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63. 기억의 파편
[ 63. 기억의파편 ]
결사항전을 불사하며 농성할 것 같던 로베르치도 포멜리 남작의 죽음소식에 거짓말같이 성문을 열며 프러겔군에게 항복했다. 몰론 페트시아가 목이잘린 남작의 머리를 중앙청 위에 매달았단 건 비밀이었다.
그렇게 북쪽에 있던 발슈테인과 남쪽에서 진입한 페르티안은 무사히 로베르치에 입성해 합류할 수 있었고, 그토록 원하던 로베르치를 손에 넣음으로써 토르디에르 반군은 사실상 자신들의 본거지이자 그들의 수장 카로이 백작의 영지, 류스텐빌에 고립되었단 것을 의미했다.
왕도를 떠나 토르디에르에서 전쟁을 치른지도 언 2개월. 이제 그전쟁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만, 페트시아에 의해 잠이 든 샤벨리아만이 마치 깨어나기를 거부하듯 좀처럼 일어나질 못했다.
피잉 -
“흐음..”
“어떤가요?”
프러겔군 마도사로 보이는 장교가 잠이든 샤벨리아를 살피던 마력을 회수하고는 고개를 내저으며 페르티안에게 말했다.
“동면에 든 것처럼 반응이 없습니다.”
“반응이 없다고요?”
“네, 마치 모든 걸 거부하듯 마나하트마저 굳게 잠겨진 모습입니다.”
남작에 의해 그녀가 망가지기라도 한걸까, 페르티안은 샤벨리아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스코브 때도.. 지금도.. 여전히 난 네게 도움이 되질 못하는 구나.”
왜이리 한 걸음씩 늦는건지, 중요한 순간에 그녀 곁에 없었다는 죄책감이 그의 가슴을 옥죄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수고하셨어요.”
방법이없어 송구스럽단 듯 마도사는 페르티안에게 목례를 하고는 방을 빠져나갔고, 페르티안은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조용히 잠이든 샤벨리아의 손을 잡아 곁에 앉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제발 눈을 떠줘, 샤벨리아.”
“...”
“언제나 그렇듯.. 내게 뭐라 해달란말이야.”
***
“뭐..? 파수꾼?”
“그렇다네.”
그렇게 말한 노인은 비어있는 자리를 하나에 가서는 자연스레 걸터앉는 것이었다.
“에구구.. 삭신이야.”
마치 동네 할아버지인 마냥 등을 토닥거리는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난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따지듯 그에게 달려가 말했다.
“당신이지?! 당신이 날 여기로 데려 온 거지?!”
“귀 울려! 아니 뭔 목소리가 이리 커?!”
“이 망할 영감! 어서 날 돌려놓지 못해?! 이게 뭔 짓이야?!!”
나는 영감의 옷깃을 쥐고 흔들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 시작했고, 자칭 파수꾼이라 말한 영감은 내 손아귀에 붙잡혀 ‘켁 켁’거리며 더는 못 참겠단 듯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만! 그만!!”
피잉 -
‘응..?’
그러자 마치 중력이 사라진 듯 내 몸이 둥실 떠오르는가 싶더니, 몸이 굳어버리는 것이었다.
“아이고.. 아가씨가 뭔 힘이 이리 쎈거여.. 휴..”
“어쭈? 너 이거 안 풀어?! 죽고 싶어?!!”
꿈쩍하지 않는 몸에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는 내 모습을 바라보던 파수꾼 영감은 안 들린단 듯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대더니 여유로인 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말했다.
“어디서 개를 샀나, 그 놈 참 잘 짖네.”
“뭐?! 당신 지금 나보고 개라고 한거지?! 맞지?!!”
으르렁 거리며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내 시선에 영감은 어디서 주워 온지도 모를 지팡이를 들어 내 머리를 ‘콩’하고 내리치며 말했다.
“이 놈아! 넌 어른한테 그리 말하라고 배웠냐?!”
“아야! 왜 때려?! 왜 때리는데?!!”
“왜 때리긴, 버릇없으니까 때리지.”
콩 -!
“아악!!”
지팡이에 다이아몬드라도 박았나, 오지게도 아픈 지팡이에 나는 움직이지 않는 몸 상태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에구구.. 뭐 그정도면 반성을 했을테니, 풀어주마.”
탁 -
쿠웅!!
“꾸엑..!”
영감은 그 말과 함께 손가락을 튕겼고, 동시에 떠올라 있던 내 몸은 지면에 내동댕이쳐지며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끄으.. 허리야.. 저 영감 일부러 내던지게 분명해.’
나는 쑤시는 허리를 부여잡으며 일어나 영감을 노려보았고, 그는 한풀 얌전해진 내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미리 말하지만, 내가 널 데려온게 아니야. 네 놈 영혼이 멋대로 들어온 거지.”
‘뭐..? 영혼..?’
내가 무슨 말이냔 듯 쳐다보자 파수꾼 영감은 자리에서 일어나선 멈춰진 주변을 지팡이로 가리키며 물었다.
“여긴 산자의 영역도 죽은 자의 영역도 아니다. 과거의 기억들을 토대로 도서관마냥저장시킨 거대한 파편과도 같은 곳이다.”
“파편이라고..?”
“그래, 그리고 여기에 네놈이 어떻게 들어 온 건진 모르겠지만, 절대로 산자가 올 수 없단 말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그 말 즉슨 내가 지금 영혼상태란 거잖아..?’
영감의 말이 맞다면, 이건 내 과거가 담긴 기억이란 말이고 나는 지금 샤벨리아가 아닌 서지웅으로써 여기에 왔다는 것이 아닌가?
‘근데 가만.. 난 이런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된거지..?’
그렇담 저 녀석은 대체 뭐란 말인가? 나와 같은 이름, 나와 같은 얼굴을 한 녀석이 내가 모를 과거를 살고 있다니. 나는 멈춰있는 또 다른 나를 가리키며 영감에게 물었다.
“뭔가 잘못된거 아니야? 난 이런 기억따윈 없다고. 설마 날 속이려는 거라면..”
그러자 파수꾼 영감은 혀를 차며 웃기지도 않는단 듯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고, 이놈아. 이게 어떻게 네놈 기억이냐?! 아주 분수가 넘쳐도 아주 지랄을 하는구나!”
“뭐요?! 저기요. 저기 있는 서지웅이 저거든요? 이 할아버지 참 재밌으신 분이네, 아주 재밌어!”
파수꾼 영감의 말에 어이가 없단 듯 내가 콧방귀를 끼자, 할배는 지팡이로 또다시 내 머리를 ‘콩’하고 때리며 말했다.
“니가 왜 저 놈이야?! 겉모습만 봐도 딱 다른 사람인데!”
“아야!! 아씨.. 또 때렸어..”
난 지팡이로 맞은 머리를 박박 문지르며, 이거만큼은 억울하단 듯소리 높여 항의했다.
“다르다뇨! 어떻게 저 모습과 이 모습이 다릅니까? 예?”
그러자 영감은 젊은 녀석이 벌써부터 맛이 가 불쌍하단 듯 혀를 차더니, 마법거울로 나를 투영시켜주며 말했다.
“너도 눈을 뚫렸으면 니 눈으로 직접 봐라. 이게 저 얼굴과 같다고?!”
“아 진짜.. 할배, 잘 봐요 내가 바로 저기 있는 서지.. 응..? 어엉?!!!”
할배가 비춰주는 거울을 볼 것도 없단 듯 바라보던 난 순간 경직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바라본 거울엔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황금빛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 그리고 화사하게 아름다운 익숙한 미소녀가 당황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 웃기지마.. 지금 난 서지웅이라고!!”
육체라면 몰라도,영혼은 서지웅이었다. 하지만 왜 샤벨리아의 모습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나는 패닉에 빠진 표정으로 바뀌지 않을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살다살다 지가 남자라고 우기는 여자애는 처음이다, 이놈아!”
‘아니야.. 이건 거짓말이야. 난 서지웅이라고..’
거울을 멍하니 바라보던 난 주먹을 움켜쥐고는 화가 난표정으로영감에게 대들 듯 소리쳤다.
“당신이 꾸몄지?!”
“뭐?”
“이 사기꾼 영감!! 파수꾼이니 뭐니 하며, 나를 농락하러 이 짓을 꾸민거구나?!!”
파지직 -
“응..? 이 공간에서 마력을 쓴다고..?”
분노하며 황금빛 스파크를 일으키는 내 모습에 영감은 놀랐단 듯 나를 바라보며 감탄을 했다.
“감히 날 가지고 놀아?!”
파앗 -
순간 땅을 박찬 내가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던 그 때, 영감이 지팡이를 지면에 살며시 내리쳤다.
두근.
‘..!’
정말로 이 공간은 영감의 공간인지,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의 앞에멈춰진 채 눈만 데구르 굴릴 뿐이었다.
“비.. 비열한데다 비겁하기까지 하구나!”
“흐음..”
비난하는 내 말에도 영감은 뭔가 이상하단 듯 내 얼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더니 무언가 살피기 시작했다.
“호오..참..”
“저기요, 남의 얼굴을 보며 그리 감탄하지 마시죠.”
이 영감 정말 염치도 없는 걸까, 턱을 매만지며 무슨 미술품을 보듯 혼자 감탄하며 사람 무안하게 하는 것이 정말이지 뻔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영감에게 관찰 당하던 그 때, 무언가 알겠단 듯 고개를 끄덕인 그가 지팡이를 다시 지면에 내리치며 내게 말했다.
“네 놈.. 전혀 관계없는 놈은 아니었구나.”
***
드르륵- 쿵!
“읏쨔..”
전투에서 망가진 씰들만을 보관하는 거대한 창고인지, 부서진 마나하트와 함께 죽은 듯이 눈을 감은 씰하나를 병사 두명이 낑낑거리며 옮기고 있었다.
털썩.
“후우.. 이게 마지막이지?”
“응. 그나저나, 이게 다 씰이란 말이야?”
시체더미를 연상케 하듯 못쓰게 된 씰들의 수는 어마어마했고, 그 모습에진저리가 난단 듯 병사 하나가 종이로 말은 연초 하나를 꺼내 붉을 붙이며 말했다.
“고치는 것보다 새로 만드는게 낫다나 뭐라나.”
“그럼, 이걸 다 버린다고?”
“스읍, 후우.. 이번 겨울, 본국으로 수거되어 소각한다더군.”
마스터가 있는 일부 씰들을 제외하고는 보급형으로 생산되어지는 씰들 대다수는 이렇게 부서져 소각되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하루에도 몇 천명씩 씰을 만들어내는 제국의 재력으로 볼 때 고치는 것보다 새로 만들어 보급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 판단했다.
그도 그럴것이 상급 씰이 아닌 이상 하급 씰들은 오히려 고치는 것이 시간과 비용을 낭비시키기에 그들을 고칠 시간에 오히려 상급 씰들을 케어하고 관리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었다.
“저것들도 불쌍하네, 부려 먹을 때 언제고 이렇게 버려지다니 말이야.”
“후우.. 뭐 어쩌겠어. 그러려고 만든 것들인데. 여기 분위기도 을씨년스러운데 몸도 녹일겸 가서 차나 한잔 마시자고.”
“하하, 그거 좋지.”
병사들은 그 말과 함께 거대한 창고 문을 닫았고, 잠시 열린 문에 빛이 들어왔던 거대한 창고는 다시 어둠에 휩싸이며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피이잉 -
그러던 그 때였다. 기능이 정지된 씰들 가운데 구석에 있던 씰하나의 마나하트가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흠집이 나 파손된 마나하트였지만, 기동이 되는지 씰의 마나하트는 더욱 푸른 빛을 발산하며 살아나고 있었다.
검은 긴머리칼에 인형같이 귀엽게 생긴 씰은 순간 눈동자가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천천히 눈꺼풀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피를 머금은 듯 붉고 아름다운 진홍색의 눈동자가 생기를 얻고, 하얗게 식었던 그녀의 볼이 조금씩 홍조가 띠어지며 기능을 되찾고 있었다.
그리고 붉고 사랑스런 입술이 움찔거리는 순간 금이 간 그녀의 마나하트가 계약된 피를 다시금 결속시키며 보호하기 시작했다.
“하아..”
하얀 입김과 함께숨을 내쉬던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당황한 모습으로 주변을 훑기 시작했다. 얼마간을 바라보았을까, 일순 귀여운 미간이일그러진 그녀는 외모와 다른 거친 말을 내뱉으며 누군가를 저주했다.
“빌어먹을 영감.. 대체 날 어디로 보낸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