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잘못된 만남(1)
한 해가 넘어가자, 무진은 각성하는 것으로 했다.
상태창에 나와 있는 스텟은 기본으로 되어 있으며, 각성 전 얻은 능력은 괄호 안에 쓰여 있었다.
잠재력과 특수 속성은 향후 등급을 결정하는 중요 요소였다. 각성 시 1레벨은 7-10을 넘지 않는다. 간혹, 잠재력이 높으면 15 이상으로 나오기도 한다.
다만, 배경이 좋은 입시생은 스텟업을 통해 아카데미의 하이클래스를 차지했다. 세상이 바뀌어도 흙수저는 성공하기 힘든 현실이었다.
“15면 괜찮은 건가?”
“괜찮은 정도가 아니야, 잠재 능력치만 따지면 s급이라고.”
“한 학년에 얼마나 되는데?”
“s급이라고 해서 다 같진 않겠지만, 5명 내외일걸.”
“많네.”
“많기는, 졸업 후에 등급이 높은 성좌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6년간의 노력이 말짱 꽝일 수도 있어.”
아카데미 재학, 졸업 중에 성좌의 선택을 받아야 했다. 받지 못하면 스텟의 증폭을 기대하기 힘들다. 성좌의 가호를 받고, 안 받고의 차이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카데미 시절에 넘사벽의 능력을 갖췄어도, 성좌의 등급에 따라서 헌터로서의 가치가 달라졌다.
아카데미 수업 내내 하위권에서 맴도는 녀석도 성좌 하나 잘 만나서 인생이 피는 예도 있었다. 성좌 로또라는 말이 괜히 나오지 않았다.
물론, 그런 경우는 흔치 않았다. 성좌의 까다로운 안목을 고려하면 성적이 높을수록 등급이 높아진다.
“좀 이상하다. 이 시스템이란 거.”
“어떤 점이?”
“마력은 구결로도 되는데, 스킬은 전승이 되지 않는다는 거잖아.”
“스킬은 일종의 각인이야. 따라서 각인된 자만 사용할 수 있어서 유출이 불가능해. 각성의 시대가 되면서 생겨난 일종의 법칙이라고 봐야지.”
훈련을 통한 능력과 레벨업을 통해 얻는 능력이 분리되어 있었다. 또한, 스킬과 아이템은 훈련만으로 되지 않았다. 공략과 사냥을 통한 보상을 통해서 강화할 수 있었다.
“아주 그냥 자기들 멋대로네.”
“신이 만들어 놓은 법칙이니,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어.”
무진의 의심은 당연했다.
하는 수 없이 받아들이는 형식이 맘에 들지도 않고. 따지고 보면 종합적인 능력치에 합산이 되었다. 무엇보다 어떤 식으로든 시스템의 개입을 요구하는 점이 걸렸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대체 어떻게?’
미래의 무진은 던전 공략과 사냥을 하지 않은 상태로 군주급 헌터를 사냥했었다. 그 말은 기본 훈련과 운기행공만으로 절대의 성취를 이루었다는 뜻이 되는데, 이게 말이 되나?
비효율의 극치라는 걸 고려하면 불가능했다. 괜히 각성자들이 던전 공략과 사냥을 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흠.
무진은 지수와는 다른 고민에 빠졌다. 신이라고 해서 멋대로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굳이 저들이 만들어 놓은 방식을 따를 필요가 있을까?
여태 무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좀 더 연구해볼 필요는 있겠어.’
각성 입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각성한 인간에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무진은 그러한 각성 입자의 변화를 인지하고 있었다. 사람이 어느 순간의 변화로 본성이 드러나는 것과 아예 다른 성향이 되는 것은 차이가 컸다.
“돌아오면서 아이템과 스킬은 잃었다고 했지?”
“맞아.”
“아쉽게 됐네.”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곧 다시 찾을 수도 있고.”
“확실히 회귀자가 맞는 것 같아. 예전의 지수는 욕심만 많고 자제력이 없어…… 흠.”
“죽엇!”
지수의 기습은 통하지 않았다. 무진의 감각은 초월적인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또한, 지수의 다음 행동쯤은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으며, 유도한 면도 없지 않았다.
맞고, 차고, 돌려차!
[무진류 미필 연무12식] 기반의 반격기가 번개처럼 이어졌다.
퍼퍽!
쿠다다당!
기습적인 지수의 관자놀이 직격은 무진의 손가락에 가볍게 튕겼다. 그 순간 반동이 어찌나 심했는지 옆구리가 열렸다.
무진은 놓치지 않고 옆구리에 한 방, 날아가는 지수에겐 뒤돌려차기를 먹였다.
“야, 인마…… 헉!”
지수는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꽈앙, 쩌저저저적!
전광석화처럼 뻗어 나간 무진은 저공비행으로 완성된 좁은 공간에서 진각을 완성했다. 발자국이 새겨진 지면은 지수의 머리통이 있었던 자리였다.
주르르르!
지수의 귀밑머리에서 식은땀이 처량하게 흘러내렸다. 순간적으로 죽는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진의 발자국에서 이어진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다.
“잘 피했어.”
“……칭찬하지 마, 이 새끼야!”
무진은 지수의 성장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했다. 억울하게 돌아온 이상,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어설픈 각오는 독이 될 거야.’
미래를 알고 있다는 장점이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진 않았다. 뼈를 깎는 노력을 바탕으로 예전보다 강해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밟아 줄 수 있었다.
동료를 밟아야 하는 현실이 마음 아프다.
-무진류 빛의 일식 섬광
무진의 이름을 단, 말 그대로 빛의 무공이었다. 주먹을 쓰면 섬광권, 발로 차면 섬광각, 공력을 쓰면 섬광파라 할 수 있었다.
일점에 응축된 섬광은 빛을 초월하여 인식의 한계를 벗어난다. 극한의 빠름은 그 자체로 완벽하고 아름답기에 다른 어떤 기교도 필요 없다.
퍼엉, 까아악!
최소, 최적, 최강.
단순함의 극치임에도 빠름을 추구하기 위한 무진의 오랜 연구와 훈련의 정수가 깃들어 있었다.
무진은 비명을 지르는 지수를 따르며 섬광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주었다. 나날이 반응해 나가는 지수의 성장에 뿌듯함을 느꼈다. 동료란 모름지기 서로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어 주어야 하는 법이다.
“개자식, 다 날 위해서란 표정은 짓지 말라…… 까악!”
“사감은 없어.”
진심이든, 아니든 지수에게는 깊은 빡침을 제공했다. 사람 열 받게 하는 재주는 타고난 녀석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주먹을 부르는데, 빈정거리기까지 하니 도저히 못 참겠다. 더 열 받는 사실은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래선 안 되는 거잖아!’
지수도 어릴 때 회귀, 빙의, 귀환 소설을 본 적이 있었다. 나오는 주인공들은 대부분은 막강한 전력이라 모든 문제를 순조롭게 해결했다. 비슷한 또래에선 적수가 없고, 우월함을 과시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왜 나만!’
정석 루트에서 벗어나냐고!
이게 다 무진 때문이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지수의 투기에 무진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을 바라고 있었다. 광폭화란 특수 속성을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능력치가 대폭 향상되었다. 평소 광폭화에 익숙해지면 실전에서 더욱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번쩍!
무진의 섬광이 지수의 허점을 노렸다. 의지, 호흡, 육신이 조화를 이룬 완벽한 형태의 섬광권이었다.
치익, 슈아앙!
나아간 섬광권이 결계를 세차게 두드리며 만들어진 공간을 거세게 흔들었다. 부서지는 세계는 유리잔처럼 금이 갔지만, 곧 회복하기는 했다.
“……피했어 ……까악!”
“단발이라고는 안 했는데.”
섬광이영.
일식이지만, 여러 형태로 완성되었다. 하나가 안 되면 2개를, 2개가 안 되면 3개를. 아직 최고 속도에 이르지 않았기에 얼마든지 섬광분영을 완성할 수 있었다.
콰다다당!
처맞고 간신히 일어선 지수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정신을 차릴수록 분함이 깃들었다.
“치사하게!”
“발전했으면 됐어.”
“일식이라면서?”
“두 마리 치킨 같은 거야.”
대체 어디가 같은 거냐고?
초식의 이름대로 섬광은 빨랐다. 오감을 뛰어넘은 초능, 육감을 발휘하고도 간신히 피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수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었다.
‘씨발, 까도 까도 개새끼네!’
신화공을 구성까지 운용하여 천주부동의 신화금강을 이루지 않았다면 방금 수로 몸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고로 선이라는 게 있다고!”
“미래를 독식해서 강해지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어? 어떻게 보면 남의 미래를 빼앗는 짓인데.”
“……그건!!”
“남의 미래를 빼앗았다면 그것마저도 책임을 질 수 있어야지. 안 그래?”
“……너 잘났다!”
무지막지한 팩트 폭격과 양심 냉장고 같은 공격에 지수는 어질어질했다. 마냥 흘려들을 수만은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저게 어떻게 이제 막 열일곱 살이 된 녀석의 통찰력이냐고?
“그러는 너는? 만년삼왕도 누군가의 영약이잖아.”
“난 미래를 몰라.”
모르니까, 책임 없다.
아는 년이 책임져라.
인과가 딱딱 들어맞아서 지수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빈틈을 찾고 싶은데, 무진의 방어는 철옹성이었다. 애초에 수 싸움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미안하다.”
“어, 갑자기?”
“단순무식한 너한테는 무릴지도. 내가 한참 잘못 생각했어.”
“……죽어랏!”
“정의는 승리하는 법.”
“넌 악당이야!”
훌륭하다.
아카데미 입학을 위한 막바지 훈련이 불타오르네!
화르르르!
역시 동료란 몸과 몸의 대화로 더욱 가까워지는 법이었다. 지수의 땀 냄새는 나쁘지 않았다.
킁킁!
무진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이 되었다.
“나만 따라와.”
“모른다며?”
아, 그렇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하잖아.
***
“가는 거냐?”
“예.”
“잘하고 와라.”
“걱정 마세요.”
걱정은 무슨, 산하는 아들이 아닌 다른 아이들이 걱정되었다. 비교 대상이 아들이니만큼,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누가 있어, 내 아들과 비교가 될 수 있으랴.
‘따지고 보면 나의 우월한 혈통 때문이겠지.’
씨앗이 건강하니, 바르고 강건한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먼저 간 아내도 뿌듯하게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여보, 내가 이렇게 잘 키웠다오!’
회사에서는 임원으로서 빈틈없는 엘리트지만, 실상은 푼수기가 다분한 아저씨였다. 그런 아저씨의 은밀한 내숭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회사는 일하는 장소이니만큼, 공과 사를 철저히 분리해야 했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사원을 대해선 안 되었다. 그것이 자칫 모두에게 피해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만년삼왕은 괜찮은 거겠지?”
“명색이 권왕가의 가주님이신데, 약속을 어기진 않을 거예요. 정 없으면 그에 걸맞은 걸로 골라 주시겠죠.”
“그럼 다행이구나. 어서 가 봐.”
“예, 오늘도 고생하세요.”
“오냐.”
무진은 지수에게서 받은 무복을 입었다.
무복엔 권왕가를 상징하는 마크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어 어지간해서는 시비 털릴 일은 없을 것이다. 이래서 소속증은 필요했다. 배경에 전적으로 의지해선 안 되겠지만, 굳이 있는 걸 활용하지 않는 것도 어리석었다.
‘광폭화도 어느 정도는 안정이 되었겠고.’
무진은 지수의 광폭화 단계가 높아지면서 생기는 고질적인 문제점인 광기를 제어하는 방법을 무진공에서 찾았다. 9가지의 심법을 통합한 무진공에서 호심공을 분리해 지수에게 전수했다.
아파트 정문 옆 길가에 대형 리무진 세단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굴지의 대기업 회장님이나 타고 다닌다는 제로시스90이었다.
국산차도 많이 발전해서 현재에 와서는 외제차와 큰 차이는 없었다. 오히려 가격과 편리성에서는 더 나았다.
더럭!
차 문이 조용히 열렸다.
차 안에서 손만 나와 까딱거렸다. 길게 말하기도 귀찮다는 뉘앙스가 다분했다. 어린 시절을 함께한 죽마고우만의 거리낌 없는 텐션이었다.
“빨리 타.”
“제로클래스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너도 별수 없구나.”
“국산차가 많이 좋아졌지만, 외제차가 더 좋지. 여자 꼬시기도 더 편하고.”
“어린놈이 발랑 까져서는.”
무진은 외제차를 선호했다. 기왕 탈 거 가장 비싸고, 잘나가는 차를 타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인생 두 번 살진 않지…… 흠.
“외제차 싫어하는 여잘 본 적이 없는데.”
“그런 애들은 안 봐도 뻔해.”
첫인상이 중요하듯 보이는 것이 전부일 때가 많았다. 따지고 보면 클럽에서 재회를 상기하면서 만나지는 않잖아. 같이 살 사람 아니라면 외제차가 효과적이었다.
“자고로 네 재산을 탐하지 않고, 불려 줄 수 있는 여자를 만나야 해.”
“누가 그러던데, 돈 쓰는 걸 아까워하면 아무도 못 만난다고.”
운전석 옆에는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여인이 있었다. 도수 없는 안경까지, 전형적인 비서 누나였다. 다만, 체형이 지나치게 우월하다. 타이트한 복장을 입지 않았음에도 라인이 생생했다.
“인사가 늦었네요. 강무진입니다.”
“아가씨의 수행비서인 진세영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평상시에는 수행비서가 따르지 않겠지만, 공식적인 행사에선 진세영이 꼭 있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권왕가의 지원을 받아 엘리트 코스를 밟은 수재로, 무공 외엔 사회성이 떨어지는 지수에겐 진세영이 꼭 필요했다.
“말 놓으세요. 저는 지수처럼 갑질과는 거리가 먼 평민이거든요.”
“사석에서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꼭 그러세요.”
“시간이 된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