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65. 진홍(眞紅)의 카트리나
[ 65. 진홍(眞紅)의 카트리나 ]
“이곳으로 들어오는 도로를 보수하게, 겨울에는 괜찮지만, 봄에 비가 내리면 진창이 되겠어.”
“알겠습니다.”
“본국에서 보급된 병사들은?”
“2개 여단으로 카트브라 남작과 슈트라우스 남작의 예하 예비대로 보충했습니다.”
“예의 씰 보급은?”
“슈테틴에서 최대한 보급하겠단 연락이 있었지만, 최근 연합왕국의 방해로 마광석 수급이 불안정하단 소식입니다.”
꽤나 유능한 놈인지, 모쉘을 시찰하고 돌아온 그의 사무실엔 그의 재가(裁可)를 기다리는 장교들이 한 가득이었다. 하지만 예상이라도 한 듯 그는 능숙하게 장교들이 들이미는 안건을 물을 흐르듯 처리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마지막 장교의 보고까지 처리한 그는 다소 피곤하단 듯 의자에 앉아 미간을 주무르며 내게 말했다.
“커피.”
“...”
“커피 내오라고.”
“저요?”
“그럼, 여기 자네 말고 또 누가 있나? 내가 직접 타올까?”
순간 ‘네’라고 대답할뻔 나는 어이없단 듯 쳐다보는 녀석의 시선에 은근슬쩍 피하며 몸을 돌려 궁시렁거리기 시작했다.
“지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커피는 뭐, 지가 타 먹으면 뒈져?”
그러자 귀는 밝은지 의자에 목을 젖혀 누워있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뒈지니까, 어서 타오게 카트리나 소위.”
생긴것과 다르게 아주 뻔뻔한 놈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근처 탕비실로 보이는 작은 방으로 가선 녀석이 말한 커피가 없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와.. 이게 뭔 커피래..?완전 카페를 차리셨네.”
나만큼이나 꽤나 커피 애호가인지 다양한 커피 원두들이 병에 담겨져 있었고, 그중 가장 높은 선반위엔 올만산 커피가 있었는데 얼마나 아끼는 건지 ‘만지지도 말고, 쳐다보지도 말것’이란 문구가 붙어 있었다.
근데 말이지, 원래 사람이란게 ‘들어가지 마세요’하면 더 들어가 보고 싶고, ‘건들면 뒤져요’하면 한 번 건들여 보고 싶은게 사람이다.
나는 사악한 미소와 함께 ‘췌에엔스’하며 녀석이 애지중지 여기는 올만산 커피봉투에 손을 뻗자 이 귀신같은 놈 벽에도 눈이 달렸는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카트리나 소위, 멀쩡한 커피가 앞에 있는데 왜 발꿈치를 들지? 분명 내가 쳐다보지도 말라 붙였을텐데?"
“칫..”
결국 녀석이 원하는대로 커피를 내려온 나는 뾰루퉁한 표정으로 녀석의 앞에 툭 던지듯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쿼어삐요. 그 드시고 싶다던 쿼어삐 대령했습니다. 이제 전 가도 되죠?”
“뭐?”
“보니까 당번병이라 해도 할꺼 없더만요, 아까 경례 안한 것 때문에 그런거라면 그냥 용서해 주시죠?”
녀석은 내 말에 어이없단 헛웃음을 흘리더니 팔짱을 끼며 더욱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가시겠다?”
“뭐.. 보내주신다면..”
“자네 말일세, 지금 행동이 아주 재밌다고 생각되지 않나?”
“예?”
마벨의 물음에 난‘뭐가 이상한가?’란 표정으로 녀석을 쳐다보았고, 녀석은 노골적으로 되묻듯 바라보는 내 표정에 어이를 넘어 재밌단 듯 혼자 피식피식 거리는가 싶더니 ‘아주 웃긴놈일세’하며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었다.
‘뭐야.. 너무 일을 많이 해서 맛이 갔나? 왜이래?’
녀석의 사무실까지 와서 멍 때린지도 벌써 세시간째였다. 아무리 가만히 있는 것이 좋은 사람도 이정도로 아무것도 안한다면 아주 지겨워 방을 뛰쳐나갔을 거다.
“그러고보니, 블뤼힐 휘하 제국 돌격대라 했지?”
“예..? 아, 예.”
갑작스런 녀석의 물음에 놀라 움찔거린 난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대충 얼버무렸다.
“내가 말이지, 아까 부관을 통해 알아봤는데 말이야..”
“꿀꺽..”
“블뤼힐 휘하엔 3연대란것이 없다더군.”
‘시발..’
이래서 사람은 너무 유능하면 못 쓴다고 했다. 언제 그걸 또 물어봤데? 아주 인간미라곤 쥐똥 만큼도 없어요. 나는 빈틈하나 없이 일을 처리하는 녀석의 사고방식에 두손두발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후릅.. 음.. 하지만 커피 내리는 솜씨는 제법이군.”
사람 똥줄 태우는 것을 즐기는건지 아님 모르는건지, 아주 얄밉게 커피를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던 녀석은 찻잔을 조용히 책상에 내려놓고는 말했다.
“그러니까 말해보게, 어째서 소속이 불분명한 씰이, 그것도 내 점령지에서, 돌격대 제복을 입고는, 모두가 쳐다보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제국의 원수(元帥)를 지나가는 개보다 관심이 없어 하는지,커피를 아주 잘.타.는 카트리나 소위가 어서 말해보란 얘기네.”
‘시발.. 사람 맥이는 것도 아주 공들여서 돌리네. 으.. 재수없는 새끼.’
하지만 녀석의 물음을 반박할 수 없던 나는 안 그래도 잘 안돌아가는 머리를 풀 파워로 돌리며 도망갈 구멍을 생각하려 했다.
“왜 방법이 잘 안 찾아지나?”
골똘히 생각에 잠기던 것도 잠시, 아주 재밌단 듯 이제는 대놓고 턱을 괴며 내 표정을 지켜보던 마벨이 아주 흥미진진하단 듯 물었다.
“기.. 기억 상실입니다!”
“기억상실?”
“예! 그거요! 저번 전투에 머리를 쎄게 다쳤는지 도통.. 생각이 안 나지 뭡니까? 살다보니 참 별일이 다 있죠?”
“뭐? 하하하하하!!!”
마벨은 진심이냔 듯 내 말에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고, 난 ‘뭐야, 내가 뭐 잘못 말했어?’란 표정으로 녀석을 불안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웃던 녀석은 눈가의 눈물을 훔치고는 나를 바라보더니 또다시 웃긴단 듯 웃음을 터트리며 책상을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기억상실이라고?”
“예..”
“푸후훗!! 하하하하!!! 내 살다 살다 씰이 기억상실에 걸렸단 소릴 듣다니.. 하하하하!!”
‘아씨.. 거 나도 좀 같이 알고 우습시다.’
놀리듯 웃는 녀석의 모습에 빈정이 상한 내가 입을 삐죽거리던 그 때, 겨우 진정됐는지 마벨은 나를 보며 말했다.
“이보게 카트리나 소위, 씰은 인간처럼 머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자네 가슴팍에 있는 마나하트가 저장하는 거야.”
“아..”
“그리고 씰이 유일하게 기억을 잃는 순간은 단 하나, 마나하트가 완벽하게 정지되었을 때지.”
그렇게 말한 녀석은 당황하는 날 유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빛바랜 제복이며 가슴팍을 관통한 듯 보이는 총탄과 핏자국. 그리고..”
스윽.
책상위에 있는 지팡이를 쥔 녀석이 마나하트를 가렸던 내 옷깃을 옆으로 제쳤다.
“망가진 마나하트가 재가동한 씰이라.. 정말이지 최근엔 놀랄만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군. 게다가 성격도 그 아이와 비슷하고.”
움찔.
‘시발 들켰나?’하는 표정으로 얼음이 되어 녀석을 바라보던 그 때, 가슴골까지 들어난 내 옷깃을 다시 가려준 녀석은 지팡이를 책상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스스로 이름을 정하고, 스스로 생각해 움직이는 씰이라.. 자네의 지금 행동이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정작 당사자인 자네는 모르는 듯 하군.”
그렇게 말한 녀석은 의자에 일어나선 나를 내려다보며 시동어를 외쳤다.
“너의 창작자로써 명한다. 마나결속을 해제해라.”
“뭐..?”
위잉 – 철컥 -
금이 간 내 마나하트는 마력이 깃든녀석의 시동어에 반응을 하며 단단히 결속시켰던 마나하트의 안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스윽.
‘..!’
단도를 들어 손을 벤 마벨은 붉게 맺힌 자신의 피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네게 기회를 주지, 과연 너가 이 무게를 견딜 수 있는지 궁금해졌거든.”
‘뭐.. 뭐야? 설마 나와 계약하려는 거야?’
놀란 내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며 점점 다가오는 녀석의 피가 맺힌 손가락을 응시했다.
“이 피를 흡수하면 넌 독특한 그 성격만큼이나 너만의 개성을 갖겠지.”
피이잉 -
‘!!’
슈우우우우 -
“큭..”
그 때와 같다. 처음 페르티안의 피를 흡수했을 때처럼 방대한 피가 상처가 난 녀석의 손을 타고 내 마나하트로 스며들어 온다. 심장이 없는 양철 나무꾼마냥 텅 비어있던 내 가슴은 녀석의 피와 함께 뜨겁게 요동치며 메워지더니, 무력하고 무거웠던 육체가 점점 깃털처럼 가벼워 지는 것이 느껴졌다.
츄즈즈즈즈 -
그와 함께 내 주위로 진홍빛 기운이 빛나 오르며 주변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붉은 색이야.”
‘기.. 기분이 이상해..’
다시 뛰는 심장만큼 난 혼란스러웠다. 내 중요한 곳에 페르티안 말고도 녀석의 존재가 느껴지는게 감지됐기 때문이었다.
츠즈즈즈 -
콰아아앙!!
일순 폭발한 진홍빛 기운과 함께 그의 사무실은 엉망진창으로 날아가더니, 큰 구멍을 만들었다. 그리고 폭발에 날려 건물 밖으로 날아갈 뻔한 녀석을 붙잡은 난 녀석의 피를 머금어 푸르게 빛나며 다시 보호하듯 결속되어지는 마나하트와 함께 진홍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말했다.
“칫.. 너 같은 건 그냥 떨어져서 콱 뒈져야 하는데..”
“어쩌겠나? 밉든 싫든 난 자네 마스터일세."
얄미운 자식. 샤벨리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의 명령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내 육체를 구성하는 마나하트를 만든 창조자의 명령이기에 머리로는 거부해도 본능적으론 거부할 수 없었다.
아무리 싫은 부모라도 부모를 바꿀 순 없지 않은가? 그렇듯 내게 있어 녀석은 얄궂은 존재였다.
“카트리나, 네가 정한대로 널 카트리나로 부르지.”
“...”
“카트리나 폰 브라운슈파이크 볼펜뷔텔 사무엘. 그게 오늘부터 네 이름이다.”
손에 잡힌 채 날 바라보는 녀석의 백금발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휘날렸고, 그 사이 날 바라보는 녀석의 눈동자는 소중한 보물을 얻었단 듯 이전과 달리 들떠 있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녀석의 씰이 되어버린 난 프러겔로 돌아갈 방법을 다시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결속이 되어 계약 된 만큼 지금 난 녀석의 씰이었다.
‘잠시 뿐이야, 반드시 이곳을 벗어나 돌아가겠어.’
조금 멀어진 길이지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숨겨진 기억의 파편을 본 이상, 난 그를 절대 놓치 않을 거니까 말이다. 내 자리는 페르티안의 곁만이 유일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