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62. 기억의 파편
[ 62. 기억의 파편 ]
‘프러겔이 침략했다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야..?’
혼란의 연속이었다. 프러겔이 누굴 침략한단 말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원을 다급히 나가는 그들을 쫓아 간 난 왕성 중앙홀에 도열해 있는 기사들과 병사들의 방패에 새겨져 있는 문양을 보고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노란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중앙의 흑수리가 그들의 방패와 깃발에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잊고 싶을래야 잊을 수 없는 문양, 바로 그것은 하켄제국의 문양이었기 때문이었다.
“프리티마셰 전하.”
왕녀란 여자가 모습을 들어내자, 모여있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고, 그런 그녀의 뒤로 세르지윈과 톰이라불린 백금발의 미소년이 모습을 들어냈다.
“*세베랑스, 프러겔 연합이 침략했다고요?”
“예.. 이전 공물로는 상국(上國)에 대한 성의가 부족하다고..”
꽈악.
기사단장으로 보이는 이의 대답에 프리티마셰는 너무하단 듯 손을 말아 쥐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게.. 하켄이라고..?’
초라한 성, 초라한 병사들, 그리고 불품없는 갑옷을 두른 기사들이 있는 곳이 그 천하의 하켄이라니. 난 황당함을 넘어 실소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와 함께 난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환상이나 환영이 아닌, 조금 먼 과거라는 것을 말이었다.
“프티..”
분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세르지윈은 자신의 손에 든 마나하트를 강하게 쥐더니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금발 미소년도 별반 다르지 않은지 분노와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런 그녀를 지켜볼 뿐이었다.
힘없는 자의 설움. 그것이 지금의 하켄이었다.
“적은.. 어디까지 왔죠?”
“슈테틴성이 함락됐다 하니, 적어도..”
“뭐라고요?! 슈테틴이라면 이곳 뷰쉬발크에서 하루 거리잖아요?! 어떻게 적이 수도 가까이 올때까지 모를 수가 있죠?!!”
황당하단 듯 바라보는 왕녀의 눈동자에 기사단장은 착잡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귀족들이.. 모두 항복했습니다..”
“네..?”
“슈테틴 영주를 제외한 모든 지방영주들이 프러겔 왕에게 길을 열어주는 바람에.. 면목이 없습니다, 전하.”
‘..!’
기사단장의 말에 분노어린 눈동자로 비어있는 중앙홀을 둘러 보는가 싶던 프리티마셰는 이내 서글픈 얼굴로 외롭게 비어있는 왕좌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서약이란게 깃털보다 가볍군요.”
왕녀의 말에 기사단장과 기사들, 그리고 세르지윈과 백금발의 미소년은 침통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프러겔 왕에게 전하세요, 왕성 앞으로 나가 항복할 테니 더 이상 무고한 하켄의 백성들은 해치지 말라고요.”
“전하..”
“그들이 원하는 것이 내 무릎과 내 재산이라면, 기꺼이 주겠습니다. 이대로 하켄의 명맥이 끊기는 것보단 그것이.. 값싼 대가겠지요.”
“크으윽..”
그녀의 말에 기사들과 병사들은 소리를 죽이며 눈물을 흘렸고, 그것이 시대불문한 약자의 숙명이었다.
‘이게 과거라면, 누가 내게 이걸 보여주는거지..?’
‘..!’
그렇게 그들을 바라보던 그 때, 나는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그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바라보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없었다. 흐느껴 우는 기사와 병사들 사이로 처음보는 노인하나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눈치채다니, 제법이군.”
“누구냐?”
내 물음과 함께 주변의 움직임이 정지버튼을 누른 듯 멈춰지는가 싶더니, 그들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나온 그가 말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되네, 난 이 기억들을 지키는 파수꾼일세.”
***
치이이잉 -!!
“샤.. 샤벨리아님..”
“...”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막아보지만, 늘어나는 건 생채기 뿐이었다.
쿠웅 -!!
“크윽..”
무지막지한 기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내뿜는 뇌전 하나를 튕겨내는 것만 해도 기진맥진할 정도로 작은 공격하나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위협적이었다. 그 증거가 날카로운 검상에 엉망진창이 된 중앙홀의 모습이 그것을 방증했다.
“정신을.. 차리세요, 샤벨리아님..”
그그그 -
“모두 없애야 돼..”
“크윽..”
페트시아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마나하트가 어느 때보다 불안정하고, 폭주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었다. 누군가강제로 마나하트의 결계를 열었는지, 댐의 수문을 일제히 연 듯 그녀의 마력이 미친 듯이 주변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피이잉 -
‘..!’
번쩍 -!!
“꺄아아악!!”
샤벨리아의 검을 겨우 막아 버티고 있던 그 때,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일순 번쩍이는가 싶더니, 엄청난검기와 함게 페트시아를 중앙홀 반대편으로 날려 버렸다.
콰아아앙!!
“커흑..”
벽에 박힌 페트시아는 내상을 입었는지 붉은 피를 한 웅큼 입밖으로 흘리며 떨어져 내렸다.
털썩.
“샤.. 샤벨리아 님..”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지 겨우 바닥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던 페트시아는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다가온 샤벨리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꽈악.
“커억..”
“...”
가는 그녀의 목을 움켜쥔 샤벨리아가 천천히 그녀를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무미건조한 황금빛 눈동자가 괴로워하는 페트시아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너도.. 날 더럽히려 온거야?”
“무슨..”
꽈악.
“컥..”
폭주하는 그녀를 막아야 했다. 마력이 줄어들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가는 그녀의 마력은 마치 드넓은 바다를 마주한 듯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프.. 플로헤타님과 같은 수준의 마력이라니..’
짧은 시간안에 어떻게 왕국최고의 씰에 오를 수 있었는지 어느정도 의문을 갖고 있던 페트시아였지만,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쭈삣거릴 정도로 거대한 기운을 품고있는 그녀를 보자니 그런 의심따윈 모두 부질없는 것이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감탄보단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녀의 거대한 힘을 눌러 막아야 했다.
“마.. 마력을 제.. 제어하세요, 샤벨리아님..”
“더럽혀 졌어.. 그가 싫어할 거야..”
“무슨..”
꽈악.
“커억..”
“가야 되는데.. 이 상태론 그에게 갈 수 없어..”
‘..!’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 아래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마치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어린아이마냥 샤벨리아는 눈물과함께 그 해답을 묻듯 페트시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처음이신건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지만, 결계가 풀어진 마나하트와 폭주하는 마력, 그리고 그녀의 마나하트에서 옅어진 페르티안의 피를 보건데, 지금 샤벨리아는 처음으로 마스터와 단절된 공허감에 감정이 격해진 것 같았다. 몇번을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 오래 전 마스터를 처음 잃었을 때 느꼈던 그 강렬하고 무력한 슬픔을 지금 그녀가 겪고 있다 생각하니 문득 샤벨리아가 안쓰럽게 느껴지는 페트시아였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그녀의 마나하트에서 누군가 페르티안의 흔적을 강제로 지우려 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 단절감은 과정보단 결과가 중요했고, 그 처절한 아픔은 너무도 우울한 것이었다.
‘샤벨리아님..’
큼직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을 응시하는 샤벨리아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페트시아는 이해한다는슬픈미소와 함께 힘겹게 손을 들어 그녀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페르티안님은 샤벨리아님을 기다리고 계실거에요.”
“거짓말 하지마!! 그가.. 그가 싫어할거야!! 난.. 나는..”
챙그랑.
페트시아의 목을 감싸쥐었던 손이 풀리더니, 손에 쥐었던 검을 바닥에 떨어트린 샤벨리아가 불안감이 가득한 황금빛 눈동자를 갈피를 잡지 못한채 자신의 양 머리카락을 움켜쥐고는 고개숙여 눈물만을 하염없이 흘리기 시작했다.
“지키지 못했어.. 더럽혀 졌다고.. 그의 피 대신에.. 대신에..”
찌이익 -
“샤벨리아님!”
타악!!
순간 격해진 샤벨리아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자신의 마나하트가 있는 가슴언저리를 인정사정없이 할퀴며 자해를 하자, 그 모습에 놀란 페트시아가 황급히 달려가 자해하던 그녀의 팔목을 잡으며 진정시키려 했다.
“그만하세요! 피가..”
투둑.
“빼야 돼! 빼야 된다고!!!”
“진정하세요!!”
“흐으윽..”
하지만 상처에 대한 아픔보단 정신적인 충격이 큰건지 샤벨리아는 무너져가는 눈동자를 들어 페트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모르겠어.. 더 이상 그가 느껴지지 않아..”
“샤벨리아님..”
이 이상 그녀를 둔다면, 많은 씰들이 그랬듯 최악의 선택을 할 것이었다. 페트시아는 그녀의 괴로움을 잘 안단 듯 눈물을 흘리며 아파하는 샤벨리아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주며 속삭였다.
“괜찮아요, 제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아직 이 일을 겪기엔 이릅니다.”
피이잉 -
“흐으윽..”
그 말과 함께 가늘게 떨며 우는 샤벨리아의 등을 토닥이며 쓰다듬던 오른손이 에메랄드 빛으로 빛나 오르는가 싶더니, 상처받아 흔들리는 황금빛 눈동자를 천천히 잠재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뒤, 자신의 품에서 잠에 빠진 샤벨리아를 내려다보던 페트시아는 눈물이 맺힌 그녀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훔쳐주고는 그녀를 이해한단 듯 슬픈 눈동자와 함께 조용히 속삭였다.
“알아요, 자신의 반쪽이 떨어져가는 느낌.. 오랜 세월을 살아온 저도.. 그것만큼은 익숙해지지 않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