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27. 백야(白夜)의 플로헤타
[ 27. 백야(白夜)의 플로헤타 ]
아침의 악몽도 잠시, 이제야 좀 편하게 쉴 수 있을까 싶던 그 때 내 눈앞에서 해맑게 손을 흔드는 플로헤타의 모습에 ‘신이시여 제발’이란 표정으로 난 절규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무슨 바람인지, 그녀는 자신의 시종 밀로와 함께 저택 앞까지 찾아와서는 내게 번화가로 놀러가자고 칭얼거렸다.
“샤링~, 네? 같이 가요~.”
대체 나보고 가서 뭘 하란 말인가? 전생에 친구랑 했던거라곤 지하 PC방에서 라면 먹으며 게임을 한 것이 전부인 나에게,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 같았다.
“내가 있지.. 오.. 오늘 좀 바쁠.. 아니 바빠서 말이야.”
저 눈을 보면 안 된다. 사람 마음 약해지게 하는 저 눈동자를 응시하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또 허락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거짓말! 나랑 놀러 가려고 이렇게 예쁘게 차려 입었으면서!”
플로헤타 말이 맞았다. 아침에 있었던 대참사 이후, 나는 제 발로 마들린에게 갔고,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단 사악한 미소와 함께 나를 방으로 끌고가 이 꼴로 만든 것이었다.
어깨가 들어난 흰색의 드레스 곳곳엔 작은 푸른 리본이 앙증맞게 달려 있었고, 치마 단은 조금 짧았지만 단 위로 둘러진 푸른 레이스는 드레스에 포인트를 주며 내 푸른 눈동자와 매치가 되었다. 게다가 목과 허리에도 둘러진 푸른 리본은 꽤나 나를 부담스럽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마들린은 내 머리 양 쪽에도 흰색 리본을 귀엽게 달아주었는데 모든 치장이 끝난 내 모습은 정말 인형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언짢은 나와 달리 마들린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감탄을 내뱉으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왕도에서 샤벨리아님과 미모를 견줄 수 있는 분이 있다면, 그것은 플로헤타님 밖에 없으실거에요!!”
말이 씨가 된다고, 그 미모를 견줄 수 있는 분께서 친히 우리 집에 오셨단 말이다. 게다가 멀리서도 눈에 띌 정도로 아름답게 꾸민 그녀는 무시할래야 무시할 수 없는 엄청난 존재감을 빛내고 있었다.
“흠.. 제법이군.”
게다가 그녀의 시종이란 놈은 오랜만에 적수를 만났단 듯 내 드레스를 보며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플로헤타는 이제는 내 팔을 잡아 늘어지며, 나가자 조르기 시작했다.
“너, 작정하고 왔지?”
“네? 무슨 말인지..”
날씨가 좋아 나온 김에 마침 우리 집이 보여 왔다는 그녀치고는 꽤나 그 의도가 꽤나 불온했다. 게다가 내 눈동자를 슬금슬금 피하는 것을 보건데 이건 백퍼센트였다.
게다가 앙증맞은 핸드백이 무거워 보일정도로 묵직한 것이 돈을 얼마나 챙겨왔는지 스스로도 힘들어 낑낑거리고 있었다.
비단 핸드백 뿐이랴, 옷차림 또한 아주 나들이 차림으로 힘을 주고 왔는데 흰색과 배색된 연한 노란색의 드레스는 마치 봄날에 핀 하나의 꽃처럼 산뜻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거기에 옆으로 멋들어지게 쓴 챙이 넓은 모자는 귀엽게 턱아래로 노란 리본으로 묶어 그녀의 작고 예쁜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번화가에 가면 예쁜 것도 많고, 볼 것도 많데요!”
‘그건 네가 좋아하는 거겠지..’
쇼핑의 쇼자도 관심이 없던 나였기에 나는 ‘어 그러셔’란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쳐다보았고, 위기의식을 느낀걸까, 플로헤타는 마치 구연동화를 하듯 내게 손짓발짓 하며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연합왕국에서 온 상인하나가 아이스크림이란 걸 가져왔는데, 엄청 맛있데요! 궁금하죠? 궁금하지 않아요?”
“나 차외엔 입도 안대는 거 몰라?”
오리지널인 그녀와 달리 난 음식도 잠도 안자기에 그녀의 말에 전혀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스크림이라면 예전 집 근처 마트에 가면 천원에 세 개씩 먹을 수 있었다.
“번화가에.. 그러니까..”
나를 설득할게 별로 없는지 플로헤타는 이제는 울기 직전의 표정으로 울먹이기 시작했고, 나는 안타깝지만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절호의 기회란 생각에 어깨를 짚으며 말을 하려던 그 때였다.
“올만 성국의 상인이 커피라는 것을 가져왔다는데, 그 맛이 아주 오묘하답니다.”
“..!”
‘커..피..라고..?’
지갑에 돈은 없어도, 무수히 찍힌 도장들과 별들, 그리고 내 삶을 지탱해 주었던 쿠폰들이 몇장이었던가? 엄청난 커피 애호가로서 단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곳에 커피가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커피가 있다는 말에 나는 흥분된 표정과 함께 밀로를 바라보았다.
“커피가.. 있다고?”
“네, 색은 검지만 그 맛이 아주 독특해 이국(異國)의 흑차라 불리지요.”
오 마이 갓, 지저스 크라이스트. 나는 플로헤타에게 ‘여기서 딱 기다려.’란 말과 함께 저택으로 달려갔고, 곧장 페르티안 방에 있는 금고문을 열고는 허겁지겁 핸드백에 금화를 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마들린이 경악을 하며 내게 소리를 질렀다.
“샤벨리아님!! 지금 뭐하시는 거에욧?!!”
사람이 너무 간절하면 눈에 뵈는 것이 없다 했던가? 나는 흥분에 찬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마들린, 내가 이거 배로.. 아니 그 백배로 기가막힌 걸로 쫘악 바꿔 올게, 나 믿지?”
* * *
“우우..”
다그닥 다그닥.
화창한 햇살 아래로 크리스티네 대로는 여러 마차들로 북적였다. 그리고 거기엔 나와 플로헤타가 탄 화려한 마차도 있었다.
“샤링, 많이 아파요?”
머리에 크나큰 혹 하나가 생긴 나는 눈물을 짜며 머리를 쥐고 있었고, 플로헤타는 그런 날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악마! 힘만 지지리도 쎈 마귀할망구!!’
페르티안의 금화를 쓸어 담던 난, 그 자리에서 마들린에게 응징을 당했고 울며 플로헤타 앞으로 끌려온 나는 마들린에게 고작 받은 것이라곤 금화 하나가 전부였다.
하지만 더 악마같은 건, 내게 거스름돈을 남겨오란 것이었다. 두둑한 플로헤타의 핸드백을 비교해 내 핸드백은 못 먹어 영양실조에 걸려 쓰러지기 일보직전으로 홀쭉하다 못해 가련해 보였다.
“걱정마요, 샤링. 내가 많이 사줄게요.”
플로헤타는 힘내란 듯 양 손을 쥐며 내게 ‘아자’했고, 나는 첫 나들이부터 비교되는 내 지갑에 우울할 뿐이었다.
히이잉 -
“다 왔습니다.”
밀로의 말에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시장통으로만 생각했던 내 상상과 달리, 번화가는 잘 정비된 길과 함께 고풍스럽게 세워진 건물 사이로 거대한 아치모양의 지붕이 거대한 유리창과 함께 햇살을 안으로 비추며 저 멀리까지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번화가라 보기보단.. 백화점이잖아..’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차에 내려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플로헤타는 흥분에 찬 목소리와 함께 내 손목을 잡으며 번화가 안쪽으로 날 당겼다.
“샤링, 빨리요! 어서 가요!!”
“응..? 으.. 응.”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생각한 나였지만, 내가 본 것은 극히 일부분이었을 뿐 나는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화려하면서 여러 가지 물건을 파는 번화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깄습니다.”
“와!!”
“그리고 이건 예쁜 아가씨들을 위한 서비스!”
‘헤에..’
플로헤타가 말한 그 아이스크림 가게에 도착한 우리는 줄을 서 아이스크림을 살 수 있었고, 가게 주인은 나와 플로헤타의 모습에 얼굴을 붉히더니 다른 이들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핫핫핫! 다음에도 또 와요!”
기뻐하는 플로헤타와 달리 나는 혼자서 먹기도 버거운 아이스크림에 질린단 표정으로 곤란해 했다. 그렇게 번화가를 지나가던 그 때였다. 화려한 이면 속에 어두운 명암이 함께 있듯 언뜻 평화롭고 별천지인 이곳에도 부랑자들은 있었다.
그것도 아직은 어려보이는 소년, 소녀들이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더러운 골목에서 숨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쟤들은 뭐야?”
나는 궁금증에 플로헤타와 내 물건을 들고 따라오는 밀로에게 묻자, 그는 흔한 광경이란 듯 내게 말했다.
“전쟁고아들입니다.”
“전쟁고아..?”
“네, 대부분 고아원 출신으로 근처 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소년, 소녀공들이죠.”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시커먼 손과 발이며 다친 듯 붕대에 감긴 팔 다리를 보니 꽤나 가혹하게 일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샤벨리아님?”
왜 일까? 나는 그들의 모습에 이전 죽도록 일만 했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렇게 번화가를 벗어나 그들에게 다가간 나는 경계하며 뒷걸음질 치는 아이들에게 내가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건네며 말했다.
“먹을래?”
벌써부터 세상에 대한 경계심이 생긴걸까, 아이들의 눈은 내 아이스크림에 있었지만 선뜻 손을 내밀어 받질 못했다.
“괜찮아, 언니는 먹고 싶어도 못 먹어.”
“네..? 왜.. 왜요?”
남동생 손을 잡고 나를 바라보던 꼬마 여자애가 내 말에 놀라며 물었다.
“언니는 씰이거든. 자, 받아.”
그러자 여자애는 서먹한 몸짓으로 손을 내밀더니 내게서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그리고 예쁘게도 그것을 남동생에게 먼저 주며 맛보이는 것이었다.
‘에구.. 기특한 것..’
나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고, 또 다른 한편으론 가슴 한 켠이 안쓰러웠다.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다른 아이들과 나누며 먹는 것을 지켜보던 그 때였다.
“우리가 거지야?! 누가 이딴 거 받으래?!!”
“샤.. 샤를..”
네 다섯 되는 아이들의 대장인지 열두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 하나가 아이들이 먹던 아이스크림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내 앞에 던지는 것이었다.
그리곤 아이들을 뒤로 숨기고는 내게 막대기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리 안 꺼져?! 또 누굴 데려가려고!!”
‘데려가..?’
녀석의 말에 어이가 없는 나였지만, 녀석은 꽤나 적개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어림도 없단 듯 막대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꺼져! 저리 꺼지라고!!”
자기 딴에는 꽤나 위협을 준다 휘두르는 것이였겠지만, 내게 있어 그저 어린아이 재롱 수준일 뿐, 나는 녀석의 막대기를 피하며 살며시 발을 내밀었다.
쿠웅!!
아직 어린아이인 녀석은 그대로 균형을 잃으며 앞으로 넘어졌고, 나는 녀석이 놓친 막대기를 주워 그대로 머리 한 대를 때려주었다.
딱!
“아악!”
“너 누가 이런 위험한 거 휘두르래?”
“흥! 그건 당신이 알바 아니잖아!!”
그렇게 말한 녀석은 씩씩 거리며 내게 달려들었고, 나는 녀석의 돌진을 가뿐히 피하며 이번엔 어깨, 허리, 엉덩이, 종아리를 아주 찰지게 때려주었다.
따다다닥!
“아아악!!”
녀석은 꽤나 아픈지 온 몸을 부여잡고 뒹굴거렸고, 나는 회초리로 변한 막대기를 만지작 거리며 녀석에게 말했다.
“쪼그만게 어딜.. 내 한 번 봐줄테니, 누나 잘못했어요. 해봐.”
“씨익.. 씨익.. 웃기고 있네! 꼴에 예쁘장하다고 훈계하기는!!”
빠직.
뭐? 꼬.. 꼴에? 내 어린애라 적당히 봐주려 했건만, 아주 건방진 꼬마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화사한 미소와 함께 떨리는 입술로 녀석에게 말했다.
“우리 한 번 원숭이 엉덩이 만들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