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30. 신성 프러겔의 이름으로
[ 30. 신성 프러겔의 이름으로 ]
기병 15,000명, 포수 12,000명, 보병 43,000명이 동원된 토르디에르 원정군은 왕도(王都) 크리스티네를 떠날 채비를 마쳤다. 거기에 청창(靑蒼)의 칠망성이라 불리는 몰트겐 후작의 정예 씰 일곱이 참전할 정도로 할배의 의욕은 대단했다.
나 또한 리니를 위시한 친위대 360명을 페르티안의 근위대로 편성하고, 발슈테인은 참모부관으로 폰과 헤인리 그리고 페리츠를 본대가 아닌 페르티안의 예비대로 배치시켰다. 장교편성은 몰트겐의 권한이었지만, 유능한 장교를 어이없게 잃고 싶지 않았기에 나름 월권을 행사한 셈이었다.
그렇게 통합력 1745년 9월 올만 성국과의 제2차 남부전쟁이 시작되었다.
“나도 갈래!!”
번화가의 테러로 한 순간에 동생들을 잃은 샤를이 작은 짐을 맨 모습으로 나와 페르티안에게 다가왔다.
“집에나 있어.”
나는 말에 올라타며 녀석의 말을 가볍게 묵살했고, 그렇게 앞을 나아가려던 그 때였다.
“나도 데려가!!”
히이잉 -
갑작스레 뛰쳐나온 녀석의 모습에 난 급히 말고삐를 당겨 말을 멈췄고, 녀석이 다쳤을까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 앞을 보자 꽤나 고집스런 표정으로 내 앞길을 가로막으며 서있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미쳤어?! 다쳤으면 어쩔 뻔 했어?!!”
“그러니까 데려가!!”
마들린이 씻겨서 꽤나 깔끔해진 녀석은 꼬질했던 머리는 금발이 찰랑였고, 소고집처럼 억센 눈동자는 나와 같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네가 가서 뭘 할 건데?!”
“뭐든 할게! 포탄을 나르라면 나르고, 식량포대를 옮기라면 옮길게!!”
녀석이 뭐라하든 난 전쟁터에 아이를 데려갈 생각이 없었다. 포탄? 식량포대? 웃기지 말라고 그래라, 아이는 아이답게 자라야 한다.
“시끄럽고, 집에서 기다려! 마들린!!”
녀석의 고집만큼 나도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었기에 나는 나와 페르티안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마들린에 눈짓을 했고, 그녀는 알겠단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치며 발버둥치는 녀석을 저택 안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나도 간다고!! 이 바보!! 마녀!! 왕국 제일 성격파탄녀야!!!”
빠직.
저 자식, 마지막은 진심인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12년 인생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욕과 저주를 내게 쏟아부었다.
“샤벨리아, 저렇게 원하는데 데려..”
“안 돼! 내가 안 된다 했어.”
페르티안의 말에 나는 내가 죽으면 죽었지, 애를 데려갈 수 없단 표정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몰았다. 그러자 페르티안은 할 수 없단 듯 작게 한 숨을 내쉬곤 말을 몰아 나를 따라왔다.
출발하기로 약속한 오전 6시, 몰트겐 후작을 위시한 대 원정군은 엄청난 행렬을 이루며 토르디에르 독립파와 올만 성국의 공격을 받아 빌헬미네 요새로 후퇴한 루트비히 남작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을 서둘렀다.
“페르티안 준작, 내 씰들은 처음이지? 직접보니, 어떤가?”
몰트겐은 꽤나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하나같이 선남선녀인 자신의 씰들을 가리켰고, 페르티안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과연 청창의 칠망성이란 이름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네요.”
“하하하하!! 그렇지!! 암, 그렇고 말고!!”
초급 프러겔 장교복을 입은 그들은 A급 씰인 듯 무표정한 얼굴로 몰트겐을 따라 몰을 몰고 있었다. 나는 호탕하게 웃는 몰트겐의 모습에 ‘놀고 있네’란 표정과 함께 고개를 돌리며 이번 카블로보츠 지역에서 징집되어 올라온 기병대를 바라보았다.
붉은 모자에 짙은 녹색 상의와 붉은 바지를 입은 카블로보츠의 후사르들은 헤인리의 헤르미안 유격대처럼 프러겔인이 아닌 카블로보츠의 유민들로 이루어진 독립 경기병대로써 명성보단 그 악명이 자자했다.
말의 산지인 카블로보츠 출신답게 기마술이 출중한 그들이었지만, 프러겔 주류가 아닌 그들에게 있어 전쟁은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닌 지역 생계수단이자 또 하나의 돈벌이었기에 뛰어난 전투력에 비해 통솔이 안 된다는 점이 큰 단점이었다.
그런 그들을 이끄는 건 카블로보츠 귀족 출신인 뤼헬 폰 비슈골츠 중위였다. 짙은 갈색머리에 초록색 눈동자를 한 그는 꽤나 익살꾼인지 사교성 하나만큼은 대단한 남자였는데, 다른 민족 출신임에도 이미 프러겔 중급장교들과 안면을 튼것인지 꽤나 활발히 대화를 하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저리 보여도 꽤나 여우같은 자이니 조심하십시오.”
내 곁에서 말을 몰고 가던 발슈테인이 뤼헬이 마음에 들지 않는단 듯 작게 속삭이며 그를 바라보던 그 때,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가 만면에 미소를 띠우며 말을 몰아 다가왔다.
“왕국의 제1성이신 샤벨리아님을 이렇게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보아하니 저 깐깐한 발슈테인 중위가 제 흉을 봤나 보죠?”
“깐깐하게 아니라, 군수품 도둑을 경계하는 겁니다.”
‘살벌하군..’
평온한 듯 평화롭지 않은 둘의 신경전에 나는 난처하게 됐단 표정을 지었고,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본 헤인리가 말을 몰아 다가왔다.
“흥, 누군가 했더니 카블로보츠의 땅거지군.”
“응? 왠 촌뜨기가 말을 거나 했더니, 헤르미안의 촌놈 아닌가?”
발슈테인 못지않게 헤인리와도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지 뤼헬은 능글맞은 미소와 함께 그의 시비를 맞받아쳤고, 헤인리는 그런 녀석이 역시나 마음에 들지 않는단 듯 자신이 입은 프러겔 장교복을 은근히 자랑하며 말을 이었다.
“여기저기 구걸하러 다니느라 소식이 늦은 것 같은데, 우린 네 놈들과 달리 꽤나 큰 공적을 올려서 말이지.”
“꽤나 운이 좋았나 보군, 우리가 대신 세타 강에 있었다면, 강을 건너려던 하켄 놈들 따윈 우리 말발굽에 짓이겨졌을 텐데 말이야.”
뤼헬은 자신의 기병대에 꽤나 자부심이 있는지 헤인리의 장교복 따윈 부럽지 않단 듯 자신의 카블로보츠 고유의 장교복을 들어보이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 말은 카블로보츠의 기병대가 하켄의 북방 기병대보다 뛰어나단 말로 들어도 되지?”
내 물음에 뤼헬은 씨익 웃더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켄 놈들이 아무리 저희를 흉내낸다 해도 결국엔 아류일뿐, 제가 이번 전쟁에서 카블로보츠의 기병대가 무엇인지 보여드리겠습니다.”
야망이 느껴지는 녀석의 눈동자에 작게 미소를 지은 난 녀석을 응시하며 말했다.
“난 말뿐인 녀석은 싫어해, 뤼헬 중위. 어디 기대해 보겠어.”
“바라던 바입니다.”
프러겔 왕국에서도 비주류 중에 비주류라는 페르티안과 내 출신 때문일까, 프러겔의 많은 독립부대 출신들 사이에서 우리에 대한 소문 또한 퍼지고 있었다.
떠오르는 프러겔의 신성이 자신들처럼 비주류라 할 수 있는 평민출신 귀족과 듣도 못한 A급 출신의 제1성 이었으니까 말이었다. 능력만 있다면 출신은 상관없었다. 페르티안도 나도 자랑스러운 배경 따윈 일절 없는 무일푼들이니까.
* * *
어스름한 저녁, 프러겔의 왕도 크리스티네에서 멀지 않은 항구 ‘레니에카’에선 베르니아 공국의 범선 3척이 바다를 가르며 들어오고 있었다.
드르륵 – 쿵!
“시간이 없다! 3시간내로 출발한다!!”
닻을 내린 공국의 배들은 미리 보급품을 준비해 대기하고 있던 프러겔 선원들의 도움을 받아 물자를 배로 옮기기 시작했고, 거대한 그들의 배 안쪽엔 무수한 포대들이 정갈히 선적되어 있었다.
붉은 바탕에 황금빛 사자상이 그려진 베르니아 공국기 아래로 긴 흑발에 짙은 갈색의 눈동자를 한 훈남 하나가 자주빛 제복차림으로 해로가 그려진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프러겔 원정군은?”
“계산이 맞다면, 토르디에르로부터 이틀거리일 겁니다.”
“생각보다 행군속도가 빠르군.”
“걱정마십시오, 지금 속도라면 원정군보다 토르디에르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마성의 외모를 가진 그는 베르니아의 흑사자이자 전율(戰慄)의 화염이라 불리는 포술의 대가 주세페 가르디오르였다. 프러겔 왕국의 의뢰를 수락한 그는 자신의 용병단을 이끌고 하루 전 출발했다는 원정군 뒤를 쫓아 토르디에르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국에서 가져온 포들의 무게가 상당한 탓에 배로 이동하고 있음에도 생각보다 이동속도가 늦었고, 만나기로 한 기일을 맞추기 위해선 꽤나 촉박하게 움직이여야 했다. 용병에게 있어 의뢰주와의 약속은 절대적인 신뢰이자 자신들의 명성에도 연관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도 유능한 부관 람베르토의 지휘 덕분에 가르디오르의 용병단은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보급품을 실을 수 있었고, 이윽고 닻을 올린 그들의 함선은 유유히 레니에카를 떠나 토르디에르로 출발할 수 있었다.
“람베르토, 다시 한 번 포대과 화약들을 점검해라. 오늘 따라 습기가 심한 것 같군.”
“알겠습니다.”
가르디오르의 명령에 람베르토는 용병 2명과 함께 창고 곳곳에 숯과 횟가루, 그리고 모래와 소금을 섞어 만든 천연 제습통들을 확인하기 시작했고, 소기름을 먹인 종이에 감싸진 화약들 또한 일일이 확인하며 혹시 모를 미작동에 대비하려 했다.
아무리 마력탄이 그 위력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것을 발사해 날리는 것은 결국 화약이었기에 그들에게 있어 화약관리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렇게 창고 곳곳을 점검하던 그 때였다. 소량이었지만, 제습통에서 흘린 듯한 숯가루와 모래 조금이 밧줄에 묶여 고정된 바닥 아래로 흘러 떨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윽.
배에 몰래 숨어들어 자신들의 기술을 빼돌리려는 여러 왕국의 첩자들이 많았기에 람베르토는 부하들에게 수신호를 보내고는 조심스레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자기 딴엔 잘 숨었다고 생각했겠지만, 매의 눈이라 불리는 람베르토에게 있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흔적을 따라 창고 구석 커다란 화약통 뒤에서 들리는 숨소리에 약속이나 한 듯 장전된 플린트 락을 들어 양쪽에서 겨눈 부하들에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단검을 고쳐 잡고는 순간적으로 몸을 날려 화약통 뒤로 뛰어 들었다.
“아아악!!”
‘..!’
창고가득 울리는 어린아이의 비명, 람베르토는 창고 구석에서 놀라 손을 번쩍 든 첩자의 정체에 일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꼬.. 꼬마?”
금발에 귀여운 푸른 눈동자를 한 소년이 목 근처까지 날아가 멈춘 자신의 단검에 파랗게 질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 살려주세요!!”
샤를, 그랬다. 그 앙큼한 첩자의 정체는 다름아닌 샤벨리아가 저택에 두고 갔던, 샤를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