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권왕유가(3)
“본가의 제자가 되려는 게냐?”
“알고 계셨군요.”
“배경이 필요할 때지. 하면 본가의 기본형을 배워 보겠느냐?”
“초식만이라면 얼마든지요.”
“좋구나.”
어느새 짝짜꿍한 후, 의기투합까지.
망할, 의조손동맹이었다.
“오너라.”
“가겠습니다.”
무진은 지수에게서 기본 동작을 배웠다고 미리 밝혔다. 그렇기에 유장산은 얼마나 익혔는지를 확인하는 차원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권각이 부딪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본가의 정수를 모두 빼먹었구나.”
“권의 극의는 권왕가에서 비롯되었으니까요.”
“아부하는 솜씨도 천하제일이군.”
“아부가 아니라 사실입니다.”
권왕유가의 요체는 필살기에 있지 않았다.
권공의 극의, 기본공으로 시작하여 결정타를 완성하는 과정에 있었다. 그렇기에 신화천권의 붕산패, 화천폭, 천절격, 패왕멸의 절초보다 기본 권공의 완성이 중요했다.
어쩌면 그러한 기본이 상대에게는 필살기처럼 다가올 수 있었다. 실제로 권왕은 과거 잇뽕이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었다.
파파파팟, 파앙!
내력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유장산과 무진의 공수에서 거친 파공음이 울렸다. 사방으로 퍼지는 충돌의 편린이 연무장을 요란하게 흔들었다.
타앗!
큭!
유장산은 권왕이란 타이틀을 고스톱으로 따진 않았다. 완전무결해 보였던 무진의 권로에서 흐름을 변화시키며, 빈틈을 찾아내 흐트러뜨렸다. 내지르는 일격에 호흡이 끊기면서 옆구리를 허용했다.
“젠장, 졌습니다.”
“허허, 이거 완전 걸물이구나. 아니면 미친놈이거나.”
“그런 소린 처음 듣습니다.”
“음흉한 구석도 있고.”
“3할은 숨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고얀, 이제부터 너는 본가의 무인이다.”
“감사합니다.”
“가 보거라. 아들 녀석이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예, 형님!”
얼렁뚱땅 입문이 해결되자, 지수는 조금 실망했다. 확실하게 몰아세웠으면 좋았을 텐데, 옆구리 한 방으로 끝나서 아쉬웠다.
그렇다고 내력까지 동원한다면 계획이 어그러진다. 아직은 적아가 분명하지 않아 진실을 밝힐 때가 아니었다.
흠.
무진과 지수가 연무장을 떠난 후 유장산은 한참을 서 있었다. 초식의 교환으로 부족함을 가다듬어 줄 요량이었다. 한데, 마지막의 빈틈을 제외하면 실로 놀라우리만큼 완성도가 높았다.
‘믿기 힘들구나.’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훈련하지 않고서야 상식적으론 불가능했다. 이만한 성취를 이루려면 어지간한 수련으론 어림도 없었다. 근래에 지수의 무공이 급격하게 성장한 것도 그렇고.
그뿐이랴, 완성되었다고 자부했던 권형을 비집고 들어온 무진의 권은 놀라웠다.
‘그간 너무 안일했군.’
매너리즘에 빠졌던 권왕은 수련 부족을 깨달았다. 그 단초를 제공했다는 사실만으로 보통 녀석은 아니었다. 이제는 나아갈 방향을 찾았다는 점에서 홀가분해졌다.
‘정도껏 했어야지, 아직은 아니라고!’
‘형님이 그것도 모를 것 같아?’
‘작작 해라.’
‘한번 형님은 영원한…… 알았어.’
무진은 간혹 허점이 비치긴 해도, 지수의 안목을 신뢰하는 편이었다. 지수는 현재 본신의 능력을 최대한 숨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가문조차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렵다는 뜻이 되었다.
‘성급한 행동은 독이 될 수 있어.’
‘그래도 형님…… 어르신은 믿을 수 있잖아.’
‘믿고 안 믿고는 지금 당장 중요하지 않다고.’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앞으로 어르신은 네가 아는 것보다 훨씬 대단해질 테니까.’
무진의 전음에 지수는 고개를 저었다. 이후 모든 일의 시발점이 된 사건을 고려해야 했다. 시간의 비틀림을 최대한으로 줄여야, 그나마 아는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조심하는 건 좋지만, 그게 맘대로 되겠어.’
괜히 나비효과가 무서운 것이 아니다. 아주 작은 변화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엇나갈 수 있었다.
더욱이 미래를 안다고 해서 대비가 완벽하진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다가올 운명이라면 큰 줄기가 될 사건과 인물을 지켜야 했다. 그 중심에 있는 사람이 바로 권왕이었다.
‘힌트가 됐다면 벽을 넘을 수도 있겠지.’
무진이 보기에 지수는 지나치게 자신이 모든 걸 다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동료를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봐서는 안 되었다. 수많은 변수를 혼자서 감당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이었다.
지수가 말해 준 미래를 헤아리기에는 빈틈이 많아 보이지만, 현재의 권왕이 더욱 강해진다면 예기치 못한 사태를 막아 낼 순 있을 것이다.
‘뿌리가 튼튼하다면 그 어떤 거친 풍랑에도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지수는 할아버지가 눈치챌 수도 있다고 경고했지만, 무진은 여전히 진의를 드러내진 않았다.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안목은 고쳐야 할 부분이었다.
‘재밌기도 하고.’
전력은 아니더라도 권왕과의 대결은 이 세상의 초인들이 얼마나 강한지 가늠하는 잣대로 작용했다.
대련을 발판 삼아 이 순간에도 무진은 강해지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지수도 더욱 강해져야 했다.
어!
권왕가의 가주실로 가는 통로에서 지수를 알은체하는 이들이 있었다. 담담한 척하지만, 지수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탐탁지 않다는 신호였다.
흥!
그들도 대놓고는 아니더라도 아니꼬운 티를 냈다. 가문 내에서 그럴 수 있는 자들은 한정적일 테니 짐작은 갔다.
“얼굴 보기가 힘드네.”
“바빴어.”
“바빠도 인사는 해야지, 오빠한테.”
“반가워, 됐지.”
숙부의 둘째 유지철과 셋째 유지연이었다. 두 살 차이로 유지철은 아카데미 2학년이고, 유지연은 이번에 같이 아카데미에 가게 되었다.
아버지와 숙부의 사이는 좋은 편이나, 자식들 간에는 은연중 경쟁 심리가 있었다. 주된 원인은 지수의 어머니가 늦은 나이에 지수를 낳았고, 여자라는 점이 작용했다.
시대가 변해 아들보다 딸을 선호하긴 해도, 권왕가 같은 대가문에선 후대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현 권왕가의 가주에겐 지수뿐이지만, 동생에겐 유지호, 유지철, 유지연이 있었다. 하물며 유지호는 아카데미를 졸업해서 가문의 무력대 중 하나를 맡았다.
유지호의 자질이 떨어진다면 모를까, 다음 대 가주를 예약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늦게 태어난 지수의 자질이 유지호를 넘어섰다. 이때부터 서로 간에 앙금이 조금씩 쌓였다고 봐야 했다.
무진은 사전에 얘기를 들었다. 오기 전에 가족 관계를 모르면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기에 사전 조사는 필수였다. 알지도 못하는 시비는 사양이었고, 어떤 일이든 최소한의 대비는 중요했다.
‘지수를 건드리긴 부담스러울 테고.’
예상대로 유지철은 지수가 아닌 자신을 노렸다. 목표물이 부담스러우면 주변을 걸고넘어지는, 시비를 거는 자들의 전형적인 수법 중 하나였다. 그러다 목표물이 걸려들면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도 있고.
“남자 친구? 소개라도 시켜 주지 그래.”
“강무진입니다. 지수와 같이 아카데미에 가기로 했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선배님으로 부르겠습니다.”
“지수의 친구치곤 예의가 있구나. 하지만 네가 나를 선배로 부를 수 있을진 모르겠는걸.”
“최선을 다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유지철의 연이은 도발에도 무진은 적절한 선에서 받아 주었다. 상대를 몰랐다면 화를 내도 이상하진 않았다.
구시대적인 발상일 수도 있겠지만, 출가외인이기는 했다. 결혼을 해 가문을 떠나면 끝이라는.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자, 이번에는 유지연이 나섰다. 같은 또래이고, 아카데미에 가게 되었으니 그런 쪽으로 몰아갔다.
“칠대가문은 아닐 테고, 길드 쪽이야?”
“미안하지만, 어느 쪽도 아니야.”
“그럼 무공을 배우진 않았겠네.”
“권왕 어르신에게 허락을 받고 배우는 중이야.”
각성해도 기존에 가지고 있는 무공이나 마법이 있는 경우 등급의 차이가 컸다. 그 점을 걸고넘어지려 했지만, 권왕을 언급한 이상 입을 닫아야 했다. 여기서 문파의 무공을 유출했다고 물고 늘어져 봤자, 역공을 당할 수도 있었다.
“방금 권왕 어르신을 뵙고 오는 길이거든. 의심스러우면 가서 확인해 봐도 돼.”
“……누가 그렇대!”
“아냐, 이런 일은 확실하게 해야지.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걸 수도 있잖아. 허락도 없이 가문의 무공을 익히면, 누가 그러던데, 단전을 부수고 사지의 근맥을 자른다고.”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해!”
의심을 품었던 유지연은 물론, 유지철마저 당황했다. 되레 과격하게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답변이 궁색해졌다.
의심스럽다고 해도, 검증하자고 해도. 어느 것 하나 원치 않은 흐름이었다. 확인하는 순간 속이 좁다는 걸 드러내는 꼴이었다.
담담히 자신들을 바라보는 무신의 시선에 유지철과 유지연은 화가 치밀었다. 마치 뭘 해도 안 된다는 듯한 태도였다.
‘이 새끼가!’
말로는 어찌할 방도가 없자, 유지철은 기세를 발산하려고 했다.
의도를 알아챈 지수가 나섰다.
“이러면 꽤 소란스러울 텐데, 괜찮겠어?”
“오해하지 마라! 가문의 무공을 익혔다기에 실력 좀 보려고 했을 뿐이야.”
“오빠가 무슨 자격으로?”
“말이 심하잖아.”
“나도 그럼 지연이를 시험해 볼까?”
“벌써부터 싸고돌다니, 너도 어쩔 수 없구나!”
“그 말 책임질 수는 있고?”
지수의 무심한 눈빛에 움찔한 유지철은 한발 물러서고 말았다.
‘이 씨발 년이, 죽으려고!’
자기보다 어린 지수에게 밀렸다는 걸 인지하자, 자존심이 상했다. 유지철은 당장이라도 주먹을 내지르고 싶었다. 그 순간 동생이 팔을 잡자 이성이 돌아왔다.
여기서 싸워 봤자 득이 되지 않는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더욱이 시비가 붙은 연유를 파고들면 곤란했다.
‘빌어먹을, 아카데미에서 두고 보자!’
분노를 다독이며, 간신히 돌아섰다. 그러나 지수에게 쫄았다는 사실에 변하지 않았다.
재능은 뛰어날지 몰라도, 2년의 차이가 있었다. 각성도 하지 않은 지수에게 두려움을 느끼다니, 화가 치밀었다.
찌릿!
그러면서도 남매는 정작 지수가 아닌 무진을 노려본 후 획! 하고 사라졌다.
돌아서 가는 유지철은 유지연에게 조용히 당부했다. 이런 일은 같은 시험을 보게 될 유지연에게 맡기는 편이 보기에 좋았다. 제법이기는 해도, 이제 막 무공을 배웠다면 실력 차는 명확했다.
‘할 수 있지?’
‘물론이야.’
유지연도 자신은 있었다.
남매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무진은 지수를 보며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사이가 좋네, 다들.”
“비꼬지 마.”
“그래도 너무 그러지 마, 내가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대놓고 도발하면 쓰나.”
“뭔 개소리야!”
“쟤들이 너 없을 때만 노릴 거 아냐. 그럼 나는 자연스럽게 네 옆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을 테고. 많이 컸어, 우리 지수.”
“……닥쳐!”
지수는 당황스러웠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의도치 않았지만, 같이 붙어 다닐 명분이 생겼다.
“좋으면 좋다고 해, 물론 받아 주진 않아.”
“언제까지 개소리를 할 거야. 진짜 끝장을 볼까?”
“이길 수는 있고?”
“조만간 두고 봐.”
무진에게 치부를 들킨 것이 편치는 않았다. 사촌 간에 화목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것이 맘처럼 되진 않았다. 실제로 지수는 후일 그들의 행태에 실망했었다.
“물러.”
“무르다니, 뭐가?”
“단호했어야지.”
“……뭐?”
무진은 지수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웃고 떠들 만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아직은 아니라고 했잖아!”
“망설임은 죄악이야. 물론, 인간이라면 그럴 수 있지. 더욱이 가족이라면 흔들릴 수도 있어. 하지만 네가 말한 미래에서 저들이 과연 가족일 수 있을까?”
“확실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그리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진 않는다고!”
“그런 각오라면 또 망설이겠군. 하지만 난 주저하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