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54. 북북동으로 진로를 돌려라
[ 54. 북북동으로 진로를 돌려라 ]
주륵.
“...”
남부연합군이 내려다보이는 요새 위에서 루트비히 남작은 자신의 검지에 끼어진 반지가 피를 쉼없이 흡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페트시아..”
뿌우우우 -
자신의 피를 쓸만큼 그녀가 지금 위급한 상황이란 것을 직감했지만, 남작에게는 그다지 여유가 없었다. 요새를 포위한 채 쉼없이 거대 대포를 쏘아대던 남부연합군에서 진격을 알리는 고동소리와 함께 수많은 전열보병들이 천천히 진격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슈우우웅 – 콰아앙 -!!!
그와 함께 거대 석(石)탄에 두들겨 맞은 빌헬미네 요새 성벽은 올만 성군이 파상적으로 쏘아댄 마력탄에 결국 터져오르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마력탄을 견디기 위해 축성된 요새성벽이었지만, 이렇게 무수히 두들겨 맞다보면 한계점이 올 수 밖에 없었다.
“남작님, 적이 무너진 성벽 쪽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수비대장의 보고에 남작은 시종의 부축을 받으며 명령을 내렸다.
“좁은 틈일 뿐이다, 당황하지 마라. 그리고 당장 포병대장에게 전해서 틈 뒤로 중포진지를 구축하라고 해.”
“예? 포진지를 말입니까?”
“올만의 특성상 기병들이 먼저 들어 올거다. 포탄은 산탄으로 바꾸고, 돌입하는 순간 사격해 적을 분쇄해라.”
“알겠습니다.”
남작의 명령에 수비대장은 장교모를 잡아 고개를 숙이더니, 그의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 성벽아래로 급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티뤼크.”
“예, 남작님.”
전열보병 앞으로 달려나오는 올만의 나프스 엘들을 발견한 남작은 흰색 터번에 프러겔 장교복을 입고 있던 갈색 피부의 미소년에게 명령했다.
“쿠마틸레 기사단을 투입해라, 포병대를 나프스 엘들에게서 지켜야 한다.”
“맡겨만 주십시오.”
남작의 명령에 아티뤼크는 이마에 손을 올려 경례를 하고는 몸을 돌려 성벽 아래로 도열해 있던 기사단에게 향했다. 쿠마틸레 기사단은 5성급 씰들로 구성된 토르디에르 정예병으로 기사단원 하나하나가 초급장교로 모두들 프러겔 장교복과 함께 샤벨을 차고는 명령을 대기하고 있었다.
“기립!”
척 -
높은 성벽을 손쉽게 훌쩍 뛰어내린 아티뤼크는 나프스 엘임을 나타내는 자신의 삼박을 빼들며 명령했다.
“올만의 나프스 엘들을 저지한다, 검을 뽑아라.”
스릉 -
아티뤼크의 명령에 쿠마틸레의 씰들은 일제히 자신의 샤벨을 빼들었고,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아티뤼크는 하늘색 눈동자를 빛내며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움직임과 함께 갈라진 성벽 틈으로 돌진하며 외쳤다.
“토르디에르 최강의 기사단의 힘을 보여주자!”
* * *
채채채챙 -!!
“크윽..!”
한편, 요새와 멀지 않은 곳에서 에메랄드 잔상과 함께 페트시아의 샤벨들이 쉐다와 카펠라를 몰아치고 있었다. 남작의 피를 흡수한 페트시아의 힘은 평소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고, 그와 반대로 쉐다와 카펠라는 힘에 부치는지 한 명인 그녀에게 점차 밀리며 지쳐가고 있었다.
“항복해라.”
청록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페트시아가 긴장한 얼굴로 쳐다보는 쉐다와 카펠라에게 말했다.
스윽 -
“우리가 너를 얕본거 같군.”
뒤집어 쓰고 있던 로브를 벗어 넘긴 쉐다가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에서 작은 붉은 캡슐하나를 꺼내는가 싶더니 입에 넣어 삼켜버렸다.
피이이잉 -
‘..!’
그러자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마력의 파동과 함께 쉐다의 초록색 눈동자가 페트시아처럼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마스터의 피를 쓸 줄이야.”
쉐다처럼 로브를 넘긴 카펠라도 귀에 걸린 장신구에서 붉은 캡슐 하나를 꺼내더니 입에 넣어 삼켰고, 그녀의 적갈색 눈동자도 붉은 핏빛으로 물들며 엄청난 기운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스릉 -
“프러겔의 씰이여, 긴장하는게 좋을거다. 우리들의 마스터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니까.”
팟 -
‘!!’
그 말과 함께 순간적으로 모습이 사라진 쉐다와 카펠라의 모습에 놀라던 그 때, 페트시아의 옆에서 쉐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보는거지?”
‘..!’
채애애앵 -!!
거대한 대검을 마치 가벼운 샤벨을 휘두르는 것 마냥 빠르게 돌려 내리치는 그녀의 공격에 페트시아는 급히 샤벨을 잡아 교차해선 막았다.
“크윽..!”
엄청난 중압감과 함께 묵직한 그녀의 기운이 마치 거대하게 짓누르듯 밀려 들어왔다. 하지만, 상대는 그녀만이 아닌지 밀려나는 페트시아의 뒤로 강렬한 살기와 함께 매서운 양날창이 회전해 날아왔다.
“끝이다.”
“웨타티오.”
스스슥 -
‘..!’
쉐다의 대검과 카펠라의 양날의 창에 짓눌려 찢어지려던 순간, 페트시아의 몸이 일순 잔상처럼 미끌어져 흩어지는가 싶더니 녹색별빛과 함께 유유히 둘의 협공에서 빠져나왔다.
“흥.. 대단하단 마스터 치곤 별거 없군.”
페트시아는 새침한 얼굴로 샤벨을 쥐고는 자신을 놓친 쉐다와 카펠라에게 조소를 날렸지만, 위력적인 둘의 공격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흡수한 마스터의 피에 비해 소량으로도 저정도의 힘을 발산하는 것을 보면 그녀들의 마스터는 필시 상당한 마도사 임에 틀림없었다.
일반인과 비교해 마도사들의 피는 굉장히 순도 높은 기폭제로 아무리 하급 씰이라 해도 순간적으로 상급 씰을 상회하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허세를 부리는 군.”
팟 -
페트시아의 도발에 피식 웃음을 흘리던 쉐다는 대검을 쥐더니 다시금 모습이 사라졌다.
“멸절참.”
우웅 우웅 우웅 -
‘..!’
대검에 일렁이는 황색 기운과 함께 대검을 치켜들어 페트시아 위로 나타난 쉐다가 그대로 검을 돌려 내리찍자, 페트시아 주변의 땅이 일순 움푹 꺼지며 내려앉으며 엄청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
“윽..!!”
압살당할 것만 같은 강한 중력에 샤벨을 들어 막은 페트시아의 몸이 점차 짓눌리며 내려앉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펠라는 창을 고쳐잡더니 쉐다에게 말했다.
“난 요새를 맡지.”
끄덕.
카펠라의 말에 놀란 페트시아가 힘겹게 몸을 돌리며 외쳤다.
“어.. 딜가는거냐?! 네 상대는 나다!”
그러자 쉐다가 검을 회수해 자세를 잡더니 순간적으로 중력에서 풀려 휘청이는 페트시아에게 대검을 빠르게 휘몰아치며 말했다.
“너는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 * *
두두두두두 -
“적의 씰은 나프스 엘에게 맡기고 모두 성벽 틈으로 돌진해라!”
화려한 올만의 창기병인 바르기르 기병대는 아티뤼크의 쿠마틸레 기사단을 회피해 갈라지더니 성벽 틈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쿠마틸레 기사단에 비해 그 숫자가 많은 올만의 나프스 엘들은 응전해 나온 아티뤼크의 기사단들과 맞부딪히며 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채쟁 채애앵 -
“크윽.. 이 놈들!!”
적의 나프스 엘들은 막았다지만, 올만의 기병대 까진 막을 수 없었던 아티뤼크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나프스 엘 둘의 삼박을 막아 올리며 이를 갈았고, 이윽고 성벽에 도착한 바르기르 창기병대가 무너진 돌벽을 뛰어 넘어 빌헬미네 요새 안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발사!!”
퍼어엉 -!!
‘..!’
급히 끌어모은 24파운드 중포진지를 쌓은 빌헬미네 포병대는 성벽 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르기르 창기병들을 향해 포를 쏘았고, 일순 발사된 산탄은 올만의 기병대를 휩쓸며 여기저기로 날아갔다.
히이이잉 -
“장전해라!”
성공적인 공격이었지만, 올만의 기병대는 많은 수를 앞세워 계속해 성벽 틈을 넘어 들어오고 있었다.
“포병대가 장전할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 발사!!”
파바바바방 -
포대 진지로 돌격해 오는 올만의 기병대를 향해 빌헬미네 전열보병들이 일제히 플린트 락을 발사하며 항전하지만, 이번 공격에 모든 것을 걸었는지 올만의 끈질긴 공격이 연이어 그들을 덮쳤다.
스릉 -
“아슬란께 영광을!!”
히이이잉 -
집념의 싸움, 하지만 적은 수비대에 비해 그 수가 많았던 올만의 기병대가 결국 포병대 진지를 뛰어 넘으며 포병대를 학살하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성벽 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올만의 전열보병들이 프러겔 군을 밀어내며 요새안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남작님, 외성 방어라인이 뚫렸습니다. 어서 내성으로.”
아수라장이 된 외성방어에 수비대장이 남작에게 다가와 보고했고, 아직도 요새 밖으로 많은 수의 적들에 남작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후퇴할 수 있는 수비대는 모두 내성으로 후퇴시켜라.”
“알겠습니다.”
그렇게 남작이 시종의 부축을 받으며 급히 내성쪽으로 이동하던 그 때였다. 성벽 위로 인영하나가 뛰어 오르는가 싶더니 도망치던 남작의 앞을 가로막았다.
“누.. 누구냐?!”
갑작스런 침입자에 근위대가 남작을 보호하며 샤벨을 빼들자 카펠라가 양날의 창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하켄 대제국, 흑십자 기사단 카펠라 폰 루베르켄. 루트비히 남작의 목을 가지러 왔다.”
“흐음..”
“무례한! 남작님을 보호해라!!”
그녀의 말에 발끈한 근위대 병사들이 샤벨을 휘두르며 달려들자 순간 박차며 사라진 카펠라가 놀란 남작의 앞에 모습을 들어내며 말했다.
“부질없는 짓이다.”
챙그랑 -
“커억..”
“끄으윽..”
날카로운 발톱에 뜯긴 듯 수십의 근위대는 도륙되어 쓰러졌고, 경악스런 그녀의 모습에 남작은 놀란 눈으로 카펠라를 바라볼 뿐이었다.
스릉 -
“각오해라, 남작.”
“하켄이 개입되어 있을 줄이야..”
남작은 덜덜 떨면서도 자리를 지킨 시종에게 괜찮단 듯 부축 받았던 손을 떼고는 제복을 정돈하며 허리를 펴 그녀에게 말했다.
“내 목이 목적이라면, 얼마든지 주지. 대신 이 늙은이의 목을 받고 저들은 살려주게.”
노쇠한 그였지만, 프러겔 귀족으로써 마지막의 품위를 지키려는 듯 의연한 모습으로 카펠라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그런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게 하지.”
“고맙네.”
그것으로 됐단 듯 그가 눈을 감던 그 때였다.
“비켜 비켜!!!”
번쩍 -!!
하늘 위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황금빛 뇌전줄기가 요새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앙!!!
가라앉는 먼지 속에서 서슬 퍼런 푸른 눈동자가 카펠라를 응시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너냐?"
'..!'
바람에 휘날리는 황금빛 머리카락 아래로 화사하게 아름다운 미소녀가 독특한 샤벨을 검집에 뽑아 카펠라를 겨누며 물었다. 언제나 그렇듯 오만하면서도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말이었다.
“네가 우리 애들 이렇게 만들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