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남사친이 되었다
겨울 초입에도 바람은 선선하고 햇볕은 따뜻하다. 기상이변으로 느닷없이 찾아온 한파로 웅크렸던 며칠이 거짓말처럼 녹아내렸다.
청명한 하늘 아래 한적한 공원.
어제저녁 문자를 받은 무진은 제법 신경을 썼다. 스포츠머리는 힘을 줬고, 눈썹도 정리하고, 최근에 산 재킷으로 과하지 않은 패션을 완성했다.
한 듯, 안 한 듯.
평소에 하지 않는 어색함보다는 단정함이 나았다. 괜히 안 하던 짓을 하면 추잡해 보일 수 있단 너튜버의 말을 신뢰했다.
‘이만하면 괜찮겠지.’
무진은 16세치고는 185cm의 키에 78kg의 균형 잡힌 탄탄한 신체였다. 과하지 않은 코디에도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다고 자신했다.
‘여름이었으면 더 좋았으려나?’
겨울에 반팔 티를 입고 나올 순 없으니.
이목을 신경 쓰진 않았어도, 여름에는 관심도가 높았었다. 버스에서 손잡이를 잡고 있으면 힐끔힐끔 보는 여자들이 많았었다.
대학생 누나들이 은근슬쩍 스킨십을 유도할 때마다 중학생이라고 정중히 답했었다. 나이는 상관없다고 했을 땐 조금 당황스러웠었다.
‘순영이도 그렇고.’
어리다고 보는 눈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착각이다. 애나 어른이나 외모는 중요했다. 처음 본 아이가 얼굴 보고 운다면 인생 살기 험난할 것이다.
약속한 시각.
스마트워치의 심박 수를 확인하니 50으로 평온했다. 15분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는 시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온다, 음?
익숙한 외모와 낯선 감각이었다. 무진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지수를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이상한데?’
이틀 전에 봤을 때와 같은 모습임에도 다른 사람처럼 생소하다. 사람의 기도가 이토록 한순간에 바뀔 수도 있나? 의문이 들었다.
‘각오를 다졌구나.’
오늘을 기점으로 관계를 재정립하게 될 테니 이해가 되기도 했다. 사춘기 소녀에겐 크나큰 변곡점이었다.
다만, 심경의 변화라고 하기에는 심기체(心氣體)가 이틀 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녀의 성취를 대강 짐작하기에 아리송하다.
‘갑자기 옆집 아줌마가 떠오르는 건 기분 탓이겠지?’
지수는 평소 완벽해 보이려고 노력하나, 다듬어지지 않은 어설픈 부분이 꽤 있었다. 오늘의 그녀는 완숙하고, 성숙하다 못해 고인물처럼 느껴졌다.
한편으로 지수의 각성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나도 애군.’
지수가 다가오자 심박 수가 무려 53이 되었다. 정기신의 변화 이면에 비장한 각오가 전해졌다.
마치 세상을 구하겠다는 결연함이랄까?
‘내가 그렇게 모진 사람이 아니에요.’
순진한(?) 소녀의 순정을 외면할 만큼 무진은 매몰차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무진은 인생의 전반적인 계획을 세웠고, 지수라면 풍족한 삶이 보장되었다.
덤벙대고 급발작 심했던 전과 달리 오늘의 지수는 뜸을 들였다.
하긴, 어렵겠지.
이해는 간다.
순정을 여태 숨기고 있었구나.
후우우!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감정을 추스른 지수는 마지못해 포문을 열었다. 굳은 결심과 타오르는 기세가 전해졌다.
“아카데미에 같이 가자!”
“……?”
“내 동료가 되어 줘!”
“……?”
이러면 나가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