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64. 진홍(眞紅)의 카트리나
[ 64. 진홍(眞紅)의 카트리나 ]
페르티안이 토르디에르 반란을 진압하던 그 때, 모쉘에 있던 마벨에게도 한가지 소식이 도달했다. 프러겔과의 휴전으로 군을 재정비해 날이 풀리는 봄에 다시금 전쟁을 재개하려는 그였건만, 예상치 못한 소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척.
“본국에서의 명령입니다.”
“명령?”
프러겔 침공군 원수인 자신에게 명령이란 프러겔의 수도 크리스티네를 점령해 그들의 왕성 에르말디아에서 과거의 치욕을 되갚는 항복조약서를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에게 새로운 명령이라니, 마벨로써는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전령장교가 건넨 황실 명령서를 살펴보던 마벨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이동하라고?”
“예, 폐하께서 하루빨리 동쪽의 동란(動亂)을 잠재우라고 하십니다.”
제국의 동쪽에 맞닿은 페르티갈 로슈비치 왕국은 북쪽의 페르티갈 공국과 남쪽의 로슈비치 공국이 연합된 하나의 왕국으로 지금은 로팅겔 2세가 다스리는 지역이었다.
특이한 것은 두 공국이 하나로 합쳐진 탓에 페르티갈 공국 귀족 절반과 로슈비치 공국 귀족 절반이 모여투표로 자신들의 국왕을 뽑았는데 연이은 기근과 흉작으로 흉흉해진 민심이 가혹한 세금에 맞물려 터져 버린 것이었다.
문제는 그 반란이 그저 농민반란이 아닌 무역과 상업으로 돈을 번 중간계급인 ‘베아투스(Beatus)’들이 일으킨 혁명이란 점이었다. 하루만에 수도 플루스를 점령해 국왕 로팅겔 2세를 참수한 그들은 에우로페 대륙전체에 페르티갈 로슈비치 제1공화국을 선포한 것이었다.
왕이 없는 정부의 탄생은 모든 에우로페 왕국들의 중대한 문제로 떠올랐고, 그 중 대륙의 패자를 자처하는 하켄제국으로써는 자신들의 제정(帝政)에 막대한 타격을 줄 수 있는 페르티갈 로슈비치의 공화국 체계는 반드시 말살해야 할 중요한 과제였다.
그렇기에 아무리 프러겔과의 전쟁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제국 황제인 클로비스 4세는 행여 자신의 제국까지 번질지 모를공화국의 불씨를 반드시 꺼버려야 했다.
“페르티갈 로슈비치에는 제국 동부방면 원수인 미할리츠 후작이 주둔하고 있지 않은가?뭐하러 프러겔 방면군까지 빼란 말인가?!”
“그게..”
마벨의 호통에 전령장교는 말하기를 잠시 꺼려하는가 싶더니 침통한 표정으로 나직이 말했다.
“플루스 근처에서 집결한 적의 공화국 군에 패퇴했습니다..”
“뭐라고?!!”
아무리 공화국 군이라 해도결국 오합지졸로 급조된민병대일 뿐이었다. 그런 민병대 조직에 제국의 정규군이 패퇴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징집되는 적의 징병속도가.. 예상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뭐라?”
“페르티갈 로슈비치 각지에서 몰려든 이들로 인해 벌써 혁명군이 15만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
아무리 강대한 하켄제국이라 할지라도 징집되는 병사가 열이라면 훈련하는 동안 탈영하는 병사가 적어도 넷은 됐다. 그리고 전쟁을 하다보면 거기서 둘은 더 탈영을 한다. 그 정도로 군대를 모아 훈련시키는 것엔 큰 시간과 돈이 드는 것이관례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공화국이 자진해서 모여든 이들로 15만의 군대를 만들었단 것은 어떻게 보면 놀라운 사건이었다.
“알겠다, 당장 페르티갈 로슈비치로 진로를 바꾸지.”
척.
“저는 이 소식을 폐하께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클로비스 4세 만세!”
“클로비스 4세 만세.”
전령장교가 나간 것을 확인한 마벨은 골치가 아프게 됐단 듯 미간을 누르며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고는 한 숨을 내쉬었다. 한 숨을 내쉬는 것조차 하나의 예술품인 듯 아름다운 그였지만, 눈빛만큼은 너무나도 귀찮고 싫단 듯 그답지 않은 투정어린 목소리로 식어버린 커피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예정에 없던 겨울여행을 하게 생겼군.”
***
“아우씨발!!!”
왜 또 여자애란 말인가?! 창고 근처에 깨져서 버린 거울을 바라본 나는 다시 여자애의 몸에 들어왔다는 것에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지르던 난, 순간 생각났단 듯 가슴팍에서 푸르게 빛나고 있는 마나하트를 향해 욕지거리를 사정없이 내뱉기 시작했다.
“나와! 이 망할 영감탱이야!! 아주 쳐 죽여도 모자라요!! 안 나와?! 나오라고!!!”
그 많은 씰 중에 남자도 있건만 50% 확률에서도 그것도 또 여자로 들어왔는지, 정말이지 내 가챠실력은 전생이든 후생이든 똥인 건 매한가지였다.
그렇게 혼자서 씩씩거리던 나는 화를 삭이지 못한 얼굴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는 다시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좋든 싫든한동안은 신세를 져야할 몸이었다.
“무섭게 눈은 왜 빨갛데..?”
샤벨리아보단 키는 작았지만, 긴 검은 머리칼에 은은하게 빛나는 진홍빛 눈동자는 뭔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게다가 하얀피부에 아름다운 이목구비는 샤벨리아와 다르게 아슬아슬한 매력이 느껴졌고, 작은 키에도 밸런스가좋은지 오히려 미드는 샤벨리아때 보다 큰거 같았다.
“옷을 보니, 제국어딘가 본데.. 프러겔로 돌아가려면 꽤나 시간 걸리겠네.”
하급장교 엘리트 씰인지 검은 제복에 은실로 치장된 장교복은 빛이 바래 있었고, 가슴엔 무언가에 찔린 듯 붉은 피와 함께 구멍이 나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빛나오른 마나하트는 전투 중 파손된 건지 금이 가 있었지만, 활동하는덴 문제가 없는지 모습만 조금흉할 뿐 문제는 없었다.
“헐.. 이게 다 뭐야? 설마 씰이야?”
거대한 적재창고에 쌓인 것들은 씰들로 모두 하나같이 전투에 파손된 듯 기능이 정지된 씰이었다.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수에 나는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간 돈은 더럽게 많아요.”
프러겔에서도 망가진 씰들을 본 적이 있었지만, 이 정도의 양은 아니었다. 얼마나 찍어서 생산하는지 고장난 게 이정도면 실제 사용하고 있는 씰은 얼마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묘지와 같은 창고에서 몸을 돌린 난조심스레 문을 열고는머리만 빼꼼 내밀어 밖을 살펴보았다.
“으.. 추워..”
하얗게 내리는 눈과 함께 아름답게 눈으로 덮인 도시의 전경이 숲 너머로 보였다. 바로 아까전까지만 해도 덥고 건조했던 토르디에르에 있었던 것이 꿈이라 느껴질 만큼 지금의 한파에 눈은 정말이지 생경한 것이었다.
“들키진 않겠지?”
창고 주변으로 제국의 전열보병들이 보이긴 했지만, 나도 같은 군복을 입은데다 얼굴 또한 이전과 다르니 내가 샤벨리아라 들킬 일은 없었다.
뽀득.
조심스레 창고를 나와 걸어가던 그 때, 나무아래에서 연초를 피던 전열보병 두 명이 내 모습에 화들짝 놀라더니 들고 있던 연초를 눈밭에 던지고는 경례를 했다.
“겨.. 경계중 이상무!”
‘이미 이상있어, 새꺄..’
아무래도 경계근무 중에 몰래 연초를 피우던 것이었는지 둘은 식은땀과 함께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왜 저 두 녀석이 내 모습에 쩔쩔매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 때, 내 가슴팍에 있던 뱃지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아..’
루비가 박힌 은빛 십자가, 그것은 제국 돌격대의 상징이었다. 이전 제국군과의 전투에서도 몇 번 봤던 이것은 최전선에서 싸우던 녀석들의 씰들이 채용했던 뱃지였다.
게다가 제국군 내에서도 엘리트 연대이자 메이커 부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기에 말단 전열보병들로썬 농땡이치다 내게 걸린 것이 꽤나 피가 말리는 듯 싶었다. 게다가 난 지금 제국 초급장교가 아니던가?
“크흠.. 들키지 말고 펴.”
“네..?”
“아유.. 날씨 좋네.”
그렇게 눈을 껌벅이며 쳐다보는 녀석의 어깨를 두들긴 내가 뒷짐을 지며 못 봤단 듯 녀석들을 지나쳐 가자, 눈치 빠른 동료 하나가 아직 장대인 연초를 눈밭에 주워 쥐고는 ‘아싸 건졌다’하며 좋아했다.
‘에휴 불쌍한 것들.. 끌려온 것도 짜증날텐데, 뭐 연초 한 두 개 쯤이야.’
탄약고 근처도 아니고, 가만히 서있어도 추운 곳에서 연초 하나 피운다 해서 무너질 기강은 없었다. 게다가 총탄이 날리는 전방도 아니고, 새소리와 사람소리가 들려오는 도시근처 아닌가? 나는 그렇게 연초 하나조차 눈치보며 피워야 하는 녀석들을 동정하며 제국군이 점령한 도시로 향했다.
“호오..”
이곳은 꽤나 공업도시인지 도시 안은 금속을 제조하는 연기와 연신 옷감을 짜는 베틀소리로 가득차 울렸고, 군인들이 거리에 많은 것 치고는 불편함이 없는지 사람들의 생동감이나 활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렇게 시골에서 상경한 아가씨마냥 이 가게 저 가게 구경하던 그 때, 거리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어떤 놈을 본 순간 난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
‘시.. 시발.. 저 새끼가 왜 여기 있데?!’
멀리서도 눈에 띠는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하얀피부, 그리고 늘씬한 장신과 함께 단정하게 묶은 백금발 머리카락을 가진 이는 이 대륙에서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단 한명 밖에 없었다.
‘마벨..’
추운지 붉어진 볼과 함께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흰색 여우털로 재단한 고급스런 외투를 제복위에 걸친 녀석은 주위 부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도시 시찰을 하고 있었다.
‘시발 모쉘이었어..?’
고개를 푹 숙인 난 여기가 어딘지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해맑게 구경을 했던 과거의 나를 저주하며, 부관들과 소담을 나누며 걸어가는 녀석의 옆을 지나치려 했다. 어차피 얼굴도 머리카락도 다른데 아무리 천재라 불리는 녀석이라 해도 나를 알아볼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게 자연스레 녀석의옆을 지나치던 그 때였다.
“거기.”
움찔.
부관과 함께 나를 지나쳐 가던 녀석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나를 멈춰 세우는 것이었다. 뒤에서 들리는 녀석의 목소리에 ‘아씨, 좆됐다’하며 인상을 구긴 내가 비굴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뭐죠?”
꿈틀.
‘응? 뭐가 틀렸나?’
내 말에 마벨은 물론이고, 주위의 부관들조차 일제히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뭐.. 뭐야? 왜 그러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왜 저러는지 모르던 그 때, 꽤나 심기불편한 표정을 한 마벨이 내가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상급자에 대한 경례는 예의일 텐데? 어디 소속이지?”
‘아..’
살벌한 녀석의 눈빛에 아차한 난 소속을 묻는 말에 당황하며최대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새.. 생각해라, 샤벨리아! 넌 할 수 있는 아이야!!’
“브.. 브뤼힐 백작 휘하 제국 돌격대 3연대 소속 카트리나 소.. 소위입니다.”
‘예쓰! 잘 했어 샤벨리아!!’
“흠.. 블뤼힐의 돌격대라고?”
뭔가 미심쩍단 듯 눈썹을 꿈틀거리며 나를 바라보던 녀석은 이내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과 함께턱을 만지던 손을 멈추더니 많이 봐줬단 거만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힘써온 백작의 면(面)을 봐서 이번 한번은 넘어간다만, 다음부턴 실수하지 말도록.”
‘재수없는 자식..’
“옙!! 충성!!!”
“...”
나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인건가, 부글거리는 속마음과 달리 지금의 핀치를벗어나기 위해선 간이든 쓸개든 뭐든 빼줘야 했다. 그렇게 군기가 바짝 든 모습으로 경례를 하자, 녀석은 그런 내가 어이없단 듯 한동안 쳐다보는가 싶더니 뭔가 기분 나쁜 묘한 웃음꼬리를 올리며 내게 물었다.
“카트리나라고 했나?”
“넵!”
“훗.. 짧은 시간안에 제법 군기가 바짝 들었군.”
“감쏴합니다!!”
“풋..”
‘짜식, 재수없게 쪼개기는.. 응?’
그 때였다. 순간 녀석의 눈동자에서 장난기가 번뜩이던 순간, 저주스런 녀석의 입에서 나온 일련의 말이 나를 경직시켰다.
“아, 그러고보니 오늘 당번병이 필요했었는데.. 잘됐군.”
“예..?”
“자네가 오게. 사령관이란 사람이 당번병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아니..”
“기뻐하는 맘 이해하네. 아니 오히려 영광이겠지.”
‘죽여버릴까..?’
황망하게 쳐다보는 내 어깨를 얄밉게 두드린 녀석은 사람이 아닌듯한 치명적인 미소를 지어 응시하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부관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곤 뒤를 힐끔거리며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하는 내게 여지따윈 주지 않겠단 듯 가증스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도망가도 소용없네, 카트리나 소위. 강제로 소환당해 질질 끌려오기 전에 따라오게. 이미 자네 마나코드는 내게 스캔당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