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수제자(2)
복제술사가 있다는 소문이 있기는 하나, 무진과 같은 케이스는 단연코 없었다. 원주인보다 기술을 더 잘 구현해 내니, 내 거라고 주장해 봤자 통할 리가 있나. 무진이 작정하고 니곡, 내곡을 시전하니 답이 안 나왔다.
“동료가 강해지면 좋은 거지, 심보가 고약해.”
“해도 해도 너무하니까 그렇지!”
“다중 속성은 꽤 있지 않나.”
“다중 속성도 정도가 있어, 너처럼 니곡 내곡이 되면 아카데미를 뭐 하러 다녀!”
멀티 속성을 가진 경우가 특이하진 않았다. 스킬로 얻을 수도 있고. 문제는 속성을 강화하여 완숙해지는 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하나에 전부를 투자해도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다중 속성에다 신체 변형을 이용한다면 만약을 대비할 수 있겠지.”
“잠깐, 무슨 의도야?”
“알려진 정보와 갭이 클수록 좋지 않겠어?”
“너 설마, 안 돼!”
“운신하기 편한 사람이 나서야지.”
무진의 말뜻을 이해한 지수는 섣불리 허락하지 않았다. 동료로 끌어들이기는 했으나, 무진은 겨우 열일곱 살에 불과했다.
강함과는 별개로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미래에서 단호한 모습을 봤다고 해도, 그땐 아저씨였다.
“말과 실제는 달라.”
“그 정도의 사리 구분도 안 되면 동료로 삼지 말아야지.”
“벌써부터 피를 묻힐 필욘 없어. 너라면 차분히 준비하고, 대비만 해도 된다고.”
“계획대로 된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늘 그렇듯이 변수는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해. 그때 가서 대비한다면 나라도 위험부담이 커질 거야.”
무진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도 압도적인 힘을 과시했다. 지금은 대형 길드와 칠대가문에서 여론몰이를 해서 흐지부지됐지만, 한번 틀에 박힌 첫인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일종의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혀 뇌리에 각인되기 마련이다.
이런 와중에 정령술을 능숙하게 사용한다면 괴리감의 차이가 지나치게 컸다. 전력을 숨기는 데는 이편이 수월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역용술하고 축골공을 구해 줘.”
“내가 무슨 도깨비방망이인 줄 알아?”
“지수야, 부탁해. 나만 잘되자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하아, 알아볼게.”
무진은 인체에 관해서는 의사보다 해박했다. 무공을 익히기 전부터 인체 강화를 연구한 결과였다.
이제는 육체를 통제하는 방법을 깨쳤기에 의도한 대로 변형이 가능했다. 그런데도 역용술과 축골공을 구해 달라고 한 것은 부족한 부분을 찾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설계도대로 병기를 좀 만들어 줘.”
“맡겨 둔 것도 아니고.”
병기의 설계도를 확인한 지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은 간편 설계도였다. 만들려고 하면 오늘 안에도 제작할 수 있었다.
하나, 이걸 쓰는 순간 무진에 대한 고정관념은 만렙 10강이 되어 버린다. 어지간해서는 깨지기 어려운 강화판이다.
“캐릭터성을 잃으면 곤란하거든.”
“사람들이 네 음흉한 속내를 알아야 하는데.”
“모르니까 더 좋잖아.”
“나는 옛날부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가 제일 싫었다고!”
입은 근질근질한데, 절대 말을 해선 안 되었다. 이건 아는 사람만 속 터져 죽으란 소리다.
“빨리 만년삼왕을 구해야 하는데.”
“그놈의 만년삼왕은!! 혹시, 아버님이 아프시기라도 한 거야?”
“미래는 아무도 모르니까, 대비는 해 놓으려고.”
“유비무환도 정도가 있지. 대체 얼마나 사…… 응?”
무진의 집에 들어오고 나서 들었던 이상한 위화감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깨달은 지수였다. 너무 자연스럽게 넘어가서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못 느꼈어?’
혹시나 해서 감각을 끌어 올렸는데도 감지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보다 공력이 높거나, 공력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아버님도 무공을 익히셨어?”
“익히기는 했지만, 많이 미숙하셔. 공력도 고작 3갑자밖에 안 되거든.”
“아, 그렇구나.”
……는 개뿔!
어쩐지 이상하다 싶기는 했다. 말이 3갑자지, 우리나라 무인 중에 손에 꼽히는 고강한 내력이었다. 그걸 미숙하다고 하면 나머지는 접싯물에 코 박고 뒈지라는 건가?
접시를 찾고 싶어진 지수는 울화가 치밀었다.
“3갑자가 미숙하면 나는?”
“공력이 전부는 아니잖아. 더욱이 아버지는 아직 능력의 3분지 1도 끌어내지 못하시거든.”
“그러면 영약이 필요할 때가 아니지.”
“그럴수록 영약이 필요해.”
“무슨 그런 개떡 같은 논리가 다 있어!”
“샐러리맨이신 아버지는 야근에 외근까지, 나를 먹여 살리느라 훈련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 깨달음을 바라기도 어려운 형편이라고. 이럴 때일수록 일단은 때려 박을 필요가 있어. 자고로 공력은 높을수록 좋다고 하잖아. 효율이 떨어져도 천년 공력이면 5갑자는 사용할 수 있을 테고.”
분명 말이 안 되는 어거진데,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훈련 시간이 부족하니, 내공부터 채우고 차분히 녹여 먹겠다는 심보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불가능하지만, 무진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이미 3갑자의 표본도 있지 않은가.
“그러면 서열전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
“넌 진짜 양심이 없는 것 같아.”
“내비가 있는데 어렵게 돌아갈 필욘 없잖아. 혹시, 종이 지도로 길 찾는 타입이야?”
“운전면허도 없거든!”
하나하나 맞는 말만 골라서 했다. 돌다리는 두드려 보고 가자는 주의지만, 돌다리가 무너졌다고 무진이 뒈질 녀석인가.
입시생 전원이 달려들어도 상대가 되지 않을 텐데, 공략 루트까지 달란다. 아주 그냥 날로 먹으려고 작정을 했다.
“할아버지가 오래.”
“왜?”
“왜긴, 너 우리 가문 소속이야. 어떻게 된 게 그 뒤로 한 번을 안 와. 훈련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아.”
만만히 봤던 무진도 납득했다.
***
권왕가를 방문했다.
전과 달리 무진을 보는 시선들이 남달랐다. 이번 입학시험에서 보여 준 10단계 통과가 관심을 끌었다.
따지고 보면 권왕가 소속 무인은 무진의 선배나 다름이 없었다. 자기들도 시험을 본 적이 있으니 10단계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난이돈지 모르지 않았다.
이번에도 무진은 한 집사의 안내를 받아 권왕의 개인 연무장에 도착했다. 지수는 약속이 있다고 해서 나갔는데, 유정이가 걱정 되었다.
화아아!
개인 연무장의 문을 열자 후끈 달아오른 열기를 발산했다.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지만, 담금질에 열중인 사내의 뜨거운 열정이 느껴졌다.
무진은 벽면에 서서 조용히 기다렸다. 15분이 지나고 나서야 형님께서 돌아보았다.
“형님을 뵙습니다.”
“아우, 왔는가.”
나이를 초월한 우애라고 보기에는 징그러웠다. 상의를 탈의한 권왕의 몸은 나이를 초월하긴 했다.
저 몸이 어떻게 환갑이 지난 노인네의 몸인지 불가사의했다.
“아우는 역시 예의가 있어.”
“쇠질할 땐 건드리는 게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어때, 같이 할 테냐?”
“그래도 됩니까?”
“아무렴, 아우는 언제나 환영이야.”
“감사합니다.”
이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무진은 상의를 탈의했다. 몸만 보면 형제는 맞았다. 남자의 우정은 빡빡한 육체에서 오기 마련이었다.
오!
보기에는 보통 헬스 기구인데, 무게가 보통이 아니다. 들어 보니 가벼운 덤벨이 10t은 되었다. 무진은 신세계를 만난 듯 이거저거 다 들어 보았다. 생일 선물로 누가 이런 거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어떠냐?”
“최곱니다.”
“가보로 대대로 물려줄 것이다.”
“저도 기회가 있을까요?”
“하는 거 봐서.”
기구 하나하나가 보통이 아니었다. 던전에서 나오는 기물을 가공해서 덤벨로 만들었다. 쇠질을 하는 사람에게는 신병이기나 다름이 없었다.
실제로 이거 만든다고 들어간 돈이 100억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 아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지만. 유장산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보물 1호였다.
훅, 훅!
무진은 권왕과 쇠질을 시작했다. 모든 정신을 근육의 고립, 이완, 수축에 쏟아부으니 애초의 목적은 잃은 지 오래였다.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근섬유 하나하나의 가닥조차 소홀하지 않고 힘이 들어갔다.
“중력장 너무 좋은데요.”
“아는구나. 운동할 때 중력장이 없으면 영~! 한 것 같지가 않아.”
“하체 할 때 아주 쏠쏠합니다.”
“걸을 때도 운동이 되거든. 이 좋은 걸, 좀생이 같은 아들놈이 조금 더 높여 달라니까 돈 없다잖아.”
“근육 나고 돈 나지, 돈 나고 근육 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호오, 명언이로다.”
헬창복음 1장, 1절에 쓰여도 손색이 없을 명언이었다. 후일 후손들에게 물려줄 때를 위해 녹음해 두어야 했다.
기억력이 떨어지기에 권왕은 녹음을 생활화했다. 물론, 헛소리하는 놈들을 조지려는 아주 사소한 연유도 있었다.
“10단계를 통과한 게 사실이구나.”
“기본이 되지 않으면 태산을 쌓은들 모래성에 불과하지요.”
“그 정도면 잘 숨겼다.”
“역시 형님을 속일 순 없네요.”
“아무렴.”
세간에 권왕은 단순무식한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승부사로서 냉철한 기질이 있었다. 본능적으로 해야 할 때를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강함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 인해 다소 판단을 실수할 때가 있기는 했다.
“일전에는 제법 앙큼한 짓을 했더구나.”
“방법이 있어도, 본인한테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더라고요. 운동이든, 무공이든 자기한테 맞도록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류귀종은 그럴듯한 말장난에 불과해. 시작부터 이상에 목을 매게 되면 돌아오는 것은 파국에 지나지 않아.”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도움이 됐다. 고맙구나.”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독선적인 면도 있지만, 권왕은 배움에 인색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지금보다 넓은 식견을 가지게 되었다.
“도움을 받았으니, 선물을 줘야겠지. 말해 보거라.”
“수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무진의 요구에 권왕은 고개를 갸웃했다.
수제자는 적통을 이은 혈육이나, 직접 무공을 전수한 제자 중에서 뽑게 되었다. 이미 그 자리는 정해져 있었다. 깨달음의 가치가 작다고 볼 순 없어도, 수제자의 자리를 달란 요구는 과했다.
“방금 그 말이 지닌 무게를 알아야 할 것이다.”
“제 말뜻을 오해하셨군요. 저는 권왕가의 수제자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뭔데?”
“형님께선 마법사시지 않습니까. 저는 화염마도의 후계자가 되고 싶습니다.”
“……(오잉).”
예상을 상회하는 날카로운 비수에 허를 제대로 찔린 권왕은 한동안 말을 못 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권왕에게 마법을 배우겠다고 하는 미친놈이 있을 줄.
아무도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권왕 본인조차도 말로는 화염마도의 전승자라고 떠벌리고 다니지만, 정작 마법을 가르칠 생각은 요만큼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혹, 화염마도의 전승자라고 하신 게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입니까?”
“……그럴 리가! 나는 당당한 화염마도의 전승자니라.”
아니라고 부정했다가는 말로만 나불거리는 떠버리로 전락하게 된다. 한 입으로 두말할 수도 있겠지만, 은연중 마법사라는 자부심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