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66. 진홍(眞紅)의 카트리나
[ 66. 진홍(眞紅)의 카트리나 ]
사박 사박.
마벨의 사무실이 있는 중앙시청과 조금 멀리 떨어진 숲속, 그를 따라 간 곳엔 지역 지주의 별장으로 보이는 고급저택 하나가 저 멀리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면서 더욱 추워진 날씨에 마벨이나 나나 코와 볼이 빨개져선 하얀 입김만이 피어 올랐다.
쿵 쿵.
‘응..? 경계병이 왜 없지?’
잠금도 없이 열려져 있는 정문을 지난 나와 마벨은 저택 문에 도착했고, 그의 숙소임에도 경계병 하나 없다는 것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외진 곳인데 경계병이 없네?”
의아하단 듯 주변을 살피며 내가 묻자 마벨은 몸을 돌려 놀리는 듯한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연 올 자가 있을까?”
“뭐..?”
끼익.
그러던 그 때였다. 노크소리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은색 머리카락의 미소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마중나왔다.
‘..!’
“어서와, 마벨.”
“오늘따라 드문 일이 많이 일어나는군, 엘로이즈 무슨 바람으로 마중 나온거지?”
“너도 어서와, 밖에 춥지?”
마벨의 말을 간단히 무시한 그녀는 나를 돌아보더니 보라색 눈동자를 깜박이며 내게 들어오란 듯 손짓했다.
‘저 애는..’
세르딘 평야에서 만났던 마벨의 씰 중 하나였다. 꽤나 단단한 결계마법 탓에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이렇게 재회할 줄은 몰랐다.
스윽.
“들어와, 안에는 따듯해.”
마벨은 아무래도 상관없단 듯 날 바라보던 그 아이는 덥썩 내 손을 잡더니 그대로 안으로 이끌며 날 데려가기 시작했다.
“이봐 엘로이즈, 네 마스터는 나라고.”
“마벨은 어른이야. 어리광은 다른데 가서 부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꽤나 단호히 그의 말을 무시한 그녀는 귀엽게 묶어 올린 은발머리를 도도하면서도 기품있는걸음걸이와 함께 좌우로 흔들거리며 날 응접실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기..”
“뭐지?”
내 말에 그녀는 걸음을 멈춰서선 날 돌아보곤 어서 말하란 듯 쳐다보았다.
“손 좀..”
“싫어, 이건 내가 좋아서 하는거야.”
‘뭐..?’
꽤나 직설적인 그녀의 말투에 내가 말문을 잃고 쳐다보자, 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끝이냐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몸을 돌려 내 손을 아까보다 더 꽈악 잡고는 걸어가는 것이었다.
끼익 쿵.
“응..?”
예쁘장한 얼굴과 달리 행동도 꽤나 거침이 없는지 응접실 문을 무표정한 얼굴로 벌컥 열어젖힌 그녀는 날 데리고 벽난로 근처에서 가장 따뜻하고 어느 곳보다 푹신한 의자로 데려갔다.
“저 계집은 뭐야?”
‘..!’
잊을 수 없는 목소리, 벽에 기대 단검을 위로 던졌다 받으며 무료함을 이기고 있던 마르쇼스가 심기 불편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차, 마실래?”
“차?”
“얼 그레이? 스트로베리? 아님 루이보스?”
엘로이즈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엔 전혀 공감력이라곤 없는 씰인지 마르쇼스의 물음마저 간단히 씹고는 내게 고급홍차 주전자를 들고는 물었다.
“야! 내가 묻잖아!! 저 계집 뭐냐고?!!”
시이잉 -
“미안.”
“뭐?”
피잉 -
나를 바라보며 사과를 한 그녀는 손 위로 결계를 만들더니 마르쇼스가 던진 단검을 간단히 막아 튕기고는 손가락을 돌리더니 순간 움켜쥐었다.
콰직!
“커억!!”
결계를 역전시킨 듯 마르쇼스 주위로 생성된 그녀의 결계는 날뛰는 마르쇼스를 짓눌러 버리듯 순식간에 조여져선 그를 가두었다.
“동생이 못난 모습을 보였어.”
“동생..?”
“야!! 내가 왜 네 동생이야?!! 이거 안 풀어?! 죽고 싶어?!! 앙?!!”
“차가 처음이라면 스트로베리가 좋을거야.”
버둥거리는 마르쇼스를 잡은 상태로 그녀는 내 앞에 붉은색의 과일향이 나는 홍차를 따라주었고, 나는 왠지 불쌍해 보이는 마르쇼스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야!! 그 눈 뭐야?! 내가 불쌍해 보인다 뭐야?!! 너도 죽고 싶어?!!!”
“마셔.”
“고.. 고마워.”
언제부터 친해진걸까, 어색한 나와 달리 찻잔을 들어 홍차를 마시는 내 옆으로 엘로이즈는 무표정한 얼굴로 엉덩이를 스윽 밀더니 내 옆 가까이와 앉아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가까워..’
“뭐지? 혹시 차가 더 필요해?”
“아.. 아니.”
사실 뻔뻔한 게 아닐까, 그녀는 새침하고 도도한 얼굴로 당황스럽단 듯 쳐다보는 날 말끔히 무시하고는 묻고 싶은 말만 물었다.
“흠.. 드문 일이군, 엘로이즈가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씰이 있다니.”
그 때였다. 검은색 머리칼에 재밌단 듯 눈을 번뜩이는황금빛 눈동자의 클라비우츠가 응접실로 들어오며 나와 엘로이즈를 바라보았다.
호륵.
‘대단하다..’
정말 자신이 원하는 상대하고만 이야기하는지 단장인 클라비우츠의 말에도 엘로이즈는 말을 무시하며 차를 도도히 마실 뿐이었다.
“이름이 뭐지?”
그는 내 마나하트에서 흘러나오는 마벨의 피를 느꼈는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카트리나.”
“카트리나? 흠.. 좋은 이름이네. 난 이곳 11기사단의 단장이자 이 집의 큰 오빠인 클라비우츠 다. 우리의 형제가 된 걸 환영해 카트리나.”
‘형제?’
스윽.
“카트리나는 내 여동생이야. 단장은 저리 가.”
클라비우츠를 경계라도 하는 걸까, 엘로이즈는 몸으로 내 앞을 가로막으며 그에게 말했다.
“하하, 알았어 엘로이즈. 안 뺏어가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고.”
“가.”
“엘로이즈, 내가 집에선 뭐라 부르라고 했지?”
“오빠새끼.”
“하하..”
마음이 넓은 걸까, 엘로이즈가 특이한 걸까.클라비우츠는 그걸로 됐단 듯 웃음을 흘리며 엘로이즈와 나를 비켜 응접실 한 켠 소파로 가 책을 집어 읽기 시작했다.
“다.. 단장! 아니, 형!! 가더라도 나 좀 꺼내주고 가!!”
다만 마르쇼스만 무슨일인지 모른척하고 간다는게 이상했지만 말이었다.
“저기.”
“응?”
“쟤는 풀어주면 안 돼?”
내 말에 결계에 끼여 낑낑 거리는 마르쇼스를 힐끔 쳐다보던 엘로이즈는 생각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언니라고 하면.”
“뭐..?”
“오빠새끼가 한 말 들었잖아. 집에선 호칭이 아니라 가족이야.”
‘하하..’
지금 나보고 언니라 하라고? 죽었다 깨도 언니란 말은 내 입에서 나올 일은 없었다. 그리고 저 개차반 마르쇼스를 위해 희생할 의리 따윈 더더욱 없었으니까.
“그냥 차나 마실래.”
호륵.
“야!!! 언니라고 하면 풀어 준다잖아!!”
“흐음, 차 맛 좋네.”
뒤에서 협박인지 애걸인지 모를 마르쇼스의 말을음악으로 들으며 난엘로이즈의 차를 음미하기 시작했고, 가끔 커피 말고도 홍차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을 하는 나였다.
“...”
호륵.
“...”
호륵.
‘음.. 언제까지 쳐다볼 거지?’
정말 내 입에서 언니란 말을 듣고 싶은걸까? 엘로이즈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하나 깜빡하지 않은채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곤 작은 입을 벙긋거리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언니, 언.니.’
“음..”
마벨은 뭐하러 갔나? 왜이리 안 오지? 나는 다 마신 찻잔을 계속해 ‘언니’라 뻥긋거리는 엘로이즈 앞에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녀석도 양반은 못 되는지, 다른 씰들과 함께 응접실로 들어오며 엘로이즈의 결계에 갇혀 낑낑거리는 마르쇼스를 발견하고는 실소와 함께 내 옆에서 끈덕지게 입을 벙긋거리는 그녀에게 말했다.
“형제를 괴롭히면 안 된다고 했잖아. 풀어줘, 엘로이즈.”
“칫..”
그러자 무척이나 아쉽게 됐단 듯 작게 혀를 찬 그녀는 다시금 손짓을 하더니 결계에 끼여 버둥거리던 그를 풀어주었다.
쿠웅.
“크윽.. 엘로이즈! 감히 날 웃음거리로 만들어?!”
파앗 -
“그만.”
엘로이즈로부터 자유로워진 마르쇼스가 몸을 튕겨 그녀에게 달려가자, 마벨이 조용히 그를 제지했다.
“마스터!”
“마르쇼스, 여동생한테 그러면 안 되지.”
“하지만 저 녀석이..”
‘뭐야? 정말 마르쇼스 보다 동생이었어?’
내가 놀라 엘로이즈를 쳐다보자, 그녀는 모른단듯 무표정한 얼굴로 내 시선을 피했다.
“게다가 이젠 여동생이 하나 더 늘었는데, 언제까지 어른스럽지못한 모습을 보일거지?”
“크윽.. 쳇!”
‘뭐? 여동생이 하나 더?’
불같던 마르쇼스도 마벨의 말에 나를 한 번 스윽 쳐다보더니, 별 수 없단 듯 화를 삭이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서.. 설마 내가저 새끼 동생이라고? 아씨, 이건 아니지!!’
황당하단 듯 마벨에게 따지려던 그 때였다. 녀석은 응접실에 없었던 다른 씰들에게 나를 소개시켜 주며 모두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우리 가족이 된 카트리나다. 모두 그녀를 아껴주도록.”
“너가 카트리나 구나? 아웅! 너무 귀엽잖아!!”
풍만한 가슴과 함께 귀여운 미녀하나가 다홍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마벨 뒤에서 나오더니 덥썩 나를 꽈악 껴안으며 ‘어떡해, 어떡해’하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수.. 숨이.. 숨..”
그녀의 품속에서 버둥거릴 때 즈음, 은청색 머리칼을 단정히 올려 묶은 안경미녀가 마벨 옆에서 못마땅하단 듯 다홍색 미녀를 향해 쏘아붙였다.
“아트리아! 지금 마스터 앞에서 무슨 추태죠?”
“히잉.. 그래도..”
“빨리, 내.려.놓.으.세.요.”
“네..”
아트리아라 불린 미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풀어주었고, 은청색 머리칼의 미녀는 딱딱한 얼굴과 달리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자신을 소개했다.
“미안해요, 카트리나. 가끔 아트리아가 예쁘고 귀여운 것에 못 참을때가 많아요. 난 11기사단의 부단장이자 마벨님의 보좌를 맡고 있는 미르파크에요. 잘부탁해요.”
“저.. 저도 잘 부탁드려요.”
세르딘에서 보지 못했던 씰이 더 있다니, 11기사단이면 정말 11명이라 11기사단인 걸까? 그렇게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그 때, 내 옆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너, 생각이 참 많은 아이구나?”
“아씨! 깜짝이야?!”
“하하하! 미안, 생각하는게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말이지.”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한 미남자가 깜짝 놀라는 내 모습이 재밌단 듯 뒤로 물러서며 웃었지만, 난 기척도 없이 내 옆에 다가온 그의 기술에 더 놀랄 뿐이었다.
“난 슈하일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카트리나.”
그의 소개까지 끝나자, 마벨은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내 모습이 더 재밌단 듯 피식 웃으며 내게 말했다.
“호프슈어와 그레조우도 소개시켜 주고 싶다만, 녀석들은 내 명령 때문에 먼저 떠나서 말이지.”
“먼 곳..?”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마벨은 고개를 돌려 응접실에 모두 모인 자신의 씰들을 향해 말했다.
“자, 제군들. 모두 예상은 했겠지만 전쟁이다! 황제폐하의 명으로 내일 새벽 우리 군은 움직인다.”
“출정이라면..”
설마하는 클라비우츠의 물음에 마벨은 예의 자신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에게 말했다.
“그래, 우린 페르티갈 로슈비치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