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48. 북북동으로 진로를 돌려라
[ 48. 북북동으로 진로를 돌려라 ]
스윽 스윽
오랜만에 입는 제복이라 그런지 어색하면서도 설레는 무언가가 있었다.
“후우.. 아자!”
태양빛을 받아 찰랑거리는 금발을 뒤로 넘긴 나는 샤벨을 허리춤에 차고는 기합을 넣으며 내 볼을 눌렀다.
저벅 저벅.
뻐근한 목을 움직이며, 골목을 걷던 그 때 나는 순간 복도가 조용하단 생각을 했다.
“응..?”
나를 향한 모두의 시선, 대체 이 녀석들은 할 일이 없는 것일까? 왜 멍하니 나만 쳐다본단 말인가.
“뭐야? 뭐 문제 있어?”
“아.. 아닙니다!”
병사들은 화들짝 놀라며 일제히 내게 경례를 했고, 나는 수고가 많단 표정으로 대충 손짓을 하고는 어깨를 돌리며 시청 밖으로 나왔다.
“...”
뭘까, 나 혼자인 이 느낌. 내가 건물 밖으로 나온 순간, 거짓말처럼 웅성거리던 소리가 멈추는데 정말이지 묘하게 빡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오랜만에 복귀했더니, 이것들이 진짜 뒤지려고..”
그러던 그 때였다. 저멀리 있던 폰이 순간 벅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시내가 떠나갈 정도로 우렁차게 외치는 것이었다.
“부대 차렷!!”
“뭐.. 뭐야..?”
갑작스런 구령에 놀란 내가 눈을 깜박이자, 폰이 내게 경례를 하며 외쳤다.
“승리의 여신이 돌아오셨다! 섬광의 샤벨리아 만세! 프러겔 만세!!”
그러자 병사들 또한 녀석과 다르지 않은 얼굴과 함께 일제히 나를 바라보더니 경례와 함께 외쳤다.
척.
“섬광의 샤벨리아 만세! 프러겔 만세!!”
“어.. 그래.. 고맙다..”
생각지 못한 환대에 얼떨떨하던 그 때, 털보 리니와 페리츠가 쌍으로 코를 훌쩍이며 나를 쳐다보는데 다 큰 남자 녀석들이 왜 이리 감성적인지, 팔을 벌려 나를 안으려 다가오는 둘에게 ‘더 오면 뒤져’란 눈빛을 보냈고, 둘은 순간 움찔하며 내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아주 궁상아닌 궁상을 떨었다.
‘머리가 벌써부터 아파오네..’
나와 함께 탈영했던 병사들은 남부연합이 바틸라에서 철수하면서 자연스레 테르발로키로 복귀했다. 물론 몰트겐 후작은 나를 포함해 군법에 넘겨야 한다며 길길이 뛰었지만, 바틸라의 보급로를 공격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번 한 번 만큼은 죄를 묻지 않는 선에서 일을 매듭지었다.
물론 플로헤타의 입김과 여왕의 배려가 크게 작용했다는 건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뭐 어쩌겠나?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연줄 좋은 놈이 짱인거다.
“병문안에 뭘 사가지..?”
사실 오늘 내가 나온 이유는 다름 아닌 발슈테인의 병문안 때문이었다. 아슈트로한테 같이 얻어맞은 동기로써 내가 아님 누가 가겠는가?
“흐음..”
나는 근처 청과점에서 병문안에 가져갈 과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역시 병문안 선물은 과일선물세트가 짱이었다.
“이거하고, 요고.. 그리고 이거 주세요.”
“역시 안목이 있으시군요.”
청과점 주인은 값비싼 과일들을 고르는 내가 아주 예뻐주겠단 표정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구니에 담기 시작했고, 서비스로 다른 과일 몇 개를 싸주었다.
“저.. 샤벨리아님..?”
“응?”
“전 언제 갈수 있을까요?”
내 짐 한가득 들고 있던 사달수드가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어딜 가려고? 휴가가 필요해?”
“아니.. 그러니까, 샤벨리아님도 복귀하셨으니 저도 슬슬 본업으로 돌아가야..”
“아씨, 이건 왜 이리 안 까져! 썅!!”
사달수드는 거칠게 과일껍찔을 까는 내 모습에 침을 삼키더니, 과일바구니에 묶인 리본을 만지며 딴척을 했다.
“아, 미안. 뭐라 했지?”
“그러니까.. 저도 이어받은 생업이라는 게 있고.. 샤벨리아님이 피해가 안 가는 선에서..”
“아우씨!! 이거 진짜 열 받게 하네?! 야 다른 거 줘봐!!”
“네? 아, 네네, 여.. 여기 있습니다.”
나는 중간에 까다 만 과일을 사달수드에게 던지고는 다시금 과일껍찔을 벗기기 시작했다.
“아, 내가 또 말을 끊었네. 미안하다, 다시 말해 볼래?”
그러자 사달수드는 해탈한 미소와 함께 내게 받은 과일을 까서는 손에 올려주며 말했다.
“피부에는 과일이죠, 샤벨리아님의 미모가 나날이 아름다워지시는 거 같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짜식이.. 고맙다 야.”
난 그런 사달수드의 어깨를 툭치며 씨익 웃었고, 그는 그런 내 모습에 맞미소를 지었지만 눈만큼은 누구보다 슬펐다.
* * *
쪼르르
햇살이 들이치는 정원 가운데, 웅장한 사자 조각상 아래로 약(藥)탕으로 보이는 거대한 온천탕이 사자 입줄기에서 흘러 떨어지는 물을 받고 있었다.
스윽.
“쉐다인가?”
“예.”
흰색 로브의 인영 하나가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들어내는가 싶더니, 무릎을 꿇어 후드를 뒤로 넘기곤 아름다운 얼굴을 들어냈다.
“카펠라는?”
“바실레스를 경호중입니다.”
요양중인지 알 몸의 아슈트로가 탕에 몸을 담근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적의 상태는?”
“라고자라 사막을 두고 대치 중입니다.”
쉐다의 보고에 아슈트로는 그럴 줄 알았단 듯 목을 돌려 근육을 풀더니 벽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하스코브를 불태운 이상,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걸릴거다.”
첨벙.
그 말과 함께 몸을 일으킨 아슈트로는 그녀의 시선은 아무렇지 않단 듯 천천히 욕탕으로 나와 화려하게 세공된 유리잔에 담겨진 붉은 액체를 들었다.
“바실레스에게 전해, 지금이 빌헬미네를 공격할 때라고.”
“지금 말입니까?”
“그래, 아무리 프러겔의 신성이라 할지라도 사막너머의 빌헬미네를 구할 순 없을거다.”
그리곤 잔을 들어 정체불명의 붉은 액체를 마시기 시작했다.
피이잉 -
무슨 액체일까, 순간 그의 마나하트가 청명히 빛나는가 싶더니, 엄청난 마나폭풍과 함께 주변을 뒤흔들며 그 위세를 더해갔다.
“토르디에르 영주의 목을 가져와라. 떨어진 아군의 사기를 올리기에 딱 좋은 제물이니까.”
“예.”
“그리고, 힘들게 사막을 건너오는 놈들에게 선물 하나쯤은 줘야지. 안 그래?”
“분부대로.”
쉐다는 그 말과 함께 모습을 감췄고, 홀로 정원에 남겨진 아슈트로는 분노어린 황금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샤벨리아가 있는 테르발로키를 향해 중얼거렸다.
“샤벨리아, 다음에 만난다면 이전과 같이, 운이 좋을 순 없을거다.”
* * *
“이게 뭡니까?”
“병문안 선물.”
발슈테인은 거대한 내 종합과일세트에 꽤나 놀랐는지 흘러내린 안경을 뒤늦게 추슬러 올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혹시.. 정도라는 걸 모르시는 겁니까?”
“왜? 뭐? 그리고 옛말에 뭐든지 크고 비싼게 좋다고 했어.”
“예..?”
이거 완전 헛똑똑이구만, 나는 황당하단 듯 쳐다보는 발슈테인에게 크게 인심써서 알려준단 듯 얼굴을 가까이해 속삭였다.
“걱정마, 1골드 깎았어.”
나는 놀라 쳐다보는 녀석의 시선에 부끄럽단 듯 코를 긁적이며 의자에 몸을 기대며 ‘어때? 좀 폼나나?’하며 바라보았고, 발슈테인은 소리가 날 정도로 이마를 탁 치며 중얼거렸다.
“오, 신이시여.. 제가 이 분을 어디서부터 손 대야..”
너무 감동을 받은 걸까,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발슈테인의 모습에 난 우쭐거리며 곁에 있던 사달수드를 툭치며 말했다.
“야, 아주 제대로 먹힌거 같은데?”
그러자 사달수드는 해탈한 미소와 함께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 저라도 못 버틸겁니다.”
“그치? 나 이런 사람이야. 그니까, 너도 잘해. 혹시 알아? 내가 언제 감동 줄지?”
“하하.. 감사하지만, 샤벨리아님을 품기엔 제가 많이 부족한 거 같네요.”
“에이, 뭘 그렇게 까지야. 아니야, 품을 수 있어.”
“아니요, 자신이 없습니다. 지금을 보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드네요.”
“괜찮아, 나 그렇게 어려운 사람 아니야. 물론, 남다른 품격을 가졌지만 서도? 하하하!!”
“하하.. 하하..”
역시 부하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했다. 난 감동받아 말을 잇지 못하는 두 녀석의 모습에 굉장히 흡족해 하며, 종종 이렇게 신경을 써주어야겠단 결심을 했다.
그렇게 발슈테인이 감동에서 돌아오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녀석은 아까와 다른 진지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헌데 샤벨리아님.”
“응? 뭔데?”
“앞으로 어떡하실 생각입니까?”
“뭘?”
“하스코브가 당한 이상, 라고자라 사막을 쉽게 넘을 순 없으실 겁니다.”
‘아.. 그랬지.’
그나마 있던 슐리벤조차 녀석들의 초토화 작전으로 말끔하게 부서진 탓에 사실 굉장히 곤란해진 건 우리였다. 새로운 보급로를 개척하는 것도, 사막을 지나 기진맥진한 병사들로 전투를 치루는 것도 무엇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것을 잘 아는 발슈테인이었기에 녀석은 꽤나 근심어린 표정과 함께 심란해 보였다. 아마 페르티안도 전날 참모회의에서 지쳐 왔던 것도 아마 이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일 거였다.
답이 없는 문제에 고심하던 그 때였다. 순간 복도가 어수선하다 싶더니 전령하나가 병실로 들어오며 보고했다.
“보고입니다, 지금 남부연합이 빌헬미네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이동중이라고 합니다.”
“뭐?! 사실이야?!”
놀란 내가 벌떡 일어나자, 전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방금 빌헬미네로부터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확실합니다. 적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씨..”
정말이지 쉴 틈을 주지 않는 녀석들이었다. 게다가 어떻게 곤란한데는 이리 잘 때리는지 나는 아슈트로에게 베었던 자리를 만지며 작게 으르렁거렸다.
“그 붕어눈 새끼, 만나면 뒤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