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23. 백야(白夜)의 플로헤타
[ 23. 백야(白夜)의 플로헤타 ]
모두의 시선을 빼앗을 정도의 아름다운 미녀, 그것이 플로헤타였다. 다리까지 내려올 정도의 긴 검청색 머리는 윤기가 흘렀고, 순수한 마나와 같이 맑고 푸른 눈동자는 혜안(慧眼)을 담은 듯 그 총명함을 빛내고 있었다.
샤벨리아가 장미와 같이 화사하고 화려한 아름다움이라면, 프로헤타의 미(美)는 청초한 백합과 같은 청순한 아름다움이었다.
화려하게 세공된 황금빛 악세사리가 그녀의 머리칼과 목, 그리고 팔을 감싸며 치장되어 있었고, 정절이 느껴지는 화이트 톤의 드레스는 애교있게 묶여진 푸른 리본과 어우러져 섹시함과 귀여움 사이를 밀당하듯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교묘히 파여져 뒤로 넘겨진 짧으면서도 뒷태가 긴 치마는 건강하고 늘씬한 그녀의 허벅지와 각선미를 들어내며 시선을 빼앗았다.
검술에 특화 된 샤벨리아와 달리, 그녀는 마법에 특화 된 씰인지 순결한 하얀색의 고풍스런 조각이 새겨긴 지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천사를 연상케 했다.
몸가짐이 꽤나 예절이 깊고, 조신한 성격인지 그녀는 여왕의 뒤에 시립하며, 따뜻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와..’
그것이 플로헤타를 처음 본 내 첫마디였다. 그렇게 여왕의 뒤에서 조용히 서있던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좌중을 훑는가 싶더니, 정확히 귀족들 사이에 있는 내게 꽂혀 멈춰 섰다.
‘응..?’
천상의 미소가 있다면 저 미소일까, 나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주는 그녀의 모습에 지금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잊은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정도였다.
그녀가 들어 올 때부터 나와 같은 씰이란 느낌은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품고 있는 마력을 느낀 순간 난 그녀가 보통의 씰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하늘의 끝을 볼 수 없듯 그녀의 마력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왜 아까부터 나만을 응시하며 미소를 짓느냐는 것이었다.
‘계속 보자니.. 꽤나 부담스러운 미소네..’
그렇게 한결같은 그녀의 시선과 미소에 땀을 삐질 흘리며, 난감해 하던 그 때였다.
“..리아 경.”
“...”
“샤벨리아 경!”
“으.. 응?”
언제부터 불렀던 걸까, 상념에서 빠져 나온 난, 나를 애타게 부르는 앙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어서 정신을 차리란 듯 단상을 향해 몰래 턱짓을 했다.
‘아..’
내게 집중된 귀족들의 시선 가운데, 에스테리아 여왕이 미소와 함께 나를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뭐 하시는 겁니까? 어서 가세요! 어서!!”
앙센은 철없는 여동생을 혼내키듯 작게 다그치며 아래로 손짓 했고,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앙센에게 걱정말란 듯 고개를 끄덕이며 황급히 여왕이 있는 단상으로 걸어가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오.. 그대가 샤벨리아군요!”
“시.. 신, 샤벨리아, 존귀하신 여왕폐하를 뵙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든 순간, 난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여왕은 너무 귀여워 죽겠단 표정과 함께 날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폐.. 폐하?”
“어머, 이 손 좀 봐! 이 여리고 고사리같은 손으로 검을 휘둘렀단 말인가요?”
“예? 그.. 그렇습..”
“세상에 세상에, 어쩜 이렇게 인형같이 생겼을까? 아주 꽉 깨물어주고 싶네.”
‘예..? 뭘 깨물어요?’
마치 옆집 아주머니를 만난 듯 그녀는 내 주위를 서성이며, 아주 예뻐죽겠단 듯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우리 플로로도 예쁘지만, 경은 아주 새침하고 깜찍한게 내 맘을 아주 들었다 놓는 것이 아주 요물이 따로 없군요.”
‘요.. 요물이요?’
이제는 내 머리카락을 잡아 만지며 ‘어머나! 별빛이 따로없네!’ 감탄하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살려달란 듯 페르티안과 앙센을 바라보았고, 둘은 그런 내 모습에 ‘쿡’하며 웃음을 터트리며 꽤나 고소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 우씨..’
이제는 내 볼을 만지며 아주 온 몸 구석구석을 살피는데, 마치 집에 놀러온 주인 친구들에게 잡힌 애완견마냥 내 표정은 ‘그래, 니 맘대로 해라’라는 해탈한 표정으로 그녀의 품에 잡혀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샤링.”
“예.. 예..?”
“샤링이라 불러도 되죠?”
이제는 애칭까지 만든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는데, 거기서 ‘아니요, 싫습니다’라고 할 용기가 없었던 난 어색한 웃음과 함께 울며 겨자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역시, 좋아할 줄 알았어요, 샤링!”
'제발.. 누가 이 분 좀 말려줘요..'
서른 둘에 애칭이라니, 나는 겉만 웃고 있을 뿐 속은 썩어 문드러지다 못해 바스라질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여왕은 내 양손을 잡아 흔들며 너무 잘됐단 듯 미소를 지었고, 난 속으로 울며 ‘난 이제 끝났어’란 말만을 되풀이 할 뿐이었다.
“모두 들으세요!”
사람의 모습이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내게서 떨어진 그녀는 다시금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으로 귀족들을 바라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프러겔의 영웅, 페르티안 준작의 씰 샤벨리아에게 그의 성을 쓰는 것을 허락하려 합니다. 경들의 의견은 어떠합니까?”
“합당하다 생각합니다.”
여왕의 물음에 엘렌 백작을 비롯한 고위귀족들은 이견이 없단 듯 대답을 했고, 여왕은 내게 고개를 돌려 기대하란 듯 눈을 찡끗하더니, 다시금 귀족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에 난 샤벨리아에게 플로헤타와 같은 제1성의 칭호를 내리고 싶은데.. 경들도 같은 생각이겠죠?”
“이.. 일성이라고?”
“아무리 공적이 있다지만, 플로헤타님과 같은 일성이라니..”
페르티안의 성을 쓰는 것과 달리, 고위귀족들은 일성에 임명한다는 여왕의 선언에 꽤나 동요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타앙 – 타앙 -
“폐하의 말씀이 아직 안 끝났습니다.”
어수선한 대회의실의 분위기에 시종이 창을 내리치자, 귀족들은 입을 다물며 조용히 했지만, 대다수가 여왕의 결정에 납득하지 못하겠단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여왕은 자신감에 찬 미소와 함께 귀족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 듣자하니, 여기 샤벨리아 경이 대륙최고의 마도사라 불리는 마벨의 정예 씰 다섯을 꺾었다는데.. 내가 잘못 들은 건가요?”
‘응..? 대륙최고 뭐..?’
여기 사정을 몰라 녀석을 만났을 땐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지 몰랐지만, 여왕이 친히 대륙최고의 마도사라고 높이자 난 생각보다 큰 거물을 만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나와 달리 귀족들은 여왕의 물음에 꿀 먹은 벙어리마냥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서로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아니면, 여기서 자신의 씰이 마벨의 씰을 이길 수 있다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일성을 내리겠단 내 말을 취소하겠소.”
이 역시도 귀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고, 여왕은 그런 귀족들의 모습에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내게 ‘너 이거, 언니 덕분이다’란 표정으로 생색을 냈고, 난 그런 그녀의 오지랖에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제발 절 좀 내버려 두세요..’
그렇게 귀족들의 암묵적인 동의를 얻은 여왕은 쐐기를 박을 참인지, 뒤에서 미소와 함께 조용히 시립해 있던 플로헤타를 바라보며 그녀의 생각을 물었다.
“왕도의 수호자인 그대가 생각하기엔 어떤가요, 플로헤타?”
“저도, 폐하의 생각에 이의가 없습니다.”
처음 듣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정말 얼굴도 목소리도 예쁜 사람이 존재하긴 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목소리는 매력적이었다.
플로헤타의 동조까지 더해지자, 대회의실의 그 어느 누구도 여왕의 결정에 반대하는 이가 없었고, 여왕은 만족스런 미소와 함께 모두의 앞에서 선포했다.
“신성 프러겔 왕국, 에스테리아 폰 요제파 슈트로겐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샤벨리아 폰 퓌러슈타트를 왕국의 씰 중 으뜸인 제1성의 칭호를 내린다.”
* * *
공로에 대한 치하가 있은 후, 궁성 에르말디아는 전승 축하파티가 벌어졌다. 거기엔 전쟁에 참여했던 귀족들은 물론 왕족 모두와 프러겔의 고위 귀족들이 참석할 정도로 거대한 전승파티였다.
이번 전쟁의 주역이었던, 페르티안은 앙센에게 끌려다니며, 안면을 트고 싶어하는 수많은 귀족들에게 시달리고 있었고, 나는 살려달란 듯 애처롭게 쳐다보는 녀석을 망설임없이 버리고는 홀로 화려한 궁성의 복도를 구경하고 있었다.
“...”
하지만, 왜일까? 분명 혼자이건만 이 혼자가 아닌 기분. 나는 어디선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시선에 ‘너 잘걸렸다’란 표정과 함께 번개같이 몸을 날려 아까부터 훔쳐보던 녀석의 앞에 기습적으로 모습을 들어냈다.
“꺄아아악!!”
‘응..?’
왜.. 왜, 얘가 여기에 있지? 나는 갑작스레 나타난 내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엉덩방아를 찧는 플로헤타 모습에 되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티장에 입실할 때부터, 화장실에 있을 때 조차 느꼈던 시선. 마치 스토커와 같이 나를 따라다녔던 그 찜찜한 시선이 플로헤타였다니, 나는 꽤나 반전있는 범인의 모습에 놀라 눈을 껌벅였다.
“프.. 플로헤타?”
“미안해요, 미안해요. 고의가 아니었어요!!”
다소곳하고 지적인 모습과 달리 플로헤타는 한 번만 용서해 달란 듯 귀엽게 울상을 지으며 내게 빌었다.
“무.. 무슨 일이에요?”
“후에엥.. 미안해요, 샤벨리아.”
생긴것과 달리 꽤나 애교쟁이인지 그녀는 내게 와락 안기더니, 자연스레 내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이.. 일단.. 진정하고.. 왜 그랬는지 말해봐요.”
“흑흑.. 정말 말하면 용서해 줄거에요?”
“그.. 그럼요, 그러니까 말해봐요. 왜 계속 절 따라 다니신거에요?”
그러자 플로헤타는 눈물이 고인 예쁜 눈망울 깜박이더니,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샤벨리아, 나랑 친구해줄래요?”