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권왕유가(4)
무진의 시리도록 차가운 독심에 지수는 소름이 돋았다. 순간 미래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따지고 보면 그때가 처음 사람을 죽이는 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적을 몰살시켰다. 냉정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냉철하다고 해야 할까?
“지나치게 극단적이잖아.”
“평범한 삶을 선택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선 한 번의 선택으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겠지. 나로선 주변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되는 싹을 가만히 놔둘 수가 없어.”
무진은 말하고 있었다. 끌어들인 이상, 목숨을 걸고 책임을 지라고.
그만한 각오도 없이 끌어들였다면 이쯤에서 포기하는 편이 나았다.
“알았어. 망설이지 않을게.”
“두 번 실패하고 싶지 않으면, 명심해야 할 거야.”
무진은 지수의 역린을 주저하지 않고 찔렀다. 그때의 아픔, 상실감을 돌아왔다고 해서 잊는다면 안일한 행동이었다. 시간의 여유가 있다는, 나태함은 최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해 봐.”
“영약 좀 있냐?”
“영약은 또 왜?”
“아버지 드리려고, 내가 효자거든.”
“……그럼 나는?”
무진은 가주님을 뵙기 위해 서둘렀다. 어른을 기다리게 하다니 효자로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아버지한테는 메시지를 보내 놓기는 했다.
-영약 득템 가능.
-훌륭하다, 아들.
무진은 지수를 동료로서 신뢰하지만, 목표 의식만큼은 확고했다. 자신과 아버지의 무탈한 삶, 양보는 없다.
물론, 지수의 양심을 건드린 점은 충분히 반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멸망 앞에서 양심이 과연 중요할지는 의문이다.
흐음.
유경중은 무진을 아래위로 살펴본 후,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의 훈련장으로 간 이상, 최소 실려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멀쩡한 모습으로 유유히 나타났다. 옷에 부푸러기가 생기긴 했으나 사소한 문제였다.
‘개차반 같은 아버진데.’
아들임에도 아버지의 행실은 신뢰하지 않았다. 훈련하겠다고 헬스 기구를 메이커로만 사 달라고 조를 때부터, 치매 걸리지 않았나 의심했다.
무공으로 만든 몸이라고 말이라도 해 주면 얼마나 좋아. 가문의 이익을 극대화할 방법이거늘. 돈 잡아먹는 늙은 망령이 가내의 살림살이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자기는 폼 잡는 일만 하고 싶다 이거지. 내 반드시 최고급 요양 병원으로 모시고 말리라.
실버타운이 결정된 아버지임에도 사람의 내심을 꿰뚫는 예리함이 간혹 작용하기는 했다.
매사에 그러면 의심을 안 할 텐데, 간혹이라서 탈이다. 이거 혹시 잘못된 거 아닌가?
‘아버지의 인정을 받았다? 대체 어떻게?’
그 쪼잔하고 몰염치한 손녀 바보에게 상식이 통할 리가 없을 텐데. 내공을 제한한 초식 대결을 한다고 해도 아버지의 무위는 인간적이지 않았다. 괜히 한국을 대표하는 10대 초인이 아니었다.
‘확실히 범상한 녀석은 아니군.’
유경중은 무진의 어린 시절이 뇌리에서 잠시 스쳤다. 따지고 보면 그때도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눈을 하고 있었다.
그 나이 또래와는 다른 침착함이랄까. 그런데 지금은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것이 무언지는 곧 깨닫게 되었다.
여유.
긴장감이 없다.
아버지를 봤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권왕가의 주인을 마주하고도 위축된 모습이 아니다. 그 자체로 무진이 평범하진 않다는 방증이 되었다.
게다가 옷 사이로 비치는 몸매…… 흐음.
“벗어 보라고 했나?”
“한눈에 꿰뚫어 보시다니, 대단하신 안목입니다.”
“욕인지, 칭찬인지 모르겠구먼.”
“부자간에 잘 통한다면 좋은 것이겠지요.”
애늙은이 같은 구석이 있지만, 나쁘진 않았다. 아버지가 인정한 몸이라면 범상치 않은 것 이상일 테고. 제대로 된 심법과 무공을 익힌다면 지수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본가의 소속증을 달라고?”
“그렇습니다.”
“아무에게나 막 주진 않아.”
“저는 아무나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만년삼왕 같은 거 없습니까?”
“허, 자신감이 과하구나.”
만년삼왕 같은 거라니, 유경중도 그건 구경도 못 했다. 설령 있어도 먹기 아까워서 고민할 sss급 영약이었다.
그걸 다짜고짜 달라고 하는데, 전혀 어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내가 먹어야 한다는 얼굴이었다.
‘됐어.’
무진은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의 흐름을 이끈 후 쐐기를 박았다. 애초부터 만년삼왕을 언급한 연유가 있었다. 사람의 심리란 작용 반작용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시다면 내기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법이긴 하다만, 내가 이긴다고 해서 얻는 게 없지 않느냐.”
유경중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보통은 넘어가기 쉬운 도발인데도, 한 타이밍을 끊어 냈다. 실상, 아쉬울 게 없는 입장이기에 굳이 모험을 자처할 이유도 없고.
“자신이 없으신 모양이네요.”
“어린 녀석이 도발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구나. 그런다고 통할 성싶으냐?”
“확실히 어렵네요. 여태 계속 통했는데.”
“그게 바로 연륜이니라.”
에헴.
어딜 어른을 이기려고. 그래도 제법이기는 했다. 도발력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어중간한 이들이었다면 통하고도 남았다. 여태 실패하지 않았다는 말도 설득력이 있었다.
“안 될까요?”
“부탁이냐?”
“아니면 말고요.”
“속을 긁는 재주도 타고났고.”
그 누가 권왕가의 가주 앞에서 아니면 말고를 시전할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진 않았다.
더욱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도발을 받아 주지 않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패배 선언까지도 계산에 둔 듯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여우 같은 구석이 있다.
“제안을 해 보거라.”
“아카데미 서열전 50위 안에 들겠습니다.”
“고작 그 정도로 만년삼왕을 달라니, 염치가 없는 것 아니냐?”
“중학교 전체 학생 수가 120만이고, 그중 40만이 졸업을 하지요. 그리고 절반 정도가 각성한다면 20만일 테고. 잠재 능력치를 고려하면 최소 10만은 아카데미에 도전하겠죠. 그 안에서 50위면 잘하는 거 아닙니까?”
“애초에 작정하고 왔구나. 하지만 만년삼왕은 sss급 영약이다. 국내에 한정해도 0.001%도 얻기 힘들어. 그에 반해 10만에 50이면 너무 쉬운 거지.”
“40위.”
“15위.”
“35위.”
“씹8위.”
“하아, 25위요!”
“20위, 더는 안 돼. 싫으며 포기하고.”
무진과 유경중의 밀당에 지수는 기가 찼다. 한편으로 할아버지를 상대할 때와 아버지를 상대할 때의 갭 차이가 엄청났다.
만약 이런 식으로 계산적으로 나왔으면 할아버지는 참지 못하고 내력이 실린 주먹을 발출했을 것이다. 그에 반해 아버지는 계산적인 이해타산을 싫어하지 않았다.
‘얜 이때부터 능구렁이를 품고 있었나?’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점을 전혀 놓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심 이겼다고 만족하겠지만, 처음부터 무진의 함정에 갇혀 있었다.
자신도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1등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무진은 시작부터 50위를 바탕에 깔았다. 이 말은 줄여 봤자 반타작이고, 최대 20위란 소리였다.
‘아버지를 가지고 노네!’
그러면서 아버지의 기는 또 살려 주고 있었다.
“하아, 졌습니다. 과연 대단하시네요.”
“너도 제법이었다. 아주 훌륭한 재능이구나. 공부를 잘한다고 하더니, 지수에게도 도움이 되겠어.”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많은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인정할 줄도 알고, 그래도 사내구나.”
유경중은 매우 흡족한 얼굴이었다. 말이 쉽지 20위는 어려웠다. 칠대가문은 물론, 이름 있는 헌터의 자식들이 나온다. 조기교육이 된 아이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데, 지금부터 시작하는 무진에게는 버겁다 못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무진의 도전 정신을 유경중은 높게 평가했다. 사내라면 응당 저런 자신감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락한 것은 아니다.”
“나중에는 제 허락이 필요할 겁니다.”
“그건 두고 봐야겠지.”
“반드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무진은 소속증을 받고, 내기를 성립한 것으로 만족했다. 어차피 이 내기는 질 수가 없고, 지수의 일그러진 표정은 덤이었다.
“모처럼 왔는데, 술이라도 할까?”
“첫이슬을 마시고 싶습니다.”
야, 이 미친놈아, 너 미성년자야!
지수는 아버지의 농을 진담으로 받아들이는 무진의 응수에 골이 지끈거렸다.
마시고 싶은데, 마실 기회가 없어서 못 마셨으니. 그냥 대놓고 마시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나중에 책임은 누가 질지 뻔하다. 마치 가게에서 술 마시고, 내빼 봤자 식당 주인만 곤란한 안타까운 현실과 비슷했다.
‘이러면 내가 뭐가 돼?’
무탈하게 대기업의 임원이 될 엘리트를 일탈시킨 주범이 되잖아.
허!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흡족해하는 무진을 보며 지수는 한숨을 흘렸다. 대작에 당황한 아버지도 지기 싫었는지 어디 얼마나 마시나 시험했었다.
어른이 주는 술은 마셔도 된다면서.
웬걸!
이 어리다 못해 파리한 미성년자가 소주를 대짝으로 마셨다. 그러고도 취하지 않고 초지일관한 모습이라니. 술 귀신이 따로 없는데, 그냥 타고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공력으로 주기를 뺐다면 눈치채셨겠지.’
말술이었다.
아버지는 연신 정말로 처음 마시는 거냐고 물어봤다.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시다 보니 취기가 달아오른 아버지는 결국, 승복하고 말았다.
“이래서 술을 마시는구나. 중독되겠는걸.”
“그만해, 이 미친놈아!”
“몰래 마시는 것보다는 낫잖아.”
“대놓고 마시는 게 더 나빠.”
“취중진담이라고 하지 않나?”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대체 몸뚱이가 어떻게 된 거야?”
“최적화라고 보면 돼. 자연스럽게 정화 작용을 하거든. 그래서 어지간한 독은 통하지 않을 거야. 약국에서 산 약으로 시험해 봤으니 확실해.”
“……?”
상상을 초월하는 말이었다.
자동 중화, 이게 말처럼 간단한 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누구나 된다면 술에 중독되지도 않겠지. 육체를 극한까지 단련하고, 통제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그래서 더 의문이다. 대체 평소에 뭘 하기에 저런 몸이 되냐고?
‘괴물 같은 새끼!’
지금도 이런데 아카데미를 통해 레벨업을 하고, 성좌의 선택을 받으면 대체 뭐가 될까? 이거 악당을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분명한데도, 이상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도 너무하잖아. 만년삼왕은 가문에 없다고! 왜 없는 걸 달라고 하는 거야?”
“없으니까, 달라고 하는 거지.”
“뭐?”
“아버님이 빚을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시잖아. 형님은 더더욱 그렇고.”
“……이 악마 같은!!”
어쩐지 영약 있냐고 물어봤을 때부터 이상했었다. 가문에 있는 영약을 확인하고, 없는 걸 고른 것이다. 그러고선 내기를 통해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아버지는 무진의 개수작에 휘말린 희생양이 되었다.
“어때, 날 감당할 수 있겠어?”
“흥, 내가 못 할 것 같아!”
“그래, 열심히 노력해 봐.”
“왜 또 그런 식이야?”
무거운 책임감에 지수는 짜증이 치밀었다. 그런데 어쩌겠어? 이 모든 사태는 자신이 만들었다. 그러니 책임을 지지 않으면 무책임한 년이 된다.
“나를 잘만 컨트롤하면 복수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거야. 덤으로 세상도 구하고.”
“세상을 구하는 게 먼저야.”
“좀 솔직해져, 다 잃은 후 세상을 살아갈 자신은 있고?”
“중딩 주제에 못 하는 말이 없어!”
화가 나지만, 지수는 인정해야 했다.
이 녀석은 중딩 같은 것으로 봐선 안 된다. 이미 완성된 녀석일지도 몰랐다. 든든하면서도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중딩한테 훈계나 듣고.’
정곡을 찔리니, 뼈가 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