으면서 단계를 높이지 못했다. 고작 1단계에 불과하지만, 서열 손해가 컸다. 아래에서 치고 올라가야 하기에 부상당한 상태로 몇 차례의 대련이 이어지자 내상이 도지고 말았다.
부르르르!
적운길은 주먹을 말아 쥐며 격렬한 분노를 분출했지만, 무진에겐 닿지도 않았다. 서열전 결승이 있는 만큼, 관계없는 생도의 시비는 철저히 금했다. 혹여, 서열전을 치르기 전에 말썽을 일으키면 퇴학당할 수도 있었다.
씨익!
한데, 못 참겠다.
저 망할 새끼가 자신을 보고 웃고 있었다.
‘두고 봐!’
적운길은 분노를 삼키며 다음을 노렸다. 그런 그를 흥미롭게 보는 시선을 알지 못한 채.
‘눈깔이 사고 칠 상인데.’
‘그러게 적당히 약 올렸어야지.’
‘먼저 지랄한 건 내가 아니잖아.’
‘그래서 같이 지랄했냐?’
무진과 지수는 주변을 살피며 전음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각자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텔레파시처럼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이제 갓 입학한 생도들은 감히 시전도 하기 어려운 고급 기술이었다.
‘좀 더 약을 올려야겠다.’
‘왜 또 지랄인데!’
‘저런 애들은 꼭 사고를 치거든.’
‘그래서 어쩌려고?’
‘이왕 사고 낼 거 관심을 받게 하자는 거지. 실력은 고만고만하지만 화염적가라며.’
‘그거 선입견이야.’
‘착한 선입견은 괜찮아.’
딱 봐도 학창 시절에 애들 괴롭히고 다닐 녀석이었다. 겪어 보지도 않고 판단한다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자기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고 주먹부터 휘두른다면 굳이 보지 않아도 뻔했다.
감정 조절이 힘든 시기, 질투의 화신은 누군가에게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무진은 무심코 돌아서는 척하며 적운길에게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유정의 어깨에 손을 자연스럽게 얹었다. 당연하게도 적운길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 순간.
무진은 적운길이 아닌 주변을 살폈다.
다들 지수, 혜진, 유정을 보는 이 와중에 적운길을 본다면 많이 이상하잖아.
“뭐 하는 짓이야?”
“네 어깨에 송충이가 앉아서.”
“……진짜?”
“구라야.”
송충이를 질색하는 유정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리려다가 용암처럼 붉게 타올랐다. 한편 아무렇지 않은 척 구라를 치는 무진의 언행에 기가 막혔다. 생긴 걸 봐서는 전혀 그런 이미지가 아닌데, 지나치게 능글맞았다.
“내가 미쳤지, 괜한 짓은 하는 게 아니었어!”
“무르고 싶으면 물러. 저리로 가든가.”
목적을 이뤘으니, 이제는 필요 없다는 무진의 무성의에 유정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주변에 사람들이 없었다면 달려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없어도 마찬가지야. 넌 나한테 안 돼.”
“남의 마음을 멋대로 읽지 마라. 뒤진다!”
무진의 천연덕스러운 행동에 지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악한 의도에 걸려든 적운길이 불쌍할 지경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훌륭한 미끼로 전락해 버렸으니 말이다.
‘원래 이런 애였나?’
미래의 무진을 봤기에 지수는 현재의 무진을 판단하기 어려웠다. 선입견을 품지 말자고 했지만, 그만큼 그때 박힌 이미지가 강렬했다. 도저히 지금의 무진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함부로 유정이 어깨 만지지 마.’
‘오호, 질투?’
‘유정이가 불쾌해하잖아.’
‘순영이는 괜찮다고 했는데.’
‘범죄야!’
전음을 보내고 지수는 아차! 싶었다.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무진은 건수 하나 제대로 잡은 표정이었다. 1이 지워지기 전에 차단했어야 했는데, 이래서 전음도 문자메시지처럼 보내고 바로 지울 수 있어야 했다.
“둘이서 뭘 자꾸 쏙닥거려?”
“속닥거리긴, 누가?”
“방금, 이상했어. 알다시피 나 촉 되게 좋아!”
“할 말 없다고 넘겨짚진 말자.”
유정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에도 무진과 지수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일단 던져 보고 떠보려는 유정의 의도를 간파했다. 이럴 때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는 건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확신이 서지 않자, 유정은 툴툴거렸다. 보통 이렇게 찌르면 당황하기라도 하는데, 이것들은 언제나 한 수 위였다.
“분명히 있는데?”
“없으니까, 가서 음료수나 사 와.”
“……난 셔틀이 아니라고!”
“그러게 누차 말했잖아. 내기는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고. 하지 말자는데 하자고 한 사람이 누구더라?”
망할!
유정은 무진과의 대련에서 34전 34패를 기록했다. 가문의 어른들과의 대결도 아니고, 같은 학년에게 일방적으로 당했다.
웬만하면 정령을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열 번쯤 패하자 눈이 뒤집혔었다. 그런데 정령을 쓰고서도 패했다. 접전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놀아난 격이다.
‘왜 안 맞아?’
분명 속도에서는 우위에 있었다. 단점을 고치려고, 장점을 버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익숙해졌다고 판단하는 순간, 호되게 당했다.
이걸 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특별하게 강해졌다고 하기도 그렇고,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그런데 졌다.
대련을 시작하고 5분이 지나면 어느새 궁지에 몰렸고, 리버블로우를 허용했다. 소녀의 복부에 가차 없이 간장치기를 하는 바람에 밥을 먹기가 두려워졌었다.
-음료수 사 오기.
34번의 전적마다 내기를 걸었고, 음료수 사기도 목록에 들어 있었다. 이길 때까지 음료수를 사 와야 하기에 유정은 앞날이 깜깜했다.
내가 음료셔틀이라니!
음료셔틀이라니~~~!
‘짜증 나!’
차라리 불합리한 내기였으면 단호히 거절하면 그만인데, 지나치게 자잘해서 거절할 수도 없었다.
“내 거, 지수 거, 혜진이 거, 네 것도 사 와.”
“……?”
500원 주고, 할 말이야!
자판기 음료수도 요즘엔 2,000원이었다. 이 새끼가 지금 나 약 올리려고 작정을 한 게 아니면 이래선 안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