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러라고 만든 게 아닌데(3)
“저 비싼 기계를!!”
“하나도 아니고 벌써 2개나!”
“합격했으면 적당히 조절할 것이지!”
“이러면 비용 처리하기도 힘들잖아!”
“이걸 누가 믿겠어?”
한 번 쓰고 버릴 기계를 마련하진 않는다. 수년째 멀쩡히 잘 사용하고 있는 기계를 2대나 잃어버린 교관들은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하필이면 시험장에 파괴머신이 나타난 것이다. 저딴 놈이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아카데미 최상위 반도 아니고.
“주먹이야, 대포야!”
“저런 거 맞으면 시체라도 건질 수 있을까?”
“아니, 입시생이 저래도 돼?”
“각성자는 다 저런가?”
“나 그냥 집에 갈래.”
월등히 뛰어난 스텟을 보여 주는 경우가 간간이 나오기는 해도, 이처럼 파격적인 공격력은 처음이었다. 아카데미 역사에 회자될 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어때?”
“그만하지.”
아까부터 계속 어깨를 으쓱하는 무진의 행태에 유정은 기가 질렸다. 자신이 한 행동을 비꼬는 짓이 분명하기에 낯부끄러워졌다. 겸손하지 못한 지난날을 반성하게 했다.
‘힘만 놓고 보면 백작급이라고 봐야겠어.’
질리기는 했어도, 유정은 현실을 외면하진 않았다. 무진의 다른 능력은 보지 않아도 되었다. 힘만 가지고도 능히 어지간한 마물은 때려잡고도 남는다.
힘 측정이 끝이 나자, 속도와 민첩을 보는 테스트가 곧바로 진행이 되었다.
무진에 관한 관심은 뜨겁다 못해 타올랐다. 이번에는 또 어떤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 줄까?
속도 테스트는 모든 운동의 기본이 되는 달리기였다. 한 번에 10명씩 테스트를 하며, 총 1km를 기준으로 100m 구간은 최고 속도를 본다.
땅!
총소리가 울리고 10명이 달린다.
모두 무진을 눈여겨보고 있었었다.
무지막지한 괴력에 이어 속도는 또 얼마나 빠를까?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응?
없다.
9명은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너무 빨라서 안 보였다고 하기엔 이상한 상황이다. 100m를 지났을 때 경쟁자들은 뒤처져 있는 무진을 보았다.
‘슬로우스타터인가?’
‘뒤처져도 우리 정도는 얼마든지 앞지를 수 있다는 걸지도.’
‘잠깐, 이건 시간 테스튼데?’
‘저 자식, 설마?’
무진은 평속을 유지하고 있었다. 더 빠르지도, 더 느리지도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테스트를 통과할 정도였다. 이미 힘 테스트를 통해 합격이 정해졌다고 해도, 이상하리만치 느리다.
후우, 후우!
표정을 봐선 진심이 느껴져서 모두를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했다.
무진의 타임은 1분 30초였다.
일반인이라면 빠르겠지만, 1분 내로 1km를 주파한 입시생들과 비교하면 느려도 너무 느리다.
아!
30초 내로 들어온 유정은 안타까운 탄성을 질렀다.
이건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하자는 내기를 해야 했었다. 1,000억을 갚을 절호의 기회를 자기 발로 찼으니, 아까워서 미치겠다.
“무진아, 내기하자!”
“늦었어.”
“젠장, 왜 느려?”
“난 느리면 안 되냐?”
“……그건 아니지만.”
느린 주제에 뭐가 이리 당당해!
실망은커녕 무진의 심드렁한 태도는 유정을 당혹스럽게 했다. 종잡을 수가 없는 성향에 대처하기 곤란한 캐릭터였다.
속도를 감췄다고 하기엔 너무 느리다. 이걸 느림의 미학으로 표현하기도 부적절했다. 간혹,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를 거론하는데 동화일 뿐 가당치도 않았다.
‘다음 걸 보면 되겠지.’
숨기는지, 아닌지.
민첩성 테스트.
테스트장 앞에는 수많은 구멍이 있고, 그 안에서 튀어나오는 쇠구슬을 피해야 했다. 단계마다 속도를 올리고, 다음 단계는 본인의 의사에 달렸다.
속도가 느릴 때는 맞아도 따끔한 정도지만, 단계가 높아질수록 맞고 아픈 정도로 끝나지 않기에 민첩성 테스트는 꽤 위험했다. 시험장에 힐러와 의료반을 대동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탁, 탁!
무진은 맞았다.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투웅, 투웅!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퍽, 퍽!
계속 맞았다.
피하는 족족! 다 맞고 있었다. 안 피하는 편이 나을지도. 아파서라도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안 되는데 최종 단계까지 갔다.
“헐, 저걸 다 맞고 통과하네!”
“민첩성 개털인데, 저래도 되는 거야?”
“어쨌든 통과했잖아!”
“이건 뭐, 힘캐에 금강불괸가?”
“특수 속성일지도 모르지.”
힘과 방어에 특화된 속성이나 공력과 마나를 발휘했다면 이상하진 않았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마력과 속성 테스트에서 무진은 3단계에 불과했다. 3단계가 낮은 건 아니지만, 특출 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여태 보여준 파격적인 행보로 인해 더욱 도드라졌다.
“허, 물리 몰빵 캐릭이었어?”
“누가 공력을 사용했다고 했어?”
“특수 속성도 아니잖아!”
“저건 대체 뭐 하는 새끼야!”
“힘캐의 정석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상식을 가뿐하게 초월하는 무진의 언밸런스한 스텟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힘과 단단함에 몰빵을 하지 않고서는 나오기 힘든 캐릭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밸붕캐인 무진을 경시하진 못했다. 힘 하나로 내력과 속성 부족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흠, 약점이 뚜렷하군.’
‘오크나 트롤 같은 놈이었어.’
‘속성은 별거 없잖아.’
‘환상 계열이라면, 간단할지도.’
대부분은 만만히 보지 않겠지만, 개중 뛰어난 입학생들은 분석을 마치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려운 상대긴 해도, 서열전에서 이길 방법이 생겼다.
“힘을 숨기기가 힘들다.”
“너처럼 뻔뻔한 애랑 어울리는 내가 더 힘들거든.”
“다들 놀라기에 민첩은 적당히 조절한 거야.”
“어련하시겠어. 그럼 내기라도 할래?”
“내기는 패가망신의 지름길이지.”
무진의 단호함에 유정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저 얄미운 놈을 어떻게든 골탕 먹이고 싶은데 넘어오지를 않는다. 아주 자기 좋을 대로만 하는 녀석이었다. 한편으로 무식해 보일 뿐, 능구렁이 같은 구석이 있었다.
“소원 말이야, 스피드스타로 하는 게 낫겠다.”
“있겠냐?”
“없어?”
“있어도 못 주지. 그게 얼마짜린데.”
스피드스타는 s급 성장형 아이템이다. 패시브처럼 속도를 올려주는 데다가 보상을 통한 업그레이드가 가능했다. 이런 아이템을 누가 내놓겠는가. 있어도 없다고 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고민 좀 해 볼게.”
“구두 약속은 법적으로 효력이 없어.”
“괜찮아, 녹음했어. 정 안 되면 인터넷에 올려야지.”
“집요한 남자는 인기 없거든.”
“괜찮아, 순영이가 시집오기로 했으니까.”
시대가 어느 땐데, 정략혼을?
유정은 믿지 않았다.
순진무구했던 소녀는 무진과 만나면서 세상에 대한 불신부터 배우게 되었다. 아름답고, 밝은 세상만 보고 자라도 부족한 시간이거늘.
“내 관심을 끌어 보겠다는 수작이…… 야, 같이 가!”
멀어지는 무진의 등을 본 유정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관심 없는 척 시선을 끌어 보려는 수작과 아예 관심이 없는 차이는 컸다.
‘알맹이는 다 빼먹었다 이거냐!’
심지어 여태 전화번호도 안 물어봤다. 시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있었고, 내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전화번호도 안 물어보고 휑! 하고 갔다. 애초에 내기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걸지도.
다다다다!
무진은 계속 멀어지고 있었다. 유정은 신속히 뒤를 따라잡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스피드에선 한 수 앞서 있다 자신했다.
빠득!
젠장!
적운길과 배준상은 각각 떨어진 장소에서 칼을 갈았다. 오늘의 수치를 잊지 않고 갚아 주겠노라 다짐했다.
하아아!
한숨도 잊지 않았다.
갚아 주기엔 무진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속도는 느릴지라도, 한 대만 걸리면 저세상으로 직행이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기에 장담하지 못했다.
***
“와, 검신천가는 역시네.”
“권왕유가는 어떻고!”
“이번에도 칠대가문이 다 해 먹겠다.”
“다들 기대했냐? 망상이야.”
“나도 하루만 칠대가문이었으면.”
“더러운 혈통빨!”
대다수 입시생이 3단계에서 쩔쩔맬 때 칠대가문, 대형 길드에서 내보낸 후예는 최소 6단계 이상이었다. 한 단계마다 차이가 크기에 시작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한 갭을 무시하고 상위에 오르는 입시생은 극소수였다.
“그거 들었어? 7연무장에서 10단계가 나왔대.”
“10단계, 그게 말이 돼?”
“이거 보라고.”
“진짜네, 미친!”
“다른 스텟은 평범해도, 이러면 무시할 수 없지.”
“무시는커녕 우린 스쳐도 사망이야.”
툭! 쳐도 사망에 이르는, 무지막지한 힘캐의 등장이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칠대가문인 권왕유가 소속이기는 해도, 직계혈족이 아니라는 점이 이목을 끌었다.
‘적당히 좀 나대지.’
소문이 번지기까지 순식간이었다. 다른 스텟을 적당히 조절했다곤 해도, 10단계의 상징성을 무시하기 힘들었다. 아마 칠대가문, 대형 길드를 비롯한 유망주들이 좌시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 너 잘났다.’
지수는 되도록 무진을 감추는 방향으로 계획을 짰었다. 하지만 무진은 조만간 들통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적이 그처럼 대단하다면 어설픈 위장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라리 전부를 감추기보단 진실과 거짓을 섞는 편이 낫다고 조언했다.
더욱이 무진은 이목이 쏠렸을 때도 대비해 놓았다. 10단계를 통과할 줄은 몰랐지만, 소속이 되어 있지 않았으면 귀찮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가문의 허락도 계산에 넣은 행동이었다.
‘애늙은이 같으니라고!’
가르치는 맛이 하나도 없었다. 가혹한 시련으로 단련된 경험을 베풀고 싶건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내가 사랑을 준다잖아!’
고귀한 내리사랑을!!
이거 생각할수록 화가 치미네.
언제고 날 잡아서 반드시 사랑을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동료 무진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새끼니까.
“괜찮아?”
“어.”
말을 건 여학생은 검신천가의 천혜진이었다.
그녀는 청순한 외모와 그렇지 못한 체형을 지니고 있었다. 가문 간의 교류가 있어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천혜진은 묘한 시선을 주었다.
“달라졌어.”
“그래.”
“말투도.”
“그런가?”
“짧아.”
“너도.”
단답형으로 질문하는 천혜진은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침묵으로 일관했다. 한마디로 말수가 적었다. 따지고 보면 오늘은 단어 사용이 많은 축에 속했다.
‘한 번도 못 이겼었지.’
그땐 한 끗 차이인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명백한 착각이었다. 최소 한 단계의 차이가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라이벌 의식을 가졌으니 창피함이 밀려왔다.
“다음에 대련하자.”
“좋아.”
천혜진은 순수하게 검을 추구하는 성향이었다. 대련의 승패에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하지만 승자와 달리 패자는 맘에 담아 두는 법이다. 어른이라고 다 성숙하지 않은 것처럼, 지수로선 원하는 바였다.
‘그래, 때가 되기는 했지.’
처맞을 때가.
이게 다 맞지 않고 커서 생긴 불행한 사고였다. 천혜진의 미래를 알기에 손을 좀 봐 줄 필요가 있었다. 동생의 불행한 미래에 언니로서 책임감을 느꼈다.
“악의가 느껴져.”
“선의야.”
예리한 년.
검을 수련해서 그런지 직감 하나는 오지게 뛰어나다. 그것이 천혜진의 특성과 맞물려서 어지간해서는 도통 맞지를 않는다. 극한의 회피력, 그 하나만으로 굉장히 껄끄러운 상대였다.
저벅, 저벅!
무진이 오고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시계탑 아래서 만나기로 했었다.
“데려왔다.”
“허, 진짜로 데려왔네.”
“밥 사라.”
“하아, 알았어.”
무진의 뒤로 관종이 서 있었다.
본인만의 컨셉에 취해 사는 관종이라, 지수와는 연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최악의 상대로서.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들은 그대로야.”
“그런 말은 없었잖아.”
“낚인 걸 인정해.”
“젠장, 내가 낚이다니!”
따라 말하기는 관종의 필수 옵션.
컨셉 하나는 확실하군.
무진에게 또 당한 유정은 분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대로 끌려다닐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불태웠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당하고선 병신처럼 참고 살진 않는다.
꼭 받은 것 이상으로 수치심을 돌려주리라.
유정이 각오를 다질 때, 천혜진이 무진을 알아봤다. 벌써 사진과 동영상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10단계?”
“반가워, 지수에게 매번 패배를 선사했다지. 고고한 표정부터 지수하고는 다른 매력이 있구나.”
저 새끼가!
끼까지 부리네!
날 까면서!
울컥한 감정과는 별개로 사실이라 지수는 반박은 하지 못했다. 다음 기회에 전적을 새롭게 채워 넣기로 마음먹었다. 패패패를 승승승으로 바꾸려면 최소 여섯 번은 처맞아야 했다.
“다음에 대련할래?”
“좋아, 대신 이기면 소원 들어주기로 하자.”
“내 한도 내에서.”
“무리한 소원은 빌지도 않아.”
대련 친화적인 천혜진은 별 뜻 없이 내기를 수락했지만, 지수와 유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진의 말은 끝까지 들어야 했다. 숨은 뜻을 간파하지 못했다면, 내기 따윈 하지 않는 편이 정신은 물론 육체적으로 괴롭지 않았다.
“시험도 끝났겠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내가 이 근처에 스테이크 잘하는 곳 알아. 유명한 맛집이야.”
“정령가는 육식을 하지 않지 않나?”
“뭔 개소리야! 혹시, 아까워?”
“아깝기는, 많이 먹어. 10개 먹어도 돼.”
무진의 넉넉함에 지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 돈 아니라고 막 질렀다. 밥 사 주는 사람 따로 있고, 생색내는 사람 따로 있었다. 하지만 내기는 내기, 약속은 약속이었다.
‘특수 속성이 사기 아냐?’
어떻게 된 녀석이 한 번을 안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