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25. 백야(白夜)의 플로헤타
[ 25. 백야(白夜)의 플로헤타 ]
페르티안과 샤벨리아가 왕도에 있을 무렵, 제국군 점령지인 모쉘에도 작은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세타 강 이남으로 진출하지 못한 것에 대한 조치일까, 제도(帝都) 뷰쉬발크에서 황제의 손님이 도착해 있었다.
침공군 원수인 마벨을 비롯한 고위장교인 블뤼힐, 프레드릭 그리고 노르공은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손님을 접견실에 앉아 바라보고 있었다.
스윽.
“올 라운드 넘버, 아슈트로 폰 켈뱀부르크 인사드립니다.”
은발에 황금빛 눈동자를 한 열일곱 정도의 미소년이 황금무늬가 수놓아진 백색의 제복에 검은색 외투를 입은 차림으로 마벨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권태로워 보이는 그의 눈동자 아래에는 작은 매력점이 보였고, 검을 다루는지 기품있는 샤벨 하나가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었다.
“올 라운드가 올 줄은 몰랐군. 게다가 황실 직속 흑십자(黑十字) 기사단 두 명을 대동해서는 말이지.”
“마벨님을 아끼는 폐하의 작은 선물일 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
“훗.. 그런가?”
마벨의 말대로 아슈트로 뒤에는 베이지 머리칼 미소녀 하나와 은은한 적갈색 머리칼 미소녀가 검은색 제복에 황실을 상징하는 황금빛 무늬가 새겨진 차림으로 그의 뒤에 시립해 있었다.
“씰이라면, 여기 마벨 각하의 11기사단도 있거늘 제도(帝都)가 우릴 아주 우습게 보는군!”
블뤼힐은 제도(帝都)에서 파견된 인력에 불만인 듯 노골적으로 목소리를 높혔고, 서부전선에서 승리를 거둔 노르공 백작 또한 자신의 붉은 수염을 만지며 불쾌하단 듯 블뤼힐의 말을 거들었다.
“맞습니다! 이건 우리를 무시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처사지요!!”
흉흉한 분위기에도 아슈트로는 권태로운 표정과 함께 블뤼힐 백작과 노르공 백작을 바라보더니 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마벨님의 실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적 하나에 다섯이 당했단 11기사단 이야기는 제도(帝都)에서도 유명합니다. 게다가 군은 연이어 패배하셨다지요?”
“뭐라?!”
“이런 건방진!!”
아슈트로의 말에 블뤼힐과 노르공 외에도 회의실에 있던 프레드릭을 위시한 카트브라 남작과 슈트라우스 남작까지 무례하단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스윽.
“뭐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그의 도발에 마벨은 개의치 않는단 듯 옅은 미소와 함께 손을 들어 부관들을 멈추게 하더니, 그에게 물었다.
“그 말을 하려고 그 먼곳을 온건 아닐테고.. 그래서? 자네가 온 이유가 뭐지?”
“제가, 작지만 큰 균열하나를 만들어 드리죠.”
“균열?”
“네, 예의 그 씰도 볼 겸 말이죠.”
* * *
거창했던 승전파티가 끝나고, 지친얼굴을 한 페르티안이 앙센과 함께 녹초가 되어 내게 돌아왔다.
“머리가 터질거 같아..”
“익숙해 질겁니다.”
귀족 40년 인생의 관록일까, 너덜너덜해진 페르티안과 달리 멀쩡해 보이는 앙센은 아직 멀었단 표정과 함께 지쳐 벤치에 쓰러진 그를 향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내게 열쇠하나를 건넸다.
“이게 뭐야?”
“폐하께서 손수 고르셨다고 합니다.”
“설마..”
순간, 그 열쇠가 무엇인지 직감한 내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바라보자, 앙센은 ‘이런 걸로 놀라다니, 아주 귀엽습니다’란 미소와 함께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맞습니다, 준작과 샤벨리아님의 집이죠.”
“지.. 집?”
“그렇게 놀라시긴, 폐하 말씀으론 최대한 아담한 걸로 고르셨다 했으니, 가보면 아실겁니다."
전생에서도 사지 못했던 집을 여기서 사게 될 줄이야. 나는 앙센이 준 열쇠를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며 어쩔 줄 몰라했다.
“메이드와 시종들을 구하기 전까진 제 집의 아이들이 돌봐드릴 겁니다. 보니까 제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시더군요.”
“앙센..”
이 자식, 너 좋은 놈이구나. 나는 감격한 눈동자로 녀석을 쳐다보자 앙센은 ‘오늘 뭘 잘못 먹었나?’란 표정으로 내게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더니 자신의 앞에선 마차에 황급히 타는 것이었다.
“그.. 그럼, 다음 궁성회의때 보죠.”
“놀러갈게.”
“네.. 네?”
내 말에 앙센은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냔 듯 쳐다보았고, 난 해맑게 열쇠를 쥔 손을 흔들며 말했다.
“가깝다며, 자주 갈게.”
“아.. 아니, 그러시지 않아도..”
“떡 들고 갈 테니까, 있어야 돼. 알았지?”
“떠.. 떡이요? 떡은 대체 뭔.. 아니 괜찮으니까 안 오셔도..”
찰싹.
히이잉 -
나는 내 방문에 기뻐하는 앙센에게 손을 흔들며 말의 엉덩이를 때렸고, 앙센은 마차 창문 밖으로 몸 절반을 꺼내 필사적으로 팔을 교차시키며 내게 뭐라뭐라 하며 점점 멀어졌다.
“헤헤, 자식.. 간다니까 좋아하기는..”
역시 친구는 전쟁에서 사귄 친구가 최고라 했던가, 나는 하루아침에 생긴 집에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쳐 쓰러진 녀석을 들쳐 맸다.
“킁킁.. 너 술도 마셨냐?”
“으.. 응.”
페르티안에게서 나는 와인향에 ‘힘들었겠네’란 표정으로 우리의 마차에 녀석을 구겨 넣었다.
“우에엑..”
“시발! 삼켜!! 너 거기서 더 나오면 뒤져!!”
*
*
*
낮에 그리 왁자지껄하고 화려했던 곳이었나 싶을 정도로 왕도(王都) 크리스티네는 꽤나 아늑한 운치를 풍기며 고요했다. 게다가 넓은 대로를 달리는 마차는 우리뿐, 밝게 빛나는 달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며 내 시선을 빼앗았다.
“우우..”
힘들었던 걸까, 취기에 상기된 얼굴로 내게 기대 잠에 골아 떨어진 녀석은 추운지 몸을 웅크렸고,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린 난 녀석의 몸을 따뜻하게 해줄 심산으로 근처에 놓여져 있던 외투를 집으려던 그 때였다.
스륵.
물컹.
‘..!’
어깨에서 미끄러진 녀석은 아래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순간 내 가슴을 덮쳤고,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난 눈을 깜박이며 어쩔 줄 몰라했다.
“이 베개 되게 부드럽다..”
“뭐.. 뭐?”
그렇게 말릴새도 없이 녀석은 좋은 걸 찾았단 듯 내 품을더욱 파고들며 얼굴을 부비부비하기시작했다.
‘이.. 이 새끼가..’
너무 당황해 말이 나오지 않던 그 때, 나보다 키가 큰 녀석은 그 큰 몸집을 내게 기댔고, 속절없이 뒤로 밀린 난 마차 구석에 몰린 채 내 가슴을 녀석에게 용납하고 말았다.
‘빠.. 빨리 떼어내야..’
“우웅..”
원래자리로 일으켜야 하건만, 너무 당황한 걸까 녀석을 밀어내려는 내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당한 건 나인데 아까부터 심장은 왜이리 쿵쾅거리는지 녀석이 아니라 내가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만 같았다.
“어..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그렇게 패닉에 빠진 눈동자로 고장나고 있을 때 즈음, 잠에 취해 중얼거리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벨리아..”
“으.. 응?”
나는 내 품에서 행복하게 미소를 짓는 녀석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 샤벨리아가 너무 좋아.”
화악.
‘이.. 이새끼가 수.. 술 쳐먹고 뭐.. 뭔 소리를..’
난데없는 고백이라니, 나는 패닉을 넘어 내 머리는 새하얗게 변하며 폭주가 되어 다운된 서버마냥 고장나 버렸다. 하지만 다음에 들려온 녀석의 말에 난 녀석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고마워..”
“뭐.. 뭐가?”
“다.. 다 고마워..”
“...”
아기마냥 잠든 순수한 녀석의 표정때문일까? 당황함에 날뛰던 내 심장이 조금씩 진정이 되었고, ‘별 수 없지’란 표정과 함께 내 가슴품에 잠든 녀석을 조심스레 안아 내 허벅지 위에 뉘어준 난 오늘따라 더 귀여운 녀석의 머리칼을 넘겨주며 나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었다.
히이이잉-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말에 나는 깊게 잠이 든 녀석을 마석에 놓고는 마차 밖으로 나갔다. 32년만에 생긴 집이라니, 정말이지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첫술부터 배부를 수 없다고, 나는 아담하지만 처음으로 생긴 집을 이 기쁜 두 눈으로 마주했다.
“어..?”
내가 잘못 본 걸까? 나 술 안 먹었는데.
“저기, 집 잘못 찾아왔는데요.”
“예? 무슨 소리십니까? 여기가 맞는뎁쇼.”
마부의 말에 나는 다시 눈을 비비며 우리의 집을 봤고, 거대한 정원과 함께 화이트 톤에 에메랄드 빛깔로 꾸며진 호화스런 저택 하나가 내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것도 폐하의 말대로 꽤나 아담한(?) 사이즈로 말이었다.
“이.. 이게 아담하다고..?”
그렇게 놀란 눈으로 경악하는 사이, 저 멀리 자기 집 인양 털보리니가 당연하단 듯 해맑은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샤벨리아님!!”
‘저.. 저 새낀 또 왜.. 으응?!’
넓은 정원 한 켠, 360명정도의 간이텐트들이 오밀조밀 쳐져 있었고, 녀석의 부대원들은 자신의 대장처럼 이 곳이 무슨 지들 아지트인양 모닥불과 함께 아주 술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그것도 따끈따끈 신상과 같은 첫 집에서 말이었다.
끼익.
“뭐하십니까? 안 들어오고.”
부들부들.
“샤벨리아님?”
이 쳐 죽일 새끼, 감히 주인이 오기도 전에 언박싱을 해? 나는 ‘왜 그러시지?’하며 쳐다보는 리니에게 화사한 미소를 지어주며 말했다.
“리니, 다진 돈까스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