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득(1)
반복된 일상이 아닌, 폭풍 같은 하루였다.
무진은 세안을 끝내고 방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기대했던 고백이 아니라서 아쉽지만, 인생의 전환점이 될 계기였다.
무진은 아버지의 뜻대로 평온한 삶을 살기로 했었다. 사실 평범한 인생도 그리 녹록하진 않았다
주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루가 멀다고 시끄러운 소동이 일어나는 현실이다. 모두가 그렇다고 단정하진 않겠지만, 남들처럼 살기가 쉬웠다면 사건·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동료가 되어 달라니. 하하.”
누군가에겐 유치한 농담이나, 무진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여느 때와 달리 지수의 무위는 놀라웠다. 여물지 않았던 미숙함과는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지수는 죽으면 죽었지, 절대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 완고한 성격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맹한 모습과는 다른 고집이 있었다.
물론, 지수의 절박함에 이끌려 아카데미 입학을 결정하진 않았다.
“갚아야 할 빚이기도 하고.”
무진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생존을 떠나 강해지는 법을 찾아내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냈다.
소위 천재라 부르는 부류와도 격이 달랐다. 갓 태어났을 때는 몰랐지만, 나이가 들어 갈수록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들이 막 걸음마를 뗐을 때 정신적으로 성숙했었다. 성장 속도도 빨라 보통 아이들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컸었다.
그럴수록 아버지의 우려가 심해져 육체와 내면을 다스리고, 통제했었다.
여섯 살 때 무진은 격변을 겪었다.
육체의 단련은 각종 매체와 도서를 통해 습득했지만, 유치원 때 지수를 보고 충격을 받았었다. 자신과 같지만, 다른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육체가 아닌 또 다른 힘, 지수를 통해 공력을 읽었다.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닐 수도 있었다. 대단치 않은 범용의 삼재공에 불과했으나 내력의 기틀을 쌓는 기반이 되었다. 또한, 이 세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안목을 제공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지수를 특별하게 여긴 이유였다. 공력을 통한 만상의 흐름을 깨치자 육체 단련과는 차원이 다른 힘을 소유하게 되었다.
얼마 후 공력을 쌓고, 무공을 깨쳤다. 각성한 무인이 들었으면 기겁할 일이나, 무진에게는 대수롭지 않았다. 공력이 중요했을 뿐, 쓰임새는 스스로 구체화할 능력이 되었다.
그 와중에 마음의 병이 깊은 아버지를 치유할 수 있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잃고 심적으로 부담이 컸던 아버지였다. 그것이 점차 누적되어 신체적으로 결함이 생겼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마음의 병으로 인해 몸이 견디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때부터 무진은 틈이 나는 대로 내력을 이용해 아버지를 강화했고, 얼마 전에 기어이 환골탈태를 시켰었다.
환골탈태 시 수혈을 짚었기에 아버지는 내막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근래에 들어 아버지와 같이 걸으면 형·동생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변에 누나들이 많을 땐 아버지를 위해서 간혹, 형이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
작금의 평온은 지수의 도움이 컸다. 시중에 떠도는 기본 무공서로 알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늦었으면 불행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어디까지 통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녔다면 경험해 보지 못할 모험이다. 누군가와의 경쟁, 의외로 피가 끓어올랐다. 이 능력으로 어디까지 도달할지 확인해 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댔다.
자신의 피가 차갑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겠어.”
만약 지수가 아카데미에 가자고 조르지 않았다면 뜨겁게 타오르는 투기를 만끽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은 이런 기회가 오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었을 수도 있다.
“황당하긴 해도 사실이라면?”
종말의 아포칼립스!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벌어질 대재앙으로 치부하기엔 이젠 옛말이 되었다. 각성자가 나오고, 탑이 생기고, 성좌가 존재하며, 던전과 마물의 세상이 되었다. 종말이 온다고 해서 딱히 이상하진 않았다.
고뇌할수록 결심은 굳어졌다. 이제는 그저 확인해 보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상념이 길었다.
아버지가 돌아올 시간이다.
모처럼 무언가를 해 보고 싶었다.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진 않는다. 진인사대천명!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 보고, 아버지의 뜻을 따를 것이다.
효자로서.
무진은 서둘러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냈다.
다다다다!
도마 위에서 호박을 비롯한 채소가 기계처럼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썰려 나가는 광경이 예사롭지 않았다. 한두 번 해 봐서는 나오기 힘든 완숙함이었다. 능히 요리의 대가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 이대로 너튜브에 올린다면 100만 조회 수가 나올 각이다.
“내 탓이긴 하지.”
샐러리맨의 신화를 이룬 아버지의 빈약한 영양 상태를 고려하여 요리를 하게 되었다. 그땐 그런 동기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이제는 아버지가 다른 요리를 잘 못 드신다.
내 발등 내가 찍은 격이지만, 드시는 모습만으로도 행복했다. 먹는 즐거움만큼이나 만드는 즐거움도 컸다.
기실 요리가 워낙 훌륭해서 어지간해서는 밖에서 먹지를 않았다. 각종 매체를 통해 알게 된 레시피를 통해 통상적인 맛을 내는 데 성공한 이후, 꾸준히 발전된 방향을 찾다 보니 무진만의 레시피가 탄생했다.
굳이 기록할 필요는 없으나.
[무진류 특제 레시피]
나중을 위해서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 아버지에게도 틈틈이 요리를 가르치려면 필요했다. 이대로만 해도 어지간한 요리사는 흉내 내기도 어려웠다. 그만큼 완벽한 정량을 지향했다.
‘이 세상에 손맛 따윈 없지.’
손에 맛이 있다는 발상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완벽한 정량과 온도만이 맛의 비결이었다. 무진류 특제 레시피를 따르기만 한다면 맛은 보장되었다.
참고로 청결은 기본이다. 깨끗하지 않은 음식은 맛을 논할 가치가 없다. 쓰레기는 아무리 맛있어도 쓰레기였다.
송송송!
보글보글!
식탁에는 소고기찜, 된장찌개가 중심을 이루고 김치와 각종 나물이 앉은 자리와 수저의 위치에 따라서 구도를 이루었다. 둘 사이에 수저가 엇갈리거나 부딪히지 않는 거리를 유지했다.
유난스러울 수도 있으나, 무진에게는 별달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집의 구조와 물건의 위치를 모조리 파악하고 있었다. 어떤 물건도 자신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기에 아버지는 언제나 말끔하셨다.
다른 건 몰라도, 아버지가 홀아비 소리 듣는 건 못 참는다. 무진은 아버지의 말끔하고, 젠틀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독거 아줌마도 나쁘진 않은데.’
지수에겐 과장한 면이 있지만, 크게 모자라지 않았다. 그만하면 외모도 괜찮았다. 다만, 그 나이 먹도록 혼자였다는 사실이 걸려서 적극적일 순 없었다.
‘외모가 중요하지.’
아버지가 부족하다면 모를까, 대기업의 잘나가는 부장님이었다. 어머니가 남겨 준 유산도 적지 않았고, 투자도 성공해서 남부럽지 않았다. 나이가 걸리긴 하나, 환골탈태를 통해 30대 초반도 가능했다.
그래도 사회 통념상 도둑놈이 되려나?
드륵, 띠리리릭!
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돌아왔다.
옷, 양말, 가방을 들어 드리지는 않았다. 아버지도 어지간한 일들은 손수 하셨다. 철이 일찍 든 아들이 대견하면서도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무진도 요리를 제외한 가사 전반을 아버지와 나누었다.
“씻고 오세요.”
“오냐.”
아버지는 헌터에 관한 일만 제외하면 무진을 간섭하진 않는 편이다. 단, 강요하지 않아도 무진은 항상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방에 틀어박혀 매일 게임만 했다면 등짝 스매싱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