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잘못된 만남(3)
한국인인데, 서양인 같은 외모였다.
동서양이 오묘하게 잘 섞여 고풍스러움과 장난기를 동시에 가졌다. 차별을 받아 보지 못한 천진함까지 있어 굉장한 매력을 발산했다.
그녀는 의문이 들었다.
“왜 피했어?”
“당연히 피해야지.”
“가녀린 소녀가 넘어져서 다쳤으면 어쩌려고?”
“누가?”
“내가?”
“그럼 일반고로 갔어야지.”
“……음, 그러네.”
각성만 해도 보통 사람보다 족히 2배 이상은 강해진다. 괜히 각성자가 신인류로 불리진 않는다. 하물며 입학시험에 응시했다면 최소한 일반인보다 족히 4배는 더 강했다.
가녀리긴 개뿔.
입학시험에 응시한 이상 연약한 소녀로 대접할 필욘 없다. 그저 경쟁 상대이자, 동급생일 뿐이다.
“게다가 대로에 돌부리 따윈 애초에 없었잖아.”
“큭! 맞는 말이긴 한데, 너 참 오묘하게 웃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그냥 권왕가의 숨겨진 공주님과 같이 있기에 궁금해서.”
권왕가의 손녀와 등교한 의문의 소년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튼실한 반(半)청년. 그저 그랬다면 모를까, 주변의 부담스러운 시선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이 흥미를 유발했다.
물론, 유지수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다. 반청년과 인연을 맺은 후에 유지수를 만나 보려고 했거늘.
‘얘도 별종이었네.’
지수와의 접점을 위한 매개체라고 하기엔 개성이 강했다. 자신을 마주하고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만 봐도.
그것이 연기인지, 실제인지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소유정이야, 정령소가의 금지옥엽으로 귀여움과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고 있지.”
“……”
무진은 대답 대신 7연무장 내 체육관으로 속보(速步)했다.
히어로랜딩을 보였을 때부터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유유상종으로 매도당하고 싶진 않았다. 저딴 말을 제 입으로 당당하게 밝히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은 관종이었다.
“야,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듣고 싶지 않다.”
“너 혹시 컨셉 잡은 거야? 나한테 이런 남자는 처음이란?”
“소설 그만 보고, 술은 끊어라.”
아침마다 이슬만 먹을 것 같은 소녀에게 술이라니, 비유가 참 어지럽다. 화가 나야 할 텐데, 유정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크크, 너 진짜 재밌는 녀석이구나.”
“은근슬쩍 어깨 치지 마라.”
어디서 개수작을.
소유정이 끈질기게 달라붙자 무진을 향한 시선도 다양해졌다. 단순 호기심과 부러움에서 시기 질투로.
특히 남학생들의 질시는 불타오르고 있었다. 모르는 소녀에 대한 순정인가?
“이름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잖아.”
“강무진.”
“어머 딱딱해라, 몸도 그러나?”
“112로 신고한다.”
“너무하네. 나는 법 없이도 사는 가녀린 소녀라고!”
“불편한 세상이잖아.”
무진의 견고함과 소유정의 넉살이 팽팽하게 대치했다.
하나,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체육관으로 들어가는 이상, 무진의 패배였다. 다만, 애초에 이기지도 못할 싸움이란 걸 무진이 모를 리 없다는 사실이다.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단 말이야.’
무진은 소유정의 주변으로 특이한 기운이 빙글빙글 돌고 있음을 감지했다. 특히 감정의 변화, 의외성이 보일 때마다 기운의 흐름도 변한다. 마치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는 듯이.
‘저게 정령인가?’
정령가는 권왕가와 함께 칠대가문에 속하며, 대대로 정령에 대한 친화력이 높다고 알려졌다. 태어나자마자 정령과 소통하고, 각성 후에는 계약을 통해 정령사가 된다고 했다.
‘착지할 때의 부력은 바람 계열인 같고.’
무진은 무심한 척 소유정을 정밀하게 관찰했다. 자부심이 강한 만큼, 생소한 대응으로 의외성을 높였다.
‘수준이야, 높다고 봐야겠지.’
정령도 친화력에 따라 등급이 나뉜다고 했으니, 소유정의 모나지 않은 성향을 고려한다면 하급 정령사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권왕가만 봐도 능력이 안 되면 홀대가 은연중 깔려 있었다. 혈육 간에도 경쟁이 심하다는 의미였다.
‘이조차도 연기라면 대단한 애고.’
무진은 자신의 통찰력을 신뢰하지만, 무조건 단정하진 않았다. 상대에 따라서 대응을 달리하면서 최대한 살핀 후에 결론을 내리는 성향이었다.
“하긴, 내가 가녀리긴 해도 죄 많은 소녀는 맞아.”
“나는 신부가 아니다.”
고해성사는 성당에 가서 해야지.
무진은 유정의 죄를 사해 줄 의무도 없으며, 인과응보를 신뢰했다. 죄를 지은 주제에 말 몇 마디로 위안을 받으려고 하다니 놀부 심보였다.
“이럴 때는 왜냐고 물어봤어야지.”
“너 때문에 곤란해질 일은 없어. 머리가 장식에 지나지 않더라도,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소란을 피우진 않을 거 아냐.”
“와, 너 의외로 예리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 제법 잘 통하는 것 같지 않아?”
“그다지.”
유정은 관심이 지나쳐 사고를 일으키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경험했다. 오늘도 작은 소란은 일어날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다만, 무진의 예상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머리가 있으면 다툼이나 난동을 부리지 않을 텐데,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녀석이 꼭 있었다.
화르르르!
광폭한 성향으로 소문이 자자한 화염적가의 후예, 적운길이었다. 불그스름한 머리카락만 봐도 화염적가임을 증명했다.
“너 이 새끼! 당장 떨어지지 못해!”
떨어지라니? 아까부터 쥐새끼처럼 숨어서 봤으면서 모르는 척하기는.
인과를 중요시하는 무진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관점이다. 누가 봐도 유정의 수작질이었다.
부글부글!
적운길은 유정을 어릴 때부터 알았기에 잠깐이면 끝날 줄 알았었다. 그녀는 호기심이 많지만, 보통은 빨리 식었다.
예상과 달리 유정이 적극적으로 달라붙었다. 자신에게는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친근함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 새끼가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해!’
나만의 유정이 그럴 리 없다는 적운길의 적반하장이었다.
사태가 심각해질 것으로 보이자 적운길을 대신해서 유정은 사과했다.
“미안해. 보다시피 내가 아주 치명적이거든.”
“괜찮아, 사과는 이것으로 대신할게.”
예상은 예상일 뿐, 화마는 언제나 바람을 타고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번지는 경향이 있었다. 평소 보지 못했던 유정의 다정함에 적운길은 눈이 돌아갔다.
까악!
헉!
그러나 유정도, 적운길도 사람을 한참 잘못 봤다. 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무진은 손익을 철저히 따졌다. 게다가 둘의 관계만 적절히 이용해도, 이따위 상황쯤은 얼마든지 끝낼 수 있었다.
콰다다당, 데구르르!
바닥을 구른 후에 일어선 적운길은 비틀거렸다. 역류로 인해 오장육부에 가해진 충격이 상당했다. 자신이 쏜 화살을 다시 가서 잡아채는 이치였다.
“……이런 참혹한 짓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두 손을 펴며 어깨를 으쓱한 무진의 태연한 응수에 적운길은 주화입마에 빠질 뻔했다.
동시에 목덜미를 잡힌 채 고기방패로 전락했던 유정도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헉!
주변에서 구경하던 녀석들도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설마 했는데, 소유정을 앞세워 공격을 막다니 상상을 초월했다.
적운길이 방향을 틀지 않았다면 대형 사고가 났을 것이다.
대가리가 박살 나며 불에 타는.
‘……미친놈이었어!’
‘……상종해선 안 될 놈이잖아!’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소유정의 유치한 행동은 예쁘니까 용서가 되는 일이나 무진의 대응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소유정을 방패막이로 쓸 때는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
남녀를 가리지 않은 공평무사였다.
저벅, 저벅!
움찔!
무진이 다가오자 적운길은 뒷걸음을 쳤다. 그리고 곧 실태를 깨닫고 분노했다. 무진이 비록 권왕가라고 해도 일개 문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적운길은 화염가의 직계 혈육이었다. 무명 문도의 박력에 압도되어 움츠린 현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무리하면 곤란할 텐데.”
“내가 너 따위의 수작에 넘어갈 것 같아!”
“그러다 시험에 떨어지면 어쩌려고?”
“……이 비겁한 새끼가!”
무진의 예상을 벗어나는 대응에 적운길의 운기행로가 순간적으로 역류했다. 대단치 않기는 해도, 무리한다면 내상이 크게 도져 시험을 망칠 수 있었다. 약점을 꼬집어서 건드리자, 적운길은 치를 떨었다.
“어이쿠, 대맥이 상하면 안 되지.”
……흐억!
무진이 손을 뻗자, 적운길은 기겁했다. 조금만 운기할 여건이 주어지면 되는데, 시간을 주지 않았다. 하물며 무리하다 내상이 중첩되면 시험을 치르기도 힘들어진다.
그러다 시험에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엔 적운길의 인생은 가시밭길이었다. 설령 재입학이 된다고 해도 두고두고 꼬리표가 달릴 것이다. 칠대가문 내에서 직계가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떨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은 수준이 아니라 전무했다.
그 첫 사례를 자신이 장식할 순 없었다.
툭툭!
그런 속내를 안다는 듯 무진이 살짝살짝 건드렸다.
적운길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강제로 역류를 억누를 수는 있으나, 그리되면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무진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으니까 이쯤에서 사과하면 용서해 줄게.”
“너 이 자식! 이따위 짓을…… 거기는…… 쿠웩!”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충 툭툭! 건드릴 때마다 적운길은 기혈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차라리 무진이 다가오기 전에 손을 썼더라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심리전에 말렸다는 걸 깨달았지만, 적운길로선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계속 건드리는 통에 치료는커녕 내상이 악화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지금이야 운기만 하면 되지만, 내상이 심해지면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안 할 거야?”
“……미안하다!”
“옳지, 사내답게 사과하니까 얼마나 보기가 좋아. 받아 줄게. 고맙지?”
“……고맙다(빠득)!”
“자, 김치.”
“……뭐?”
팔로 적운길의 어깨를 감싼 무진은 스마트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어색한 얼굴의 적운길과 환하게 웃는 무진의 희비가 엇갈렸다.
-곧 시험이 시작되겠습니다.
시험 시작을 알리자, 무진은 망부석이 된 적운길을 뒤로하고 순서를 기다렸다.
허!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유정은 숨을 거칠게 토해 냈다. 예상은커녕 상상도 못 해 본 신박한 전개였다. 이딴 식으로 풀어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와! 절묘한 기브 앤 테이크!’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는, 작금의 대치 국면과 묘하게 어울렸다. 자신이 과하게 들이댔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무진의 응수는 실로 완벽했다.
‘저 성질 급한 녀석을 말로 죽여 놨네.’
어지간해서는 기가 죽지 않는 적운길이었다. 질 줄 알면서도 무모하게 들이댔었다. 그런 적운길이 대응은커녕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물며 주변을 봐라.
좌중을 압도했다고 해야 하나? 건드리면 좆된다는, 초반 기선 제압의 정석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지릴 뻔했다고!’
지렸으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을 텐데. 간신히 평생 따라다닐 흑역사는 면했다.
유정은 급히 무진의 옆자리를 차지하며 속사포처럼 쏘아 댔다. 본인의 실수긴 해도, 방금의 대응은 지나친 면이 있었다.
“내가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정령가와 화염가를 동시에 보내 버린다면, 본가로선 개이득이겠지.”
무진의 중2병스러운 대답에 유정은 마른침을 삼켰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더욱이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그걸 말이라고 해!”
“농담이야. 후후후.”
허걱!
무진의 주변으로 공간이 또다시 넓어졌다. 유정과 교분을 나누려던 입시생들도 기겁하며 최대한 멀어졌다.
미친놈 옆에 있으면 험한 꼴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자칫 가문까지 싸잡아서 말아먹을 수도 있었다.
스윽!
움찔, 움찔!
무진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돌아볼 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돌렸다.
“어디 가?”
“나도 일이 있어서.”
호기심 많고, 도전 정신 투철한 유정도 이번에도 잘못 건드렸다는 걸 깨달았다.
“가만히 있는 사람을 원하지도 않은 핵인싸로 만들어 놓고, 혼자만 빠지시겠다. 보기보다 양심도 없구나. 아니면 유유상종이든가?”
“나를 어떻게 보고!”
무진은 은근슬쩍 빠지려던 유정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시험을 보는 동안은 결연한 동지였다.
‘잘못 걸렸다!’
유정은 왜 호기심을 불태웠을까, 후회가 밀려왔으나 돌이키기에는 무진의 집요함을 뿌리칠 자신이 없어졌다.
자신도 제법 미쳤다는 소리를 듣지만,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은 격이다.
‘이게 바로 아카데미의 낭만이구나.’
모범생으로 살아온 무진에겐 변화이자 일탈이었다.
짜릿한 전율이 발끝에서 머리끝을 강타했다. 여태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