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권왕유가(1)
흠.
넓디넓은 정원과 건물은 구시대와 현대가 오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산간벽지라면 모를까, 도심의 금싸라기 땅에 떡하니 자리했다.
그 넓은 정원의 중심에 선 노인……이라고 하기에는 워낙 강건한. 피지컬 대회를 휩쓸고도 남을 육체를 지닌 노인이었다.
멋스럽게 가꾼 수염과 백발이 아니었다면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우월한 피지컬의 극의였다.
생각하는 자세조차 대단했다. 무릎을 꿇고 턱을 괴였을 뿐인데, 옷이 터질 듯이 팽창한다.
탱탱!
이게 어딜 봐서 노인이야?
고민이라곤 평생 하지도 않을 호탕한 외형이나, 노인은 요즘 들어 심기가 편치 않았다.
‘뭔가 있는데?’
이 간질거리는 찜찜함이 물극필반에 오른 심상을 흔들어 놓았다. 거리낄 것이 없이 살아온 인생에 뜻하지 않은 고민을 안겨 주었다.
“이런, 마법사로서 냉철하지 못했구나.”
“아버지, 제발 그런 말씀 좀 하지 마세요.”
어느새 다가온 중년의 사내, 어딘지 모르게 노인과 닮아 있었다. 피지컬이 아닌 외모의 선이 비슷했다. 다만, 강철을 둔탁하게 잘라 놓은 듯한 노인과 달리 선이 부드러웠다.
권왕유가의 전대 가주 유장산과 현임 가주 유경중이었다. 당대의 성세를 탈 없이 이끌어 나가고는 있었다.
단지, 마법사 운운하며 지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는 아버지의 괴행에는 유경중도 도저히 장단을 맞춰 주진 못했다.
“내가 무슨 홍길동도 아니고, 마법사를 마법사라고 하지, 대체 뭐라고 하느냐!”
“밖에선 마법사가 아니라 힘법사라며, 물리 마법사 납셨다고 합니다.”
“호오, 요즘 아이들은 표현이 참 신박하구나.”
“칭찬이 아니라 욕입니다.”
이리 말해도 아버지의 특수 속성이 화염계 마법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다른 마법은 일절 하지 못하지만, 화염계 마법만큼은 마도사급에 이르렀다.
마법협회에서 괜히 등록해 주진 않았다. 따지고 보면 지고의 경지에 이른 마권사긴 한데, 마법으로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주먹에 불 좀 붙인다고 마법은 아니지 않는가.
불에 타 죽기보다 맞아 죽는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어느 쪽이 죽기 전에 더 아픈지는 알고 싶지 않다.
“어떤 연놈이냐?”
“누군지도 모릅니다. 혹시, 찾으려고요?”
“그냥 주소나 알자는 거지?”
“그러다 큰일 납니다.”
“내가 설마 진짜로 찾아가겠느냐?”
“예.”
겉으로는 호인에 대인처럼 보여도, 아버지의 쪼잔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유경중이다. 절대 알려 줘서도 안 되고, 알 방법도 없었다.
“말세로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세상 걱정하는 척하지 마시죠. 조금 역겹습니다.”
“이놈이, 가주가 됐다고 말을 막 하는구나.”
“저, 아버지 아들입니다.”
자기가 누굴 보고 배우겠냐는 아들의 흔들림 없는 과학적인 눈빛에 유장산은 편안하게 말문이 막혔다.
어릴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대가리가 50년을 묵으니 아비를 이겨 먹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그리고 그냥 말하세요. 왜 자꾸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가문을 들쑤시고 다니는 겁니까? 애들이 훈련에 집중이 안 된다고 하잖아요!”
“어허, 지도 대련이었어.”
“치료비가 얼마나 나오는지 아세요?”
“세상이 돈이 다가 아니다.”
“돈 없으면 아버지가 즐겨 드시는 소고기도 못 먹습니다. 풀떼기만 드시고 싶으면 말씀하셔도 됩니다. 아주 소박하게 운영해 보겠습니다.”
“허, 녀석. 농담도…… 농담 아니구나!”
어려서는 유약했었지만, 성격만큼은 한다면 하는 강단이 있었다. 유장산도 더는 강경하게 나가지 않았다. 잘못했다가는 정말로 청정도인처럼 사는 수가 있었다.
신체를 경건하게 하겠다고 곡기를 한 달이나 끊었던 끈기를 잊지 않았다.
유장산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 당장 해결해야 할 사안도 아니고, 소고기 없이 살 순 없잖아.
나이 들어서 근력 달리면 사내로서 끝장이었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있기는 또 뭐가 있어요?”
“내 예리한 직감으로 볼 때 남자가 분명해.”
“그럴 때마다 틀렸던 건 아시고요!”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니라.”
“잘도 갖다 붙이시네요.”
여기서 그딴 말이 왜 나오는지 알고 싶지도 않은 유경중이었다. 제발 말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지적인 척하려다 개망신당한 적이 한두 번인가.
입만 다물고 있으면 만사형통인데, 아버지에겐 불가능했다.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끊으라는 편이 현명하다.
“하나뿐인 지수가 걱정되지도 않는 것이냐?”
“경운이가 서운해하겠네요. 그리고 무진이 만나고 온다고 했습니다.”
“무진이? 아, 그 녀석.”
“아카데미에 같이 가기로 했다더군요.”
각성 전까진 일반 학교에 다니는 것이 통상적이지만, 가문에 속한 아이들은 따로 모아서 교육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성숙하지 못한 시기이다 보니, 가문에서 배운 무공을 남용할 수도 있었다. 불행한 사고를 방지하고, 가문 간 교류를 통해 우호를 다지자는 취지도 있었다.
지수는 가문 간의 이해득실보다는 평범한 학교생활을 경험해 보기를 바랐다. 그래서 아카데미에 가기 전엔 일반 학교에 진학시켰었다.
“그래 봤자 주먹도 못 쓰는 녀석이 아니더냐.”
“기본적인 상식은 있어야 삶에 도움이 됩니다. 게다가 무진이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은 수잽니다. 소양이 부족한 지수에겐 이보다 좋을 수가 없습니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어. 그놈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냥 마음에 안 든다고 하시지요. 괜한 억지는 추합니다.”
보통 여자아이였다면 걱정이 되겠지만, 지수는 권왕유가에서도 손에 꼽히는 인재였다. 수련을 받지 않은 아이가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하물며 근래엔 지수의 재능이 만개하고 있었다.
“할아비밖에 없다고 했으면서.”
“제발 욕먹을 소리 좀 하지 말라니까요!”
“작게 말했어.”
“들리는데 무슨 소용입니까?”
무인을 일반인과 비교하면 무리가 따랐다.
유경중은 아버지에 미치지 못할 뿐, 실력이 부족하진 않았다. 바로 앞에서 중얼거리는데 들리지 않을 턱이 있나. 그런데도 투덜대는 건 들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뻔뻔함이었다.
“한번 보잔다고 해라.”
“왜요, 데리고 오면 두들겨 패게요?”
“아비를 못 믿느냐?”
“전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습니다.”
“……야, 인마!”
아들의 빈틈없이 꽉 막힌 완고함에 유장산은 헛바람을 삼켰다. 이럴 땐 빈말이라도 들어 주는 척은 하지 않나. 매번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혀 맘이 아팠다.
“데리고 온다고 했으니, 적당히 하시죠.”
“그걸 왜 인제 말해!”
“아버지가 이리 나올 줄 알고 경고하는 겁니다. 애들한테 창피하지도 않으세요!”
“난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 어디 가?”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아들이 휙! 하고 돌아서자, 자칭 예의 빼면 시체였던 유장산의 언성이 높아졌다.
“오늘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민데. 같이 하시겠다면야, 저야 감사하죠.”
“바쁜 사람을 붙잡아 두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유장산 왈, 오늘의 명언이었다.
가문의 확장성 면에서 작금의 성쇠는 오로지 아들의 헌신이 있기에 가능했다. 유장산도 그 점에 관해서는 이견을 제시할 수 없었다.
무진은 지수의 오묘한 표정에서 불만을 알아챘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할 말 있으면 하지 그래.”
“편한가 봐. 복장이 한결같고.”
“한결같이 편하면 좋은 거지.”
“우리 집은 처음이잖아.”
“토마토라도 사 올까?”
“됐어!”
제철에 나온 유기농 토마토가 그렇게 인기였다. 맛도 좋고, 영양도 좋고. 살짝 데쳐 먹으면 흡수도 빠르고, 항산화 작용으로 피부 노화 억제에도 그만이었다.
그런 좋은 토마토를 거절하다니, 배가 불렀다. 이따가 아버지나 사다 드려야지. 나이가 들수록 피부는 소중했다.
“너는 토마토 많이 먹어야 할 텐데.”
“닥쳐!”
지수는 성난 황소처럼 연신 콧바람을 뿜어 댔다. 어찌나 강한지, 바닥의 먼지가 돌풍에 날리듯 휩쓸렸다. 토네이도의 형성과정을 볼 수 있는 과학적인 진귀한 광경이었다.
‘처음인데.’
칠대가문의 방문을 제외하고, 지수는 처음으로 남자…… 동료를 데리고 왔다. 최소한의 신경은 쓸 줄 알았는데, 어제와 다르지 않은 평상복이었다. 원체 깨끗하게 입고 다니기는 해도, 다른 모습을 기대했었다.
“떠난 기차는 자기부상열차였어.”
“뭔 소리야.”
“놓친 고기가 최고급 투뿔 한우였으니 어쩔 수 없지.”
“선 넘지 마라.”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간절히 소원한다면, 고려는 해 볼게.”
무진의 거만한 태도에 지수는 이를 갈았다. 쌍욕을 해도 부족한데,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훈련을 같이 해 본 결과, 무진은 그 자체로 기연이자 영약이었다.
믿어지진 않았다. 수십 년의 훈련과 실전보다 무진과 함께한 기간의 순도가 높았다. 성격은 지랄 같아도, 성능비가 너무 뛰어나서 버릴 수도 없다.
“계륵 같은!!”
“호오, 그리 말한다 이거지. 이참에 칠대가문을 순방해야겠다. 견식은 넓을수록 좋다고 했으니까.”
“치사하게, 이럴 거야?”
“토마토 살게.”
“케첩이나 처먹어!”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지수의 집 앞에 도착했다. 무진은 일대를 둘러보며 가늠해 보았다.
“이 일대의 땅값이 평당 2억이라고 했지, 무남독녀가 아니라서 다 물려받기는 힘들 것 같고.”
“네가 뭔데 남의 집 재산을 조사해?”
“궁금하잖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가문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누구나 알고 싶어 할걸.”
있다 없어 봤던 지수도 재산의 소중함은 알고 있었다. 이게 있을 때는 부담이었는데, 없으니까 인생 전반이 추해진다.
“그래서 이 누나가 대단해 보이고 그래?”
“후광이 비치고, 달라 보이네.”
“속물.”
“돈 싫어한다는 사람은 위선자지.”
세상은 돈으로 돌아가고, 돈이 세상을 돌아가게 한다. 자고로 돈으로 안 되는 일은, 돈을 더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0억으로 안 통하면 1,000억을 준비하는.
그것이야말로 순수한 성의였다.
무진은 돈의 속성을 외면하진 않았다. 자신도 어머니의 유산과 아버지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삶이 척박했을 것이다.
물론, 돈이 없다고 해서 세상을 원망만 하며 살진 않는다. 언제나 최고의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할 테니.
“부탁하러 왔으면 좀 얌전히 있어.”
“동료가 되어 달라는 건 내가 아닐 텐데.”
“한 번을 안 져!”
“그렇게 이기고 싶었쪄요? 져 줄까?”
이 개새!
본색을 드러낸 무진의 진면목을 알수록 지수는 뒷목을 잡을 때가 많아졌다. 하는 말마다 이토록 얄미울 수가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그런데 또 틀린 말은 하지도 않는다. 자기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고, 상대는 독 안에 든 쥐처럼 몰아갔다.
“따지고 보면 나 같은 인재를 공짜로 스카우트한 거잖아.”
“그래, 네 똥 굵다! 됐냐?”
“아니, 그건 내가 졌다. 너처럼 막히는 건 사양이야.”
“……안 막히거든!”
무진은 대련을 통해 지수가 인재임을 확신했다. 본인 입으로 다른 가문의 후지기수를 개좆밥으로 본다고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문이 열렸다.
중세 시대 귀족가의 집사처럼 단정하게 차려입은 중년인이 나왔다. 반듯한 중년인의 표상으로. 머리 한 톨 빠짐없이 포마드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꼼꼼한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제 오시는 겁니까, 아가씨!”
“아가씨 아니고, 지수라고요. 왜 자꾸 말을 높여요. 저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제가 편해서 하는 겁니다.”
“제가 불편하다고요.”
“그러시다면 노력해 보겠습니다.”
공주님 납셨네, 라는 무진의 으쓱한 손짓에 지수는 억장이 무너졌다. 집사장인 한길수 아저씨로 인해 졸지에 갑질녀로 등극하고 말았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