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41. 황금빛 도적단
[ 41. 황금빛 도적단 ]
“뭐라?!!”
콰앙 -!
빌헬미네 요새에서 멀지 않은 연합의 주요도시이자 카로이 백작의 영지인 ‘류스텐빌’은 샤벨리아의 계속된 습격에 발칵 뒤집어져 있었다. 그녀로 인해 바틸라로 향하던 수송대가 몇이나 당했는지 지금까지 잃은 군수품과 노예들의 수를 생각하면 이가 갈리는 카로이 백자과 올만이었다.
“또 붉은 여명단 놈들에게 당했단 말이냐?!”
“예..”
“대체 어떻게 호위를 하면 그깟 도적놈들에게 수송품 빼앗긴단 말이냐?!!”
“붉은 여명단의 씰이 워낙 강해..”
콰아앙!!
“도적놈들의 씰이 강하면 얼마나 강하단 것이야!!”
말은 그랬지만, 수뇌부의 귀까지 올라온 정체불명의 씰은 지금 프러겔 군보다 가장 골치아픈 존재로 떠올라 있었다.
“같이 보낸 나프스 엘들은 뭘 하고 있단 말이냐?!”
“그것이..”
전령은 백작의 물음에 답을 하지 못했고, 카로이는 또다시 전멸을 당한 호위대에 머리가 아픈지 의자에 기대 손을 짚었다.
“백작, 이대로 가면 수송품을 나를 노예마저 부족할 것이오.”
군수품만 사라자지면 그나마 양반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지고 나르는 노예들을 보내는 족족 풀어주어 사라지게 하니, 올만 입장에서도 아주 죽을 맛이었다. 게다가 정규군인 ‘나자미 자디드’와 달리 농민들을 강제로 징집해 데려온 대다수의 올만군은 지금 불안정한 보급에 꽤나 흔들리고 있었다.
“끄응..”
카로이 백작은 보급 때문에 이렇게 차질을 빚을 줄은 몰랐단 듯 머리를 감싸쥐었다. 테르발로키를 프러겔에 준 이유도 보급문제였었는데, 바틸라마저 보급 때문에 물러난다면 토르디에르 절반을 공짜로 주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아마 프러겔의 신성(新星), 섬광의 샤벨리아겠지요.”
침묵에 싸인 수뇌부 한 켠, 조용히 앉아 있던 은발의 미소년이 황금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미소와 함께 얼굴을 들어냈다.
“그녀라면 테르발로키에서 탈영했다는 소문이 있소.”
“탈영? 씰이 탈영해봤자 어디로 간답니까? 그녀의 마스터가 테르발로키에 있다는 걸 잊었습니까?”
“그럼, 그 정체불명의 씰이란게..”
백작의 말에 아슈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입니다.”
‘!!’
그의 말에 수뇌부는 역시나 하는 표정과 함께 탄식을 했고, 이내 골치가 아파졌단 듯 이전보다 더 어두운 얼굴로 탁자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금발의 씰이 나프스 엘을 어린아이 다루듯 도륙 한다? 그것만큼 그녀밖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
“흐음..”
그렇게 말을 잇지 못하며 무거운 침묵만을 지키던 그 때, 아슈트로는 미소와 함께 탁자 중앙에 있는 어느 한 도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걱정마세요, 그녀가 더 이상 날뛰지 않게 제가 해결해 드리죠.”
“아슈트로 경.. 진심이오?”
“잊으셨습니까? 제가 온 이유를.”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그의 권태로운 눈동자가 일순 살기를 띠며 번뜩였고 그런 그의 모습에 수뇌부는 마른 침을 삼키며 그가 가라킨 도시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라면 가능할 것 같다는 묘한 희망을 품으며 말이었다.
* * *
조용한 테르발로키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시청의 한 집무실에 많은 서류와 씨름을 하고 있는 페르티안이 보였다.
똑똑.
“응..?”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폰이 걱정스런 얼굴로 문 앞에 서있었다.
“아직도 일하십니까?”
“아 뭐.. 그 동안 멍 때린 것도 있고 해서..”
“정말이지 그 분은.. 계시든 안 계시든 그 존재감 하나는 대단하시네요.”
자조적인 폰의 말에 페르티안은 공감한단 듯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게, 샤벨리아죠.”
“동의합니다.”
폰도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는지 미소를 지었지만,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제게 실망.. 하셨겠죠..?”
덩치와 맞지 않게 폰은 후회스런 눈빛과 함께 불안한 듯 자신의 장교모를 만지작거리며 우물쭈물 거렸다.
“네.”
직설적인 페르티안의 말에 폰은 ‘그렇죠?’란 표정으로 더욱 목이 움츠려들었고, 그런 폰의 모습에 페르티안은 펜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되돌리고 있잖아요.”
“...”
“오늘 병사들과 함께 밀포대를 나르며, 어려운 주민들을 위해 발 벗고 돌아다녔다 들었어요.”
그의 말에 폰은 멋쩍은 웃음과 함께 그걸로는 부끄럽단 듯 자신의 목을 쓸어 만졌다.
“샤벨리아는 알거에요. 폰이 지금 얼마나 미안해하는지요.”
“하하.. 그러길.. 바랄뿐입니다.”
페르티안의 격려에 폰은 조금은 기운이 난단 듯 아까와 달리 홀가분하단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덕분에 기운이 나는 것 같습니다.”
“뭘요. 저도 노력중인걸요.”
그의 말에 폰은 미소를 짓더니 집무실을 나서며 페르티안에게 말했다.
“그래도 오늘은 좀 쉬십시오. 항상 시청을 보면 페르티안님 집무실만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습니다.”
“그런가요..?”
샤벨리아에 대한 미안함이 큰 만큼 하루 빨리 자신의 잘못을 고쳐 잡고 싶었다. 그런 욕심이 자신도 모르게 무리하게 만들걸지도 몰랐다.
“알겠어요,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죠.”
페르티안의 대답에 폰은 예를 표하며 집무실을 나갔고, 혼자 남겨진 그는 뻐근한 몸을 풀 듯 한껏 기지개 켜고는 오늘은 그만하잔 듯 홀가분하게 몸을 일으키며 촛불을 껐다.
그렇게 피곤한 목을 만지며 자신의 방으로 가던 그 때였다, 방문 앞에서 선 그의 귓가로 작게 찻잔이 달그닥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혹시나 올지 모를 샤벨리아를 위해 그녀가 티타임을 갖던 시간에 맞춰 시종에게 항상 커피를 올려두라 했는데, 평상시라면 들리지 않아야 할 찻잔소리가 들린 것이었다.
벌컥.
“샤벨리아!”
반가운 마음 때문일까? 페르티안은 순간 표정이 밝아지며 문을 벌컥 열었고, 그의 눈동자는 빠르게 그녀를 찾았지만 바램과 달리 방안은 그저 시종이 켜놓고 간 촛불이 전부였다.
“그럼.. 그렇지..”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단 듯 피식 웃음을 흘리던 그 때, 비어있는 찻잔접시가 문뜩 눈에 들어왔다.
‘..!’
그와 함께 바닥에 떨어져 있는 커피 자국 또한 서둘러 도망친듯 문고리를 잡은 자신의 옆에서 신기하게도 멈춰 있었다.
“정말이지, 넌..”
페르티안은 너무도 그리웠단 듯 한가득 미소를 짓고는 열었던 문을 천천히 닫으며 문뒤에서 숨죽여 숨어있던 그녀를 바라보았다.
“변함이 없구나.”
‘시.. 시발.. 드.. 들켰다..’
이 놈의 커피에 헤벌레 낚인 나도 한심하지만, 어떻게 내가 여기에 있는걸 알았단 말인가? 나는 몰래 간식을 훔쳐 먹다 걸린 아이처럼, 녀석의 눈치를 보며 아직 포기못한 커피를 한 입 호록 마셨다.
“언제 온 거야?”
“뭐.. 그냥 잠깐 산책하다보니..”
누가 산책을 포튜샤니에서 테르발로키까지 한단 말인가? 페르티안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리는 그녀가 너무도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뭐야..? 왜 자꾸 그윽하게 쳐다보는겨..?’
나는 너무도 진하게 쳐다보는 녀석의 시선에 어쩔 줄 몰라하며 이상하게도 구석으로 뒷걸음질을 쳐 쭈구리가 되고 있었다.
스윽.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 ‘어쩌지?’란 표정으로 안절부절 하던 그 때였다. 녀석은 내 턱을 잡더니 그대로 입을 들이대며 입맞춤을 했다.
‘으아아아!!’
커피잔을 든 채 잔뜩 움츠린 모습으로 녀석에게 입맞춤을 당한 나는 어버버 거리며 녀석을 바라보았고, 페르티안은 그런 내 눈을 응시하더니 내 뒷목을 소중히 받치며 그대로 키스하기 시작했다.
‘혀... 혀가..’
첫 키스, 정말 내 생애 첫 키스였다. 더욱 놀라 커진 내 눈동자가 녀석을 바라보았지만, 페르티안은 나와의 키스를 느끼며 더욱 진하게 내게 침입해 들어왔다.
타악.
‘..!’
놀란 내가 도망치려 하자, 녀석은 그런 날 강하게 붙잡으며 끌어안아 키스를 했고, 나는 너무 기분좋고 황홀한 그 감촉에 다리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녀석이 날 엉망으로 만드는 걸 허락하고 말았다.
“쭈읍..”
서로의 타액이 떨어지고, 감았던 녀석의 눈이 더욱 애틋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근.
도망칠 수가 없었다. 어떤 것도 무서운 것이 없는 나인건만, 녀석이 무서웠다. 아니 적극적인 녀석을 거부하지 못한 채 무방비한 내가 두려웠다. 단단히 날 옥죄인 녀석은 키스의 마력인지 평소와 달랐다.
‘히.. 힘이 안 들어가..’
평소라면 녀석을 매다 꽂을 나였지만, 왜인지 오늘만큼은 녀석을 이길 수 없었다. 아니, 녀석이 남자란 걸 또렷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더 이상 남자가 아닌 여자란 것도 말이었다.
“샤벨리아..”
“아..”
내 입술과 내 혀를 더 탐닉하고 싶은지 만족을 모르는 녀석의 입술이 나를 덮치고, 벽에 밀쳐 열정적으로 내게 키스하던 녀석의 손이 천천히 내 가슴위로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물컹.
“자.. 잠깐..”
내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잡아 만지는 녀석의 손을 잡은 내가 두려운 눈빛으로 녀석을 응시했다.
“싫어?”
“그.. 그건..”
이 감정 대체 뭘까, 두려우면서 너무도 행복한 감정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렇게 주저하는 날 바라보던 녀석은 귀엽단 듯 아찔한 미소를 짓더니, 무례하게도 다시 내게 키스를 하며 내 가슴을 부드럽게 만지기 시작했다.
‘기.. 기분이 이상해..’
녀석을 잡았던 내 손엔 이미 힘이 빠져 있었다. 하나씩 하나씩 내 것을 빼앗아가는 못 된 녀석이건만 난 그런 녀석을 막을 수 없었다. 오히려 행복해 보이는 녀석의 얼굴에 그저 기쁠 뿐이었다. 정말 바보였다, 얻는 것 없이 모든 것을 주는 건 나인건만 뭐가 좋은지 난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녀석이라면, 내 모든 것을 줘도 아깝지 않다고 말이다. 그저 지금처럼 나만 바라봐 주길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