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36. 신성 프러겔의 이름으로
[ 36. 신성 프러겔의 이름으로 ]
사실 페르티안도 바실레스가 하스코브를 노리고 공격한 양동작전인 줄은 몰랐다. 예비대를 급히 편성해 도시를 빠져나가려던 그 때, 치안 책임자였던 발슈테인이 그를 멈춰 세우며 보고를 했다.
“페르티안 님,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샤벨리아가 먼저 떠났다 하지만, 그 정도 병력으론 반군과 올만 연합군을 막을 순 없었다. 페르티안은 자신을 붙잡는 발슈테인이 야속한지 빨리 말하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하스코브의 출입명부입니다.”
“그게 지금 필요한건가요?”
“예, 잠시면 됩니다.”
단호한 발슈테인의 모습에 페르티안은 하는 수 없단 듯 말에서 내려 그가 건넨 명부를 살펴보았다.
“그냥 도시 출입명부잖아요?”
“하지만, 오늘 날짜를 보십시오.”
“오늘이요?”
‘..!’
토르디에르 전역이 전시상황이 된 이상 도시의 출입인원을 체크하는 것은 중요했다. 게다가 특정날짜 하루만에 도시를 빠져나간 주민의 수가 평소의 3배 이상이란 것은 꽤나 미심쩍은 부분이었다.
“이게 다 오늘 나간 숫자라고요?”
“예, 그것만이 아니라 하나같이 짐을 한가득 가지고 떠났다고 초소 헌병이 보고했습니다.”
“짐을 한 가득이요?”
토르디에르 반군은 정규군이 아니었다. 카로이 백작의 반란에 호응해 전역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이 곳 하스코브 출신의 반군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하스코브 주민의 상당수가 자신의 터전을 버리고 도시를 떠났다는 건 적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전조로 봐도 무방했다.
“설마 테르디네 항을 공격한 건..”
“필시 저희를 꾀어내기 위한 양동작전일 가능성이 큽니다.”
“흐음..”
페르티안은 너무 상황이 긴박한 나머지 하마터면 큰 그림을 놓칠 뻔 했단 듯 주먹을 쥐더니 자신의 머리를 세게 한 대 쥐어박았다.
“페.. 페르티안 님?”
“아직 멀었네요, 이 정도 일로 평정심을 잃다니.. 고마워요, 발슈테인. 언제나 날 진정시켜주는 건 당신 밖에 없네요.”
“아닙니다. 제 할 일 인걸요.”
너무도 착한 자신의 상관에 발슈테인은 오히려 자신이 미안하단 듯 안경을 고쳐 올리며 너무 쎄게 때려 살짝 부어오른 그의 이마를 어찌할 바 몰라했다.
“후작에게 보고하죠.”
“그럼, 테르디네 항은 어찌할 생각입니까? 아무리 양동이라고는 하나 항구를 포위한 적도 적지는 않습니다.”
“믿어야죠, 샤벨리아라면 어떻게 해 줄거에요.”
“예..?”
근거 없는 그의 믿음에 발슈테인은 그게 다냐는 듯 쳐다보았고, 페르티안은 씨익 웃고는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군대를 멈추곤 몰트겐 후작이 있는 시청으로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페르티안 님, 반군과 올만 연합군의 좌익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말을 몰아 다가온 폰의 보고에 페르티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적으로 큰 망원경을 페리츠의 어깨에 올려선 적의 진영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곤 망원경을 바라보며, 폰에게 공격루트를 가리키며 명령했다.
“몰트겐 후작께서 적을 잘 붙잡고 계십니다, 우리는 붕괴된 좌익을 돌파해 중앙을 쳐 이 참에 적의 예봉을 확실히 꺾죠.”
“알겠습니다.”
페르티안의 명령에 폰은 예를 표하곤 말을 몰아 측면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기병대에게 다가가 샤벨을 뽑으며, 우렁차게 외쳤다.
“적의 측면이 무너졌다, 모두 검을 빼라!!”
스릉.
폰의 외침에 프러겔의 경기병대는 날카로운 샤벨을 빼들고 말고삐를 쥐었고, 그런 기병대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폰은 말허리를 발로 때려 달려 내려가며 외쳤다.
“올만의 광신도들에게 프러겔 기병의 위엄을 보여라! 여왕폐하 만세!! 기적의 페르티안 만세!!”
두두두두 -
야심차게 숨겨 놓았던 5천의 기병대는 엄청난 흙먼지와 함께 프러겔 보병들에게 밀려 우왕좌왕하는 적의 보병들에게 들이 닥치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아군 기병이다!!”
“어서 가서 휘저으라고!!”
보병들은 환호와 함께 자신들을 지나쳐 적에게 쇄도해 들어가는 기병들에게 모자를 흔들며 환송했고, 폰을 위시한 프러겔 기병대는 사색이 된 적의 연합군을 뭉개버리며 바실레스가 있는 중앙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바.. 바실레스 님!! 어서 후퇴를!!”
“후퇴라니?! 여기서 또 어딜 도망치란 말이냐?!!”
좌익이 완전히 와해되었단 전령의 보고에 부하장교하나가 다급히 그를 피신시키려 했지만, 그의 주인은 이번 전투의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미련을 부렸다.
“적의 기병대가 지근거리까지 돌격해 들어왔다는 보고입니다. 이대로라면 중앙군도..”
“우리 군은 강하다!! 버텨라!!”
“하오나..”
“더 이상 후퇴란 소릴하면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겠다!!”
완강한 바실레스의 모습에 부하장교는 작은 한 숨과 함께 물러나서는 그의 주위에 대기해 있던 중앙 예비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방진이다!! 아군의 선봉이 적을 뚫을 때까지 버티는거다!!”
반군 중에서 정예라는 카로이 백작 휘하 전(前) 프러겔 지방군 3연대 소속 토르디에르 공국군은 2열 사각진을 만들어서는 좌측에서 오는 폰의 기병대를 기다렸다.
“쉐다! 카펠라!”
“예, 바실레스 님.”
바실레스는 자신의 뒤에 있던 흰색 로브를 뒤집어 쓴 정체불명의 씰을 불러서는 불리한 전장을 가리키며 명령했다.
“적의 포대다! 저기 있는 포대들을 모두 쓸어버려라!!”
하지만 그의 명령을 이행할 생각이 없는 걸까, 적갈색 머리카락의 미소녀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
“죄송하지만, 저희의 임무는 바실레스님의 호위입니다. 군이 붕괴하는 상황에서 자리를 비울 순 없습니다.”
“카펠라! 감히 네가 내 명령을 불복종 해?”
“카펠라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이라도 군을 물리..”
짜아악!
바실레스는 후퇴를 권하는 베이지 머리칼 미소녀의 뺨을 그대로 때리며 소리쳤다.
“내가 후퇴란 말을 꺼내지 말라했다, 쉐다!!”
세게 때린 탓일까, 입가에 실금같이 흘러내린 피를 닦은 쉐다는 알겠단 듯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고, 카펠라도 고집을 부리는 그를 말릴 순 없단 듯 조용히 뒤로 빠져 전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고집대로 돌아가지 않듯 그렇게 자존심의 대가로 그가 지불하는 것은 상상이상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 * *
“뭐?! 하스코브가 야습을 받고 있다고?!!”
급하게 달려온 전령의 보고에 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페르티안님께서 여기는 잘 통제가 되고 있으니, 샤벨리아님은 걱정 말고 항구에 있으..”
“걱정 말라니?! 내가 지금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게..”
타악.
‘..!’
전령의 말도 다 듣지도 않고 샤벨을 챙겨 말을 오르려는 내 모습에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가르디오르가 내 손목을 움켜쥐며 말했다.
“정말 성격이 급하시군요.”
“이거 안 놔?!”
나는 화가 난 눈빛으로 가르디오르를 노려보았고, 녀석은 그런 내 모습에도 꽤나 침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아닌 다른 남자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겁니다.”
“뭐?! 니가 뭔..”
꽈악.
“윽..”
기운을 불어넣지 않는 이상, 나도 여자애 손힘 밖에 안됐다. 그렇기에 내 팔목을 강하게 쥐며 당기는 녀석의 팔 힘에 난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당신은 좀 더 주위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겠네요.”
“뭐..?”
“자신의 실력을 믿는 건 좋지만, 그만큼 남을 믿지 않다는 건 나쁜 버릇입니다.”
‘이 자식이..’
하나같이 구구절절 옳은 말을 하는 저 주둥이가 왜 이렇게 얄미운 걸까, 성질대로라면 정말이지 입술을 찰싹 하고 때려주고 싶었다.
“지금 때리고 싶다 생각했죠?”
움찔.
‘이 새끼.. 독심술 하나..?’
“독심술 같은 거 안 배웠습니다.”
녀석의 말에 내 눈이 엄청나게 커지자, 가르디오르는 더는 못 참겠단 듯 웃음을 터트리며 잡았던 손목을 놓아주었다.
“하하하하!! 정말이지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는 건 샤벨리아 당신 밖에 없을 겁니다.”
‘뭐..?’
저 새끼, 지금 내 욕하는 거 맞지? 나는 내가 화를 내야 하는건지, 아님 부끄러워 해야 하는건지 헷갈리는 표정으로 녀석에게 잡혀 얼얼한 내 손목을 주물렀다.
“세게 잡아서 미안합니다, 너무 흥분해 있어서 힘을 쓸 수 밖에 없었어요.”
“흥..”
나는 가르디오르의 사과에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고, 녀석은 그런 내게 다가와선 작게 속삭였다.
“삐진 얼굴조차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샤벨리아.”
‘..!’
“시발 깜짝이야!!”
퍼억!
“커억.. 왜..?”
은신술까지 익혔나? 뭔 놈이 소리없이 다가오는거야? 나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고, 가르디오르는 정통으로 내 주먹에 맞아 다시 모래사장에 들어누우며 기절해 버렸다.
“다.. 단장..?”
샤를은 그대로 뻗어버린 가르디오르를 살피더니, 건장한 성인 남자를 그대로 기절시킨 내 주먹에 몸을 부르르 떨며 작게 중얼거렸다. 마치 그 아픔을 안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기절한 가르디오르의 코피를 닦아주며 말이었다.
“저건, 인간의 주먹이 아니야. 피로 담금질한 도살자의 주먹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