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24. 백야(白夜)의 플로헤타
[ 24. 백야(白夜)의 플로헤타 ]
검은색 머리칼과 귀여운 초록색 눈동자가 찬장에 전시된 화려한 찻잔들과 티팟들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고민하고 있었다.
대략 열두살 정도는 되었을까, 귀여운 미소년은 단정한 집사복 차림으로 귀여운 외모와 달리 꽤나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짚어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황금빛 테두리에 푸른 원이 그려진 찻잔과 함께 안이 반 정도는 투명하게 보이는 유리와 자기가 혼합된 귀여운 티팟 하나를 꺼내 준비하기 시작했다.
프러겔 남부, 드리스틴 장인들이 만든 티팟세트는 한 눈에 봐도 고풍스런 핸드페인팅이 곁들어져 투명한 유리안으로 보이는 은은한 붉은 홍차를 더욱 고급스럽게 해주는 최고급 왕실공납품 중 하나였다.
게다가 이 홍차로 말하자면, 세달에 한 번 입항한다는 연합왕국 국제상선을 통해 들여온 헤이촐론산 고급홍차였다.
그렇게 소년은 꽤나 만족스런 자신의 다과상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귀품있는 걸음걸이로 화려한 궁성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얀 셔츠사이로 보이는 푸른 보석을 보건데 그는 사람이 아닌 꽤나 고급 씰인 듯 그의 이동에 궁성의 메이드들과 시종들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예를 표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소년은 한 눈에 봐도 화려한 문양이 그려진 거대한 문 앞에 멈춰 서서는 노크를 했다.
똑똑.
“플로헤타님, 오전 티타임 시간입니다.”
하지만 그의 주인은 무엇에 빠졌는지 답이 없었다.
“하아..”
마치 익숙하단 듯 작게 한 숨을 내쉰 그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아름답게 치장된 방 너머, 지적이고 아름다운 자신의 주인이 또 무엇에 빠졌는지, 마법거울에 코를 박은 채 헤실헤실 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플로헤타 님, 그러다 빠지시겠습니다.”
“헤에..”
누가 이런 그녀의 모습을 알까? 기품있고 지적인 그녀는 왕국 모든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라는 백야(白夜)의 플로헤타였다.
하지만 그것은 공식석상에 보여주는 대외용 얼굴일 뿐 실상 안에선 어느 시골아가씨보다 자유분방하고, 어린 귀족영애보다 철부지인 정말이지 손이 많이가는 주인이었다.
“밀로, 밀로.”
“또 왜 그러십니까?”
밀로는 그녀의 부름보다 홍차의 온도가 더 중요하단 듯 자신이 가져온 티팟 아래로 작은 난로를 넣어 홍차의 온도를 맞추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리곤 작게 따른 시음용 찻잔을 코로 음미하며 한 입 마시던 그 때, 해맑은 주인의 물음이 들려왔다.
“근데, 그 날이 뭐야?”
“푸흡!!! 켁켁!!”
모든 그녀의 공격에 이제는 면역이 되었다 생각했거늘, 밀로는 생각지도 못한 플로헤타의 물음에 홍차를 내뿜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그 말은 또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우웅.. 샤벨리아 마스터가 샤링한테 그러던데?”
또 언제 훔쳐봤던 걸까? 밀로는 이정도면 범죄수준이라는 생각과 함께 해맑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플로헤타를 지나쳐 그녀가 보고 있던 마법거울을 꺼버렸다.
“적당히 하시죠, 이건 사생활 침해를 넘어, 관음증 수준입니다.”
“치이이..”
플로헤타는 밀로의 잔소리에 입을 삐죽 내밀며 ‘맨날 다 안 된데’하며 고개를 돌렸다. 전설의 마도사이자 위대한 창조주 토마 사무엘이 남겼다는 13명의 오리지널 씰 중의 하나인 그녀가 열혈한 사생팬처럼 누군가를 스토킹을 하고 있단 걸 안다면, 아무리 창조주라 할지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빨리 샤링이 왔으면 좋겠다. 헤헤..”
하지만 그런 밀로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대로가 내려다보이는 창문밖을 바라보며 바보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다음날, 해가 서쪽에서 뜬 걸까? 늦잠꾸러기인 자신의 주인은 웬일인지 아침부터 일어나 꽤나 부산스럽게 방을 돌아다니며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밀로 밀로.”
“왜 그러십니까?”
“나 뭐 입지? 응? 나 뭐 입을까?”
“그냥..”
“그냥은 안 돼! 특별한 거! 나 특별한 거로 골라줘!!”
‘누가 들으면 제가 옷 주워다 입힌 줄 알겠습니다..’
나는 어린아이만냥 들뜬 그녀의 모습에 작게 한 숨을 내쉬고는 특별한 행사를 대비해 맞춰 두었던 하얀 예식용 드레스를 가지고 왔다.
“이건 어떠십니까?”
“오오! 그거 좋다!!”
마치 물을 만난 수달처럼 드레스로 뛰어 들려는 그녀를 능숙하게 막은 나는 손목을 잡고는 이렇게 말했다.
“우선 닦죠, 눈꼽이 한 가득입니다.”
궁성까지 들릴 정도의 함성과 환호가 온 왕도를 들썩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아름다운 내 주인도 개선해서 들어오는 엘렌 백작과 프러겔 귀족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샤벨리아가 이곳 왕도에 왔다고 생각하자 떨리는지 아름다운 주인은 금방이라도 울 것 만 같은 표정과 함께 발을 동동 구르며 내게 말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밀로, 나 갑자기 떨려.”
“괜찮습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 특별 18번 마스크를 준비한 것 아니겠습니까? 자 한 번 해보시죠.”
내 말에 아름다운 주인은 자애로운 얼굴과 함께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흠.. 확실히 연습한 보람이 있군요. 완벽한 마스크입니다.”
“저.. 정말? 나 괜찮았어?”
그렇게 샤벨리아가 좋은 걸까? 누가보면 선보러 나가는 사람인줄 알겠다. 밀로는 거울 앞에 서서는 새롭게 개발한 18번 마스크를 선보이며, 연습하는 주인의 모습에 작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타앙 – 타앙 -
“신성 프러겔 왕국, 제1성 플로헤타 폰 도로테리아 슈팅겔 님이십니다!”
시종의 입실 알림에 아름다운 주인은 연습한 18번 마스크를 훌륭히 수행하며 귀족들의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여왕의 뒤에 시립한 순간 그녀의 시선이 귀족 들 사이에서 눈에 띌 정도로 화사하게 아름다운 샤벨리아에게 멈추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샤벨리아는 확실히 특별한 씰이었다. 플로헤타님처럼 오리지널 씰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아름다운 주인 못지않게 특별한 마나의 빛이 느껴지는 것은 나조차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독특했다.
게다가 화려하게 만개한 꽃처럼 빛나는 그녀의 외모는 찬란한 태양과도 같았다. 그래서일까 은은한 달빛과도 같은 주인이 화려하게 빛나는 그녀에게 이끌리는 것은 본능적일지도.
“하아.. 하아..”
“플로헤타님.”
“헤헤헤..”
빠직.
“플로헤타님!”
칠칠치 못한 주인의 모습을 가려주는 것도 훌륭한 사용인의 몫이었다. 나는 관음증 수준의 40대 아저씨 마냥 헤벌쭉 샤벨리아를 훔쳐보는 아름다운 주인에게 경고를 하듯 말했다.
“그냥 가서 인사를 하시죠.”
“인사? 아.. 안 돼!!”
“예?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하셨으면서 왜..”
“마.. 마음의 준비가.. 아직..”
그렇게 마음의 준비가 안 되신 분이 이렇게 화장실에 숨어서 훔쳐보는 것은 괜찮으십니까? 나는 머리가 지끈거린단 듯 관자놀이를 만지며 말했다.
“그만 나가시죠, 이러다 잡히면 저희 둘다 지하감방행입니다.”
그 뒤로도 주인은 샤벨리아의 뒤꽁무니만을 따라다니며, 말할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마력을 어린아이 장난감마냥 가지고 노는 그녀였기에 아무리 샤벨리아라 할지라도 이상한 느낌만 받을 뿐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음흉한 시선으로 지켜보는 플로헤타를 눈치챌 순 없었다.
이렇게 두다간 파티가 끝날 때 까지 인사는커녕 음흉한 변태 아가씨로 남을 것 같은 예감에 나는 그녀가 샤벨리아에게 한 눈이 팔린 사이 주인 몰래 마나를 흩트리며 도망쳤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의 기척을 감지한 샤벨리아가 숨어있던 플로헤타 앞에 나타나며 둘은 드디어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후우.. 언제 쯤 철이 드시려나..”
하지만 걱정도 잠시, 나는 오늘 밤 그녀의 목욕물을 준비하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욕실로 향했다.
* * *
“친.. 구요?”
“응, 응.”
친구라니? 나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여자친구, 즉 여자사람 친구는 내 인생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싫다고 하면 바로 창문 밖으로 뛰쳐나가 죽어버릴 거란 듯 쳐다보는 그녀의 간절한 눈동자에 잠시 약해진 나였지만, 역시 친구는 무리였다.
남자였을때도 사교성이 제로였던 내가 여자가 되었다 해서 그 발전이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분명, 그녀도 내 사교성에 실망해 떨어져 나갈것이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최대한 그녀가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게 상냥하게 말을 했다.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플로..”
‘..!’
절망의 기운, 그녀가 엄청난 마력의 소유자인건 알고 있다만 순식간에 주변의 분위기를 절망도 이런 어두컴컴한 암흑으로 만들만큼 위력적일 줄은 몰랐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도 느낀 걸까, 갑자기 사람들의 비명과 소리가 들려왔다.
“마.. 마족의 침입이다!!”
“시.. 신관을 불러!! 암흑의 존재가 프러겔에 강림하려 한다!!”
‘하하.. 이런 씨..’
하나의 어둠이 된 듯 플로헤타는 내 손을 잡은 손을 바들바들 떨며 자신의 주위로 엄청난 죽음의 기운을 펼치며 주변을 초토화시키기 시작했다.
‘뭐.. 뭔 반응이 초대형 블록버스터 급이야..? 도.. 돌겠네..’
엄청난 그녀의 파급력에 난 정말 그대로 놔두었다간 이 왕성 에르말디아가 대륙 최고의 마왕성이 될 것만 같은 예감에 다급히 말을 정정했다.
“..헤타 님과 아주 꼭 사귀고 싶네요.”
“정말요?”
“그.. 그럼요.”
“다행이다, 난 또 거절당하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플로헤타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너무도 기뻐했고, 왕성 에르말디아를 집어 삼켰던 어둠의 기운은 거짓말처럼 사라지며 평상시와 같이 아름답게 빛나기 시작했다.
‘어.. 엄청난 애랑.. 친구 먹은 걸지도..’
그렇게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플로헤타는 밝은 미소와 함께 내 손을 가득 잡아 흔들며 말했다.
“고마워요, 샤벨리아, 나 처음으로 친구가 생겨서 기뻐요!!”
“처.. 처음이요?”
“네!”
“그.. 그럼 얼마동안 친구가 없던 거에요?”
불길한 기운, 첫 사랑만큼 첫 친구의 존재는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설마 아니길 빌며 그녀의 입에 집중했고, 플로헤타는 순진한 얼굴로 손가락 세 개를 피며 말했다
“나, 삼백년만에 처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