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26. 백야(白夜)의 플로헤타
[ 26. 백야(白夜)의 플로헤타 ]
좋은 집에서 일어나면, 몸이 이렇게 상쾌한 것일까? 나는 기분 좋은 기지개를 켜며 밝게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외쳤다.
“이야 – 태양 한 번 죽이네!”
“샤.벨.리.아님.”
“으.. 응..?”
이 긴장감, 아주 오래전에 잊었다 생각했건만 뒤에서 들려오는 중년여성 목소리에 난 얼어붙은 모습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조..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요?”
“아.. 아닌가..?”
사람에게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언제일까, 나는 내 허벅지보다 굵은 그녀의 팔뚝을 바라보며 침을 삼키며 눈치를 보았다.
우리 저택에 새롭게 메이드장으로 고용된 마들린은 메이드 50년 인생의 산 증인이자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섭렵한 메이드계의 대모였다. 무슨 화차를 씹어 먹었는지 목소리며 박력이 아주 웬만한 남자 열 명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대단한 여자였다.
사실 그녀는 엘렌 백작가의 사람이었는데, 엘렌 공이 페르티안과 나의 축하금 대신 그녀를 소개시켜 주었고 정말이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일하나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단 한가지, 단점이라면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는 점이었다.
“아니! 잠도 안 주무시는 분이 무슨 이부자리를 이렇게 험하게 어지럽히시는 거에요?!”
“윽..”
“그리고! 다 큰 아가씨가 옷이면 옷! 속옷이면 속옷! 이리저리 퍼트리고 다니시기나 하고! 대체 언제쯤이면 철이 드실 겁니까?!”
아침부터 시작된 그녀의 잔소리에 난 목이 눌린 자라마냥 쭈구리가 되어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에휴! 와봐요!!”
“왜.. 왜?!”
“오라면 쫌 와요!!”
뭔 힘이 이리 쎄? 나는 그녀에게 잡혀선 질질 끌려갔고, 마들린은 물을 묻힌 수건으로 내 입가를 박박 그것도 아주 씨게 문대며 잔소리하기 시작했다.
“침대에서 또 차드셨죠?!”
“와니인 데에?(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여기 히비스커스 티 자국이 한 가득인데?!!”
“아화(아파)! 아화아아(아파)!!”
거대한 고릴라에게 헤드락이 걸린 것 마냥 나는 그녀의 품에서 퍼덕퍼덕 거리며 발버둥을 쳤지만, 입가가 얼얼할 정도로 문대진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허억.. 무.. 무서운 여자야..’
그렇게 한 고비가 넘어가나 싶었지만, 그게 끝이 아닌 듯 그녀가 내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
“일어나세요!”
“왜.. 왜 또?!”
“왜 또 라뇨?! 그럼 안 씻으실 거에요?!”
그 말과 함께 나를 잡아당긴 그녀는 욕실로 가기 시작했고,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욕실로 가지 않으려 했다.
“나 혼자 할 수 있어! 나 혼자 할 수 있다고!!”
“호오.. 이 마들린을 상대로 힘을 준다니, 대단한 배짱이시군요.”
“안.. 간.. 다.. 고!!”
끌려가면 끝장이다. 내 몸을 누군가에게 맡기기엔 난 아직 준비가 안됐다.
“잔.말 말.고 따라 오세요!!”
휘익.
‘..!’
신이시여, 저게 정녕 인간의 힘이 맞습니까? 버티는 나를 아주 간단히 잡아당긴 그녀는 깔끔하게 딸려온 나를 도망 못 치게 잡고는 그대로 욕실 문을 뒷발로 닫아버렸다.
“흑.. 흑..”
“다 닦여 놓으니까, 왜 또 울고 그래요?”
‘장가 다 갔어.. 나 장가 다갔다고!’
욕실로 끌려가, 온 몸 구석구석을 능욕당한 나는 화장대 앞으로 끌려와 눈물을 질질 짜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단 듯 내 머리칼을 빗어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어때요? 머릿결이 훨씬 예뻐졌죠?”
마들린은 나를 꾸미는게 행복한지 찰랑찰랑 거리는 내 황금빛 머리칼을 보여주며 호들갑을 떨었다.
“흥, 이쁘던지 말던지..”
하지만 욕실 일로 삐져있던 난 입을 대빨 내밀고는 틱틱거렸고, 그 순간 내 등 뒤로 강 스매쉬 한 대가 내리쳐졌다.
짜악!
“아우욱!!!”
“이쁘게 보여야죠! 이렇게 귀염성이 없어서야, 어느 남자가 좋아하겠어요?!”
무슨 손에 폭탄이라도 장착했나? 나는 비명도 나오지 않는 고통에 등을 비비며 몸을 비틀었고, 그녀는 지체할 시간이 없단 듯 손바닥을 치며 화장을 도와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다른 메이드들을 불렀다.
“뭐.. 뭐야? 대체 뭐하려고?!!”
“뭐긴요, 화장이죠.”
“하지마! 내가 하지 말라고 했어!!”
구석에 몰린 쥐마냥 반항을 해보지만, 마들린은 어림도 없단 콧방귀와 함께 간단히 나를 제압하고는 갖가지 화장품을 든 메이드들에게 말했다.
“시작하지.”
* * *
귀족들이 모여 사는 마르가레타 거리가 보이는 정원 벤치에서 페르티안은 새로운 집사장인 슈바이크가 건넨 홍차를 한가로이 마시고 있었다.
“온도는 어떠십니까?”
“최고에요.”
“허허, 감사합니다.”
베르텡 후작이 축하금 대신 보낸 슈바이크는 꽤나 연륜있는 집사로 베르텡 후작가의 집사장이었만, 자신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는 이곳 퓌러슈타트 가(家)에 온 것이었다.
반듯이 넘긴 흰머리와 고풍스런 흰 수염은 깔끔한 그의 성격을 대변했고, 곧은 허리와 강직함이 느껴지는 얼굴은 인자함과 함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느끼게 했다.
하지만 여유도 잠시, 저택 입구가 왁자지껄 하더니 샤벨리아가 뛰쳐나왔다.
“샤벨리아님!!!”
“싫어! 싫다고!!”
옷을 입다 나온 것일까, 흰색 브라우스에 군복 바지 차림의 그녀가 날렵한 움직임으로 마들린의 손을 피하며 페르티안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응..?”
그렇게 페르티안에게 달려온 그녀는 그의 뒤에 숨고는 마들린에게 외쳤다.
“안 입어! 안 입는다고!!”
“좋은 말할 때 나오세요. 안 그럼 힘씁니다?”
쥐구멍에 숨어든 쥐마냥 나는 좋은 방패인 페르티안의 뒤에서 농성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무리 드센 마들린이라 할지라도 이 저택의 당주 앞에서 함부로 할 순 없을 테니까 말이다.
“무.. 무슨 일이야?”
녀석은 자신을 두고 이리 돌고 저리 돌며 신경전을 펼치는 우리 둘의 모습에 난처하단 듯 물었다.
“마들린이 자꾸 여자애 옷을 입으래잖아!”
“이게 어때서요?! 빨리 안 오실꺼에요?!!”
어느정도 사태를 파악한 걸까, 페르티안은 자신의 셔츠를 꼬옥 쥔 채 마들린을 주시하는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마들린, 샤벨리아는 내가 얘기해 볼게요.”
“페르티안님, 그렇게 모든 응석을 받아주시면 안 되세요!”
“하하, 제가 잘 타일러 볼 테니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대쪽같은 마들린도 그의 말엔 어쩔 수 없는지 내게 ‘이따 방에서 봅시다’란 표정으로 날 노려보고는 저택으로 돌아갔고, 나는 겨우 그녀의 마수에서 벗어나 안도의 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옷 예쁘던데, 한 번 입어보지.”
“뭐? 미쳤어? 내가 왜?”
난 때려 죽여도 못 입는단 듯 완강히 고개를 저었고, 녀석은 그럴 줄 알았단 듯 바보같은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한바탕 아침운동 아닌 운동을 해서 그런지 더워 브라우스를 펄럭이던 난 녀석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왜?”
“으.. 응? 아.. 아니야.”
왜, 얼굴은 붉힌데? 나는 내 얼굴을 마주보지 못하는 녀석의 모습에 ‘얘가 뭘 잘못 먹었나?’하며 계속 시선을 마주치려 하자 녀석의 얼굴은 붉다 못해 터질 정도로 빨개졌다.
“왜 그런데? 야! 왜 똑바로 못 쳐다봐?! 너 지금 나 무시하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 시선을 피하는 녀석에게 울컥하려던 그 때, 곁에서 지켜보던 슈바이크가 내게 속삭였다.
“그만하시죠, 샤벨리아님.”
“응?”
“그리 계속 괴롭히시다간, 주인님께서 심장마비로 쓰러지실 겁니다.”
‘괴롭혀? 내가?’
뭔 소리냔 듯 슈바이크를 쳐다보자, 그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주인님께서 샤벨리아님의 화장한 모습이 아름다우신가 봅니다.”
‘뭐..? 진짜?’
정말이냔 듯 녀석을 바라보자, 페르티안은 슈바이크에게 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원망스런 눈빛을 보내는 것이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나는 씨익 웃고는 수줍은 샌님마냥 눈 둘 곳을 잃은 채 방황하는 녀석에게 장난기가 발동되는 것을 느꼈다.
“어디가 그렇게 예쁜데?”
“뭐.. 뭔 소리야?”
“여기? 아님 여긴가?”
평소와 다른 녀석의 반응에 재미가 들린 난 계속해 얼굴을 들이밀며 녀석을 놀리기 시작했고, 페르티안은 내 행동에 식은땀까지 흘리며 울상을 지었다.
귀여운 녀석의 반응에 신이 난 내가 정원으로 도망치던 녀석을 따라가던 그 때였다. 정원 잔디를 관리하기 위해 심어 놓았던 마력 물 분사기가 공중에 떠오르더니 난데없는 물폭탄을 선물했다.
“에푸푸! 뭐.. 뭐야?!”
졸지에 물을 뒤집어 쓴 내가 머리를 흔들자, 페르티안은 언제 도망쳤냐는 듯 화들짝 놀라며 내게 달려왔다.
“샤벨리아! 괜찮아?!”
“으.. 응, 그냥 물에 젖었을 뿐이야.”
녀석의 걱정에 별거 아니란 듯 젖은 물을 털던 그 때였다. 내 발밑으로 붉은 무언가가 툭하고는 떨어지는 것이었다.
‘응..?’
의아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든 순간,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멀쩡했던 녀석의 코에서 코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 너 괜찮아? 왜 갑자..”
잠깐, 뭐지? 이 익숙한 시선은?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눈을 떼지 못하는 녀석의 시선에 설마하는 마음으로 내 아래를 본 순간, 얼굴이 새빨개질 수 밖에 없었다.
물에 젖은 브라우스 위로 가슴과 함께 보여선 안 될 그것이 수줍게 모습을 들어냈기 때문이었다.
“꺄아아악!!”
굴욕이었다, 내가 이런 굴욕을 당하다니! 내 비명에 정원에서 구보하던 리니와 녀석의 부대원들 그리고 저택의 모든 이들이 놀라 달려오기 시작했다.
“뭐.. 뭡니까?!”
“괜찮으십니까, 샤벨리아님?!”
시발! 오지마!! 오지말라고!! 나는 급히 팔로 가슴을 가리고는 나를 따라오는 녀석들을 피해 저택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페르티안은 흘러내리는 코피를 닦을 생각도 없이 멍하니 샤벨리아가 사라진 저택을 바라보았고, 헐레벌떡 달려온 털보리니가 그에게 물었다.
“뭡니까? 대체 샤벨리아님이 왜 저러신 거죠?”
그러자 페르티안은 조용히 자신의 엄지 손가락을 피며 말했다.
“리니, 나 여기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