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35. 신성 프러겔의 이름으로
[ 35. 신성 프러겔의 이름으로 ]
“뭐..?”
“결혼합시다.”
이건 또 무슨 똘아이인가? 나는 너무 자연스럽게 말하는 녀석의 태도에 말문이 턱 막혔다.
“한 눈에 반했습니다. 이건 운명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결혼식은 아무래도 친가에서 하는 게 좋겠지요?”
“아니, 나는 있지..”
“걱정마십시오, 신혼집은 프러겔에서 멀지 않은 곳에..”
퍼억.
“커억..!”
꽤나 자기중심적인 녀석인지, 나는 참다못해 녀석의 복부에 알진 주먹을 먹여주고는 소리쳤다.
“사람 말 좀 들어! 난 씰이라고!!”
“...”
복부를 틀어쥔 채 무릎 꿇고 있던 녀석은 내 외침에 벌떡 일어나더니,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단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래서요?”
“뭐..?”
“그게 우리 사랑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죠?”
진지한 눈빛과 감정을 알 수 없는 포커페이스를 한 녀석은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란 표정으로 쳐다보는 날 뚫어지게 쳐다보니, 갑자기 내 허리를 끌어안아 당겼다.
‘..!’
“뭐.. 뭐야?”
스윽.
놀람도 잠시, 녀석은 아주 능숙하게 내 턱과 볼을 큰 손으로 감싸는가 싶더니 천천히 얼굴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키.. 키스하려는거야? 지금 이거 키스 하려는거지?!’
지그시 눈을 감고 오는 녀석과 달리, 나는 눈동자를 초당 백번 이상을 왔다갔다 하며, 갑작스레 당한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까 빠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저.. 정신차려 서지웅! 첫 키스만큼은 지켜야 돼!!’
가장 간단한 것이 베스트라고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쪼그려 앉아 무릎사이로 얼굴을 박고는 무안해할 녀석에게 사과했다.
“미.. 미안!!”
“...”
소리가 없었다. 하긴 쪽팔리겠지. 나도 여자한테 키스하다 거부 받으면 얼마나 쪽팔릴지 이해하고 남았다. 그래서 일까, 나는 도저히 민망해 하는 녀석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하하!”
‘응..?’
재밌단 듯 웃는 녀석의 목소리에 나는 ‘뭐지?’하는 표정으로 힐끔 고개를 들어 녀석을 쳐다보자, 가르디오르는 매우 흥미롭단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며 말했다.
“전장(戰場)의 여신(女神)이라는 여자가 키스를 무서워 할 줄이야.. 이 가르디오르, 당신에 대한 사랑이 더욱 타오르는군요.”
‘뭐.. 뭐라고..?’
녀석은 멋들어지게 쓰고 있던 검은색 모자를 우아하게 벗어 가슴팍에 대고는 한 쪽 다리를 뒤로 빼며 자신을 소개했다.
“베르니아 공국 철혈(鐵血) 용병단 단장, 주세페 가르디오르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샤벨리아 경.”
‘이 녀석.. 내가 누군지 알면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가 일어나자 녀석은 씨익 웃으며 스윽 얼굴을 들이밀더니, 방심하고 있던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쪽’하며 댔다.
‘!!’
“전쟁에서 방심은 금물입니다, 샤벨리아 경.”
화악.
당했다. 완전 당해버렸어. 나는 내게 일어난 일을 자각하고는 얼굴이 빨개졌고, 가르디오르는 아주 만족스런 표정과 함께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 새끼가!!”
짜아악!!
“커어억!!”
사람이 뺨 한 대에 몸이 빙그그 돌며 쓰러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나는 모래사장에서 움찔거리며 일어나지 못하는 가르디오르를 홀로 남겨둔 채 우리 둘을 ‘뭐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샤를의 손목을 잡고 나와 버렸다.
“망했어, 망했다고..”
용병단의 가세로 시끌벅적해진 테르디네 항은 전쟁 중임에도 모처럼 화기애애한 저녁 분위기를 연출하며, 오늘의 승리를 기뻐하고 있었다. 람베르토와 샤를이 깎던 감자는 베르니아 공국 특제 요리인 토마토 뇨끼가 되어 파티 아닌 파티를 열고 있었다.
“누나, 아직도 화났어?”
“...”
샤를은 자신의 몫으로 받은 뇨끼를 옆에 놓더니, 나를 위해 가져왔는지 작은 잔에 담긴 커피를 내게 내밀었다.
“람베르토한테 졸라서 겨우 가져온 거야, 마셔.”
“응.. 고마워.”
하지만 아까의 일에 다시 한 숨이 나오며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떡하지..’
첫 키스를 빼앗겼다. 그런데 왜 자꾸 페르티안의 얼굴이 떠오르는지 마치 열심히 누군가를 위해 지켜온 것이 부서진 것 같은 느낌에 나는 기분이 축 쳐지는 것을 느꼈다. 지키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화남과 함께 이상하게도 미안한 마음이 커져갔다.
‘뭐지..’
모르겠다. 이 감정이 무슨 감정인지. 다만 너무 속상해서 그 좋아하는 커피도 넘길 기분이 아니었다.
“왜 그래? 아까 뽀뽀해서 그래? 쩝쩝..”
이 무감각한 녀석, 누나는 이렇게 힘들어 하는데 뇨끼가 입에 들어가냐?
“나도 뽀뽀한 적 있어. 번화가 뒤편에 있는 잡화점 있지? 거기 마리랑 했는걸.”
그래, 좋겠다 녀석아. 나는 또 다시 떠오르는 아까의 기억에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던 그 때, 샤를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키스는 안 된데, 뭐라더라?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하고 해야 한다나 뭐라나..”
와락!
“켁켁!! 누.. 누나..?”
이 자식, 역시 내 동생이구나. 나는 기특한 발상을 한 샤를의 몸을 꽈악 끌어안고는 ‘이구 이쁜 것’하며 내 볼을 녀석의 볼에 뭉개 비비기 시작했다.
“누.. 누나.. 나 뇨끼 오.. 올라와.. 그.. 그만.. 그만..”
‘그래, 뽀뽀와 키스는 다른 거야!’
나는 명쾌한 해답을 준 샤를의 머리를 쓰담아 주고는 그제야 커피를 입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직 지켜진 내 첫 키스에 나는 가슴을 피며 외쳤다.
“난 떳떳하다!!”
* * *
어두운 하스코브 외곽, 야음을 틈타 침입해온 토르디에르 반군 1만과 올만의 3만 병력이 프러겔 주둔지가 내려보이는 언덕 반대편에 숨어 있었다.
“세작(細作)의 보고대로군.”
“화약고를 불태워 신호를 보내겠다 했으니, 기다려 보시지요.”
“흥, 프러겔 놈들 지금쯤 테르디네 항을 지켰다고 기뻐해 하겠지?”
토르디에르 독립파 수장인 카로이 백작의 아들 바실레스는 저번 전초전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테르디네 항을 공격하는 척 하스코브를 야습하는 양동작전을 펼쳤다. 어설프게 공격하면 적이 속지 않기에 올만의 ‘나자미 자디드’란 큰 미끼로 적을 유인했던 것이었다.
그 결과, 샤벨리아란 대어(大漁)가 자신의 미끼에 낚여 항구로 떠났고 세타 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페르티안 마저 2만의 예비대를 이끌고 이 곳 하스코브를 떠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멍청한 것들, 고작 항구 하나 때문에 이 큰 걸 버리고 가다니.”
바실레스는 자신의 작전에 보기좋게 당해버린 둘을 생각하자, 자꾸만 웃음이 입가에 피어올랐고 마치 승리를 한 듯 망원경을 들어 조용한 하스코브를 바라보았다.
피유우 – 콰과과광!!
그 때였다. 하스코브 세곳에서 일제히 큰 폭발과 함께 거대한 창고가 불타 오르는 것이 보였다.
“신호다! 전군 공격해라!!”
“공격하라!!”
뿌우우우 -
“와아아아!!”
바실레스의 명령에 진격의 고동소리가 울렸고, 어둠속에서 웅크려 있던 반군과 올만군은 일제히 몸을 일으켜선 엄청난 함성과 함께 작은 모닥불이 드문드문 모여 밝은 프러겔 야영지로 돌격해 들어갔다.
엄청난 숫자로 돌격해 오는 적의 모습에 보초를 서던 프러겔 보병들은 싸울 의지조차 잃었는지 급히 하스코브 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하하! 어리석은 것들!! 도망쳐도 이미 늦었다!!”
두두두두 -
성공적인 야습에 한 쪽편에 대기하고 있던 올만의 실라자르 경기병대가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야영지 측면을 가로질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프러겔 군의 야영지가 적에게 휩싸이며 무너지던 그 때, 텐트를 찢으며 적을 찾아 공격해 들어갔던 병사들은 프러겔의 진지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바실레스님, 프러겔 진영이 비어있습니다.”
“뭐?! 비어 있다니? 잘못 본 것이..”
삐이이익.
야영지가 비어있다는 보고에 당황하던 그 때,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어두운 천으로 포신을 가리며 어둠에 숨어 있던 프러겔의 포병대가 돌격해 들어오는 실라자르 경기병대를 향해 천을 걷고는 붉은 불꽃을 터트리며 무차별적으로 포격을 하기 시작했다.
콰과과광 -!!!
히이잉 -
“아아아악!!”
엄청난 산탄과 함께 기병대를 휩쓴 포탄은 실라자르 경기병대를 관통하며, 마치 추수가 끝난 밀처럼 우수수 땅으로 떨어트렸다.
투두두두두 -
스릉.
“적이 사격범위 안에 들어왔다! 공격!!”
“1열 발사!!”
파바바바방 -
“끄아아악!!”
일부러 야영지를 밝게 한 것일까, 야영지 외곽 어둠속에 숨어있던 프러겔 보병연대는 어두운 곳에 있는 자신들을 못 찾는 반군과 올만군을 향해 무자비한 총탄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2열 발사!!”
파바바바방 -
하켄과의 전투에서 습득한 순차 사격은 적에게 도망갈 틈조차 주지 못할 만큼 계속해 적을 쓰러트렸고, 그 모습을 반대편에서 지켜보던 바실레스는 믿을 수 없단 든 말고삐를 쥔 자신의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떻게.. 어떻게 내 계책을..”
분명, 화약고도 불탔고 적의 주력도 하스코브 밖으로 떠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 왜 자신의 야습을 미처 알았단 듯 함정을 파 기다렸단 말인가? 바실레스는 이 모든 상황이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다.
타앙 -
“바실레스님! 크아악..!!”
어둠 속에 날아온 총탄 하나가 바실레스를 정확히 노려 들어왔고, 멀리서 터지는 불꽃을 본 부관이 넋이 나간 바실레스를 감싸 대신 맞으며 땅으로 떨어졌다.
‘..!’
놀란 그가 말머리를 돌려 총탄이 날아온 곳을 보자, 하스코브를 나갔다던 페르티안의 예비대가 자신의 군 측면을 포위하며 천천히 진격해 오는 것이 보였다. 다 쓴 플린트 락을 거두며 새로운 플린트 락을 부하에게 받아 쥐는 붉은 머리 장교 옆으로 백마를 몰고 오는 화려한 제복을 한 남자, 바로 세타 강의 기적 페르티안이었다.
바실레스는 분노에 찬 눈동자로 자신의 말채찍을 쥐어잡아 부들부들 떨며 가증스런 녀석을 향해 피가 끓는 증오의 목소리로 작게 으르렁거렸다.
“이 놈.. 페르티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